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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난희: 그림 속의 자연 畫中自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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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난희_ 그림 속의 자연 畵中自然》
2025. 4. 10. – 7. 6.


‘석난희, 1960년대 ‘뜨거운 추상’의 시대에 ‘자연의 순수’를 그리다’

‘석난희는 김환기의 제자로, 1962년 대학 재학 중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되어 신문회관에서 개인전을 열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김환기의 권유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에서 수학하던 1964년부터 1969년까지 김윤신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나누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귀국 후에는 미국 유학을 마친 고(故) 최욱경과도 창작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며 교류했다. 두 사람은 서울예고 동창으로서 오랜 우정을 쌓았으며, 여성 작가로서 서로에게 큰 위로와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이번 전시는 석난희의 예술적 역량이 가장 왕성하게 발휘되었던 1980년대를 중심으로, 그의 회화뿐만 아니라 석판화, 목판화, 판목화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다. 이를 통해 자연을 주제로 한 석난희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깊이 있게 조명하고, 그의 작품이 지닌 미학적 가치와 시대적 의미를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 《석난희_ 그림 속의 자연 畵中自然》은 중국 송대 문인 소동파(蘇東坡)가 왕유(王維)의 시를 평한 표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畫, 畵中有詩)”에서 차용되었다. 이는 평생 자연을 탐구한 석난희의 작품 세계를 함축하며, 그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동양적 예술관을 은유한다.

석난희의 그림은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붓질과 먹 선은 자유로운 정신세계와 생명의 리듬을 담아내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고유한 예술적 언어를 구축한다.

그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에서 재직(1971-1987)하며 후학을 양성했으며, 석주미술상(1992)과 이중섭미술상(2005)을 수상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선재미술관, 호암미술관 등 국내 주요 미술기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성곡미술관은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강연과 작가가 직접 진행하는 도슨트, 아티스트 토크 등을 진행하여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자리를 마련한다. 
자세한 내용 및 신청 방식은 추후 성곡미술관 홈페이지(http://www.sungkokmuseum.org)와 미술관 SNS 채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매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오후 2시마다 정규 전시해설이 준비된다. 

 o 성곡미술관 대표 소셜미디어 
   페이스북    www.facebook.com/sungkokartmuseum/
   유튜브       www.youtube.com/@sungkokmuseum/


■ 전시 개요

석난희_ 그림 속의 자연 畵中自然 (Suk Ran Hi: Nature in Paintings)
2025년 4월 10일 – 7월 6일 
평일 및 주말 오전 10시 - 오후 6시

※ 매주 월요일 휴관
※ 입장 마감 오후 5시 30분
※ 도슨트 프로그램: 매주 금, 토, 일 오후 2시  

· 주최/주관 : 성곡미술관
· 전시기획  : 성곡미술관
· 후       원  : 성곡미술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 창작주체, 환기미술관
· 전시기간  : 2025년 4월 10일(목) - 7월 6일(일) / 매주 월요일 휴관
· 전시장소  : 성곡미술관 1관 
· 전시작품  : 60여 점
· 참여작가  : 석난희


■ 전시 연계 프로그램
   
   1. 작가 도슨트
  · 일시: 2025년 4월 26일(토) 오후 2시
  · 장소: 성곡미술관 1관
  · 참여자: 석난희 작가

   2. 렉처: 〈한국 앵포르멜 미술과 여성 작가들〉
  · 일시: 2025년 5월 10일(토) 오후 2시
  · 장소: 성곡미술관 조각정원 글라스카페
  · 참여자: 윤진섭 미술평론가

  3. 아티스트 토크
  · 일시: 2025년 5월 24일(토) 오후 2시
  · 장소: 성곡미술관 조각정원 글라스카페
  · 참여자: 석난희 작가, 박윤조 미술사학자


■ 문의 

   대표 메일: info@sungkokmuseum.org 
   유선 전화: 02-737-7650



○ 기획의 글
 
성곡미술관은 2025년 첫 전시로 《석난희_ 그림 속의 자연 畵中自然》 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60여 년 동안 자연과 추상미술을 탐구해 온 석난희(b. 1939)의 예술 세계를 조망한다. 석난희는 김환기의 제자로, 한국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의 영향을 받으며, 1962년 미술대학 재학 중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돼 첫 개인전을 열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유학하며 예술적 시야를 넓혔고, 1969년 귀국 후 자연을 주제로 한 추상미술을 탐구하며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1970년대부터 목판화와 판목화를 병행하며 자연을 작품 속에 직접 흡수시키려 시도했고, 1985년에는 자연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경기도 안성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의 모든 작업은 ‘자연 연작’으로 일관되며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관계’를 담아내고자 한 그의 예술은 ‘자연과 인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반영한다. 

석난희가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던 1959~1962년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1960년대 전후 등장한 앵포르멜 미술이 한창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시대적 혼란과 실존적 불안 속에서 앵포르멜 미술은 심리적, 감정적 충격을 표출하는 적절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의 경제 개발과 산업화를 거치며 급격히 서구화되자, 앵포르멜의 표현 방식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석난희는 꾸준히 추상미술을 탐구하며 자신만의 예술적 방향을 잡아 나아갔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격렬한 표현주의적 추상미술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미감을 품고 있는데, 이는 중국 송대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에서 드러나는 동양적 예술관과 맞닿아 있다. 즉, 석난희는 추상화를 통해 그림과 시가 결합하는 방식으로 자연의 리듬과 정신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작품을 “정갈한 사랑방에서 난초를 치는 선비의 모습”에 비유하며, 문인화 전통과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정신의 흐름을 포착해 내는 듯한 그의 작품은 대상을 묘사하지도, 또는 실존적 불안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의 무의식적 붓질과 먹 선들은 자유로운 정신세계와 생명의 리듬을 표현한다. 특히,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이나 문자 형태를 연상시키는 반복적 필치는 동양적 서예와 회화의 결합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회화에서 번진 듯, 사라지는 듯한 갈색과 녹색 계열의 배경은 다른 색채임에도 자연이라는 거대한 배경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그의 내면적 사유와 정신적 자유를 시각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조형적 특징은 1980년대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이자 한국 추상미술에서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석난희는 올해 86세를 맞이했다. 그의 긴 예술 여정을 소개하는 이 전시는 1962년부터 2000년대까지의 작품을 아우르며, 특히 1980년대를 중심으로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구축된 석난희의 독창적인 미학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 

성곡미술관



○ 작가 약력

석난희(b.1939)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1964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재직(1971-1987), 석주미술상(1992), 이중섭미술상(2005)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선재미술관, 호암미술관 외 다수 기관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석난희 연보

1939 서울 출생
1962 반(反)예술·실험미술 단체 무동인 결성, 창립전 개최
1962 대학 3학년 때 최우수학생으로서 서울 신문회관에서의 첫 개인전에 초대됨
          스승인 김환기 방문, 방명록에 <난희 얼굴> 드로잉을 직접 그려서 남김
1963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1964 제2회 《악뛰엘》전 참여
1964-69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유학, 
               김윤신과 교류, 귀국 후 서울예고 동창 고(故) 최욱경과 교류
1971 신세계 화랑에서의 귀국 판화전 개최 
1977 첫 번째 ‘판목화’ 작품 <자연> 제작
1971-87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재직
1986 동산방 화랑에서 개인전 개최
1992 제4회 석주미술상 수상
2002 MANIF 8! 2002 대상 수상
2004-05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 재직
2005 제17회 이중섭미술상 수상
2014 환기미술관 《자연의 숨·결 – 석난희》전 개최
2024 영은미술관 《동행(同行) : 예술의 소명과 가치》, 
          석난희와 조각가 양영회의 모녀전 개최

작가의 말

“청회색 등의 모노크롬, 화면 위엔 자유스러운 선과 획을 무질서하게 움직여 만들어진 우연을 펼쳐 보았고 모필로 그리기도 했다가 나이프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창작, 그 희열 : 석주미술상 10주년 기념 수상작가집』, 석주문화재단, 1999.)

“제가 귀국할 무렵은 기하학적 추상이나 모노크롬이 등장하기 시작할 때인데 저는 그런 주류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어요. 파리에 가기 전에 악뛰엘 1회 전람회 때 출품했고, 귀국 후에는 박서보 선생님께서 계획하신 전시에 작품을 낸 적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기하추상이나 모노크롬이 체질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비주류였고, 주로 혼자 개인전을 많이 했어요.” (최광진, 『부드러운 욕망』, 다빈치, 2004.)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석판화를 배우기도 했어요. 그곳은 누구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창의력과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지도했고, 현대 전위미술에 대해 깊이 있는 강의들을 했어요. 당시 파리에 한국 작가들은 한묵, 문신, 방혜자 등이 있었고, 평론하셨던 이일 선생님 등 몇 분이 계셨는데 가족 같은 분위기였지요. 저는 학교에서 제작한 석판화 30점과 집에서 제작한 유화 20점으로 아르트몽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했어요.” (최광진, 『부드러운 욕망』, 다빈치, 2004.)



○ 주요 작품


〈자연〉, 캔버스에 유화물감, 1988, 162×130cm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자연〉, 캔버스에 유화물감, 1987, 130x162cm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자연〉, 캔버스에 유화물감, 1986, 162x130cm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자연〉,1984, 캔버스에 유화물감 97x130cm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자연〉,1983, 캔버스에 유화물감, 53x45.3cm
ⓒ MMCA Gwacheon


〈누드〉, 1962,캔버스에 유화물감, 130x97cm
ⓒ MMCA Gwacheon


〈자연〉, 1995, 나무에 음각,먹,48x82(x2)cm
ⓒ MMCA Gwacheon


 〈자연〉,1982, 종이에 목판, 72x51.5/72x55cm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자연〉,1968, 종이에 석판, 37x29.5cm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자연〉, 1968, 종이에 석판,29.6x39.6cm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전시전경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전시전경
ⓒ 양영회·Yangyounghoe
사진: 아인아 아카이브(Ahina Archive)



○ 전시 평론

비평 1. 오광수 미술평론가

실존하는 자연 - 석난희의 작업에 대해

62년 대학 재학 중에 첫 개인전을 가진 석난희의 작품 가운데 화집에 실려있는 <누드>화를 보면 그의 뛰어난 회화성을 발견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누드화와는 다르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대체로 데뷔 시기의 작품이 한 작가의 생애를 통한 창작의 행로를 암시해 주는 경우가 적지 않은 편인데 석난희의 <누드> 역시 이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수학하던 50년대 말과 60년대 초반의 시점은 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라는 전후 새로운 추상미술이 풍미하고 있었던 때이다. 당시 수학기의 젊은 세대가 이 앵포르멜에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누드작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은 다소 의아함을 갖게 한다. 어쩌면 이 점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작가의 독단적인 의지의 결정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실은 누드화가 일반적인 수업기의 관행으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 묘하게도 앵포르멜의 기운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누드와 앵포르멜이라니 누구나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누드화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단순한 대상으로서 여체를 다루고 있다기보다 여체를 에워싸고 있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인체가 내뿜는 기운이 형태를 앞질러 표상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단순한 인물 묘사가 아닌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기운이 인체를 에워싸면서 종내에는 굳이 인물이라는 대상일 필요가 없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누드를 그리면서도 누드가 아닌 시대적인 미의식의 반영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앵포르멜의 열기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그 영향 역시 적지 않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귀국 후 대체로 70년대의 작품의 경향을 보면 추상표현적인 감화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국내에선 철 지난 양식으로 매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그 독자적인 방법으로 앵포르멜적인 작업을 지속함으로써 예외적이란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이는 유행에 민감한 우리의 현대미술에서 자신의 출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독자의 모색을 이어간 행적이 아닐 수 없다. 화음과 불협화음, 격정과 긴장이 공전하는 화면은 어쩌면 시대를 가로지르는 의지의 행적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 같은 태도는 창작의 세계는 어떠해야 하며 작가는 어떻게 시대를 대상으로 자신을 가누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에 다름아니라 생각된다. 화면엔 이름할 수 없는 격렬한 행위의 자적과 이를 극복해 가는 순화의 내면이 겹치면서 자신을 더욱 강화하는 길로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고집스럽다고 할 독자적인 미의식의 발로는 60년에 가까운 작업을 <자연>이란 동일한 명제로 일관해 왔다는 사실에서도 엿보게 된다. 작품의 명제가 창작의 내면과 크게 관계없이 하나의 관례로서 명명하는 경우, 예컨대 <작품>이니 <무제>니 하는 명칭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독자한 미의식을 은밀히 표상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석난희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 명제가 생애를 통해 일관되고 있다는 것은 이채롭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변함없는 자기 창작의 내면이, 미의식이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낸 것임이 분명하다.

<자연>이란 사전적 의미로 보면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상태”라고 한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인위적이니 문명적이니 하는 것과는 대립한 개념으로 파악된다. 그러기에 자연은 때때로 순후한 어느 경지, 태초로 이어지는 존재의 영원성을 지향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스스로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어떤 속박도 지니지 않는 자유의 영역으로서 말이다.

자연이란 의미는 묘하게도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바 연속성과도 겹친다. 작품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띠의 연장에 존속되고 있다고 할까. 이 같은 연작의 개념은 작품의 개별성이 지니는 완결성보다 전체로서의 존재를 지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작업의 방식은 계산된 인위적인 통제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작업 자체가 스스로의 행위로서 나타남으로써 실존적인 필연성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작업”이라고 한 작가의 말에서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태어나는 상태라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호흡과 리듬”에 의해 태어나는 생명현상 그것이야말로 자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그의 70년대 초반의 작품 <판목화> 연작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판목화란 원목의 표면을 평탄하게 고른 후 칼로서 들풀과 같은 이미지를 새겨내는 작업으로 목판화의 일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 종이 위에 찍어내는 판화의 시스템을 적용하면 그대로 목판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판화의 시스템에 따르지 않고 때때로 원판 자체를 일회성의 회화로 발표하고 있다. 칼자국이 선명한 선묘의 구성은 호흡과 리듬을 생생하게 드러내게 함으로써 일반 타블로와는 다른 자연이 지닌 훈기를 그대로 느끼게 한 것으로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일체화되려는 독특한 상황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시각적으로 완성된 일반적인 평면 회화가 아닌 자연을 그대로 회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연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한 것으로써 말이다. 슈리게라(프랑스 미술평론가)가 말한 “충만한 힘과 감각을 통해 세계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라고 한 것이 이 경우에 가장 적절한 언급이 아닌가 한다.
 
이미 지적했듯이 그의 작품이 지닌 연속성은 그대로 전체 작품을 연작의 개념으로 끌고 가는 요인이 된다. 연작의 개념인 만큼 작품은 현저한 변화의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세계에 자족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미술이 보여주고 있는 심한 시대적 미의식의 경사가 없는 만큼 자기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화면에서 두드러졌던 칠하기와 그리기의 이원성이 서서히 그리기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이 변화라면 변화일 것이다. 드로잉적인 요소가 더욱 왕성해지는 양상은 직관적인 자연에의 접근이 두드러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더욱 순화된 자연관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오랫동안 도시를 벗어나 시골 안성에 자리 잡고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다. 이는 단순히 풍치 좋은 자연 속에 산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더욱 절실히 반영된, 스스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인생관의 결정이 반영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는 데서도 그의 자연에 대한 감정을 실감나게 접하게 된다.
 
“봄이 오면 노래하는 새들, 저마다의 몸짓으로 속삭이는 나무들, 그리고 비 온 후의 풀 냄새가 좋고요, 여름에는 햇살이 느티나무 아래로 스며들면 노곤한 몸과 마음을 잔디 위에 눕힐 수 있지요. 가을에는 금잔디 위에 단풍들이 사색의 장을 열게 하고 겨울에는 하얀 눈송이들이 세상을 온통 은빛 세례를 받는 것같이 만들어서 좋아요. 그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아침 태양은 더욱 찬란하고 신비롭지요. 그래서 시골 아침은 아름다워요. “

노래하는 새들, 속삭이는 나무들, 풀 냄새, 햇살, 잔디, 단풍, 은빛 세계를 만드는 눈송이, 아침 태양, 이 모든 자연현상이 다름 아닌 자신 창작의 내면이요, 자기 세계를 이루어가는 구성의 인자요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는 경이로운 자양이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삶의 환희이지 않을 수 없음을 엿보게 한다.



비평 2. 박윤조 미술사학자

‘석난희의 자연’스런 추상
 
석난희는 196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60년 넘게 자연과 교감하는 순간을 오로지 동일한 제목의 <자연(Nature)> 연작에 담아왔다. 자연을 평생의 화제(話題)이자 화제(畵題)로 삼은 작가는 무려 33회의 개인전을 열고 80여 회의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석주미술상(1992)과 이중섭미술상(2005)을 수상했다. 그녀는 1960년대 중반의 ‘무동인(無同人, ZERO GROUP)’의 활동을 제외하고 조직적 실체나 활동 없이 끊임없이 작업을 이어오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작화법을 다져왔다.

석난희의 예술적 성취는 작가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교감해온 물질적, 정신적 접속 과정에 있다. 그녀는 예술의 근원을 자연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무한한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생동감” 있는 자연 공간 구현에 몰두했다. 청색과 녹색을 반복적으로 덧바른 화면 위로 먹선이 흘러 어우러지고, 오랜 시간 깎아낸 원목의 표면 위에서 강인한 자연의 풍광이 드러난다. 그녀의 조형세계는 ‘자연’이 그러하듯이 감축되고 덧입혀지면서 스스로 반응하고 생성되는 효과를 창출해 냈다. 1968년 파리에서 귀국한 후 그녀는 한국 화단의 유행이나 서구 중심의 이분법적 길항 관계로부터 ‘초연’한, 또 다른 추상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

여성 미술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 요즘, ‘남성화가들과 다를 바 없는 추상어휘를 구사한 여성 모더니스트’ 추상화가라는 평가뿐만 아니라 자연과 미술을 둘러싼 기존의 담론에서 벗어나, 석난희의 추상 세계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윤난지, 2002) 우선 석난희의 추상은 1960년대 ‘뜨거운 추상’ 계열로 소개되어왔다. 석난희가 홍익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는 앵포르멜의 열풍이 불었다. 미술이념의 ‘전위성’을 대표하던 앵포르멜의 전개는 석난희의 대학 시절을 관통하며, 그녀의 ‘비구상’의 시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하지만 곧 한국 화단에서는 앵포르멜 경향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지만, 석난희는 파리에서 돌아온 후 오히려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화풍을 구축해 나간다. 오광수의 설명처럼 그녀는 “운동으로서의 앵포르멜 시대가 아니라, 그러한 체험이 바탕이 된 개별적인 조형언어의 성숙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석난희는 이러한 경향을 유행이 아닌, “자신의 체질로서 받아들이고 심화시”키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가감해 왔다.

석난희는 울분과 회한의 과도한 분출이 아니라 ‘점과 선과 선묘’만으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빠르게 긁어 내려간 그녀의 선과 면은 작업 행위의 지표적 특성을 띤다. 그 작품은 이른바 행위의 장이 되는데, 추상표현주의와 비견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수차례 전시 서문을 집필한 오광수 또한 1986년 ‘앵포르멜 운동의 제2기에 등단한 작가’가 소개한 후, 1990년대에는 “추상표현주의의 물결이 우리 미술을 뒤덮고 있던 시대”에 그녀가 이 경향을 “오랫동안 예술의 바탕을 지속해온 미의식의 근간”으로 여긴 것으로 설명한 바 있다. (오광수, 2006)

엄밀히 말하면 석난희의 <자연>들은 이러한 추상의 조류 속에서도 짙은 물감이 전면에 균질한 드리핑도,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차분한 단색처리도 아닌, 녹청색의 청명한 화면을 긁거나 번지게 하는 생동감 넘치는 방법을 통해 독자적인 빛을 발했다. 작가가 빠르게 기하추상으로 전환된 앵포르멜의 전개와 무관한 행보를 이어간 것은 어쩌면 초기 추상화가인 김환기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홍대에서의 실기 수업을 대부분 김환기에게 배웠다고 한다. 스승은 1962년 첫 개인전 개최를 돕고 초상화를 그려줄 만큼 제자를 독려했고, 환기미술관의 기획전 《청색,   하나의 정신》(1994.9.9.-10.9)이 김환기 작품의 주조색인 청색의 특성을 조망하고 관련 작가로 석난희를 초대한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석난희는 자신만의 추상 기법을 탐색해 나간 스승처럼, 시류를 쫓지 않고 자신만의 추상 세계를 펼쳐나갔다. 그녀의 작법은 전통으로의 회귀도, 매트한 캔버스나 백색의 한지 위로 무위자연마저도 대상화하는 행위적 지표와도 거리가 멀었다. 오광수의 다음의 묘사처럼 그녀의 캔버스는 “자연의 경이를 깊숙이” 파고든 감정을 바탕으로, 또 다른 ‘생동’의 기운이 발현 가능한 ‘태반’과 같은 생명과 생성의 기반이었다. (오광수, 1994) 빠르면서도 ‘서서히 생성’되는 발색과 작법을 거치며 캔버스는 생동하는 또 하나의 자연이 된다.

2014년 개인전 도록에서, 석난희는 자신의 “그림 앞에 마주앉는 순간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 끄집어낸 감정을 의식하고 만져볼 수 있게 하고 거기서 다음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확신”하고자 “격앙된 마음을 다스려 가라앉”히며 “조용한 대화”를 이어간다고 말한다. 이는 작업을 자신을 비우고 덜어내는 과정에 비유한 것이다. 유화에서의 자연과의 ‘조용한 대화’는 판목의 거친 표면을 다듬고 파내는 ‘판목화’의 제작 과정과 닮았다. “공간 구성이나 형상성을 초월한 화면”을 목표로 작가가 평생 유화 작품에서 자연의 구체적 형상을 감축해 왔듯이, 마티카 원목에서는 본질과 근원만 남기고자 개별적 파편들을 도려냈다. (환기미술관, 2014) 판목을 갈고 깎는 지난한 과정은 본질 추출을 위한 추상 작업에 또 다른 번안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연과 회화의 본질에 이르기 위한 “지난한 과정” 속에서 석난희의 추상화는 자연과 인간이 본래 하나의 자연이었음을 받아들이는 비움과 생성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이루는 것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숙명’으로 생각한 작가 석난희. 이제 작가는 작품 앞에서 시적인 자연을 대면하게 된다. 석난희는 자신에게 자연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이었고 그것은 ‘화면으로 들어와 바다’를 만든다고 말한다. 그녀가 “자연의 숨결마저 동여매는 긴장감과 시공을 잇는 자유곡선의 유영(遊泳)”이 가득한 그 ‘바다’ 속에서 그녀는 ‘여행’자를 자처한다. (김윤섭, 2006) 매일 산책하는 주변의 자연도, 청색주조의 작품도 긴 화업이라는 여행의 동반자였다. 또 다른 동반자인 가족의 도움도 컸다. 자연 속에 넓은 화실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던 그녀에게 남편은 안성 작업실을 손수 지어줬다. 나무 서까래로 엮은 높고 넓은 그 작업실에서 그녀는 철저하게 “오직 자연과 자신과 그림”만을 마주할 수 있었고, 자연이라는 영원한 생성의 장에 자신을 투사하고 그만의 자연을 구현해 왔다. 판목화 위의 잉크가 자연의 추상을 도출해 내듯, 작가는 온전히 자연과 그림을 마주하며 86세를 바라보는 긴 여행을 성실히 이어왔다. 일관된 주제와 제목으로 전개된 석난희의 긴 화업은 형식주의적 태도보다는 오히려 ‘늘 그러한’ ‘자연’ 그 자체의 의미를 음미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사람과 사물의 본성’을 탐색하는 경험적 귀결의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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