2024 기형도문학관 기획 전시 <오후 4시의 희망>
'오후 4시의 희망'
숲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팅팅 올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박, 우린 언제나
서류 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아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 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2023, p.49
기획 의도
오후 4시, 빛이 스며드는 시간은 하루 중 조금은 여유로운 시간이며 인생 시계에서 오후 4시는 50세 이후 중년의 나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기형도 시인은 시 '오후 4시의 희망' 에서 도시 속 시적 화자 '숲'이 블라인드를 내리는 행위와 그의 시선을 좇아 현대인들에게'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라는 역설을 전합니다. 기형도문학관에서는 이러한 기형도 시인의 작품 세계를 '빛'을 소재로 작업 활동을 하는 미디어 작가 진시영의 시각 예술로 표현한 미디어월 전시 '오후 4시의 희망'으로 구성하여 작품을 마주한 관람객들이 심상을 떠올리며 잠시 고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합니다.
작가 소개
진시영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시인의 예술적 정체성과 내면세계를 상징적으로 탐구하고,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나아가 문학과 미디어아트의 융합으로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시도하며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약력
유네스코 미디어아트 창의벨트 국립아시아문화전당권역 예술감독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야간경관 조성 사업 '빛의 분수대' 시그니처1 작가 & 기획 콘텐츠 총괄감독
광주 미디어아트페스티벌 총감독
2024 광주 융복합 미디어아트 공연 '빛의 파노라마 - The Light of Panorama' 예술총감독
2021 광주 비엔날레 미디어 파사드 '빛의 나무'
2019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예술감독
2019 홍콩 타임즈 스퀘어 미디어월 전시 'Lunar Fantasy with Ancient Auspicious Animals' (가나아트&홍콩 타임즈스퀘어 리미티드)
2018/2017 광명 동굴 미디어 파사드 '빛의 페스티벌', '빛의 연대기'
2016 'New Romance, 2016 한국-호주 국제교류전' 호주 현대미술관(MCA) 시드니, 호주
광명문화재단 기형도문학관 경기 광명시 오리로 268
TEL : 02.2621.8860 | FAX : 02.897.3678 | E-mail : kihyungdo@gmc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