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 사건수첩
- 청구기호609.2/세18ㅅ
- 저자명세기 신이치 지음 ; 황성욱 옮김
- 출판사파주:아트북스
- 원서명西洋美術事件簿
- 출판년도2005년
- ISBN8989800463
- 가격16500원
‘사건’, 그림의 실재(實在)적 증거
이 책은 그림을 이야기함에 있어 ‘무엇을’이라는 명제 대신,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려진 것인지를 묻는다. “반 고흐가 「까마귀 나는 보리밭」을 그리고 자살을 기도했다”고 말하는 대신, 사건 발생 전 고갱과 무슨 일이 있었고 당시 심리상태는 어땠으며 이는 그림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의 증언을 통해 나름의 인과관계를 성립케 하며, 그림과 화가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다. 뭉크의 「절규」 역시 얼마나 비통한 그림인지를 무조건 강조하기보다 화가가 앓고 있던 우울증은 어떻게 발전된 것이고, 그로 인해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들려주고 나아가 뭉크와 유사한 증세를 보였던 폰토르모나 푸젤리 등의 상황을 함께 살핌으로써 우울증이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을 광범위하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그림이 탄생하기 전후의 화가의 행적을 좇음으로써, 작품화면 안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 다양한 영상을 떠올리게 된다. 서서히, 그림과 말을 트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뤄지는 ‘사건’의 범주는 비단 화가의 사생활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비드와 고야의 경우를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는데, 여기서도 뭉크·폰토르모·푸젤리의 사례와 같이 비슷한 상황의 화가들을 한데 모아 설명하는 방식이 채택된다. 둘은 각각 프랑스와 스페인의 궁정화가로서 왕가의 의뢰로 그림을 그렸고, 국가와 직접적인 교류를 가졌던 만큼 그들의 작품에 미친 사회의 영향도 컸다. 따라서 지은이는 단순히 그들의 그림이 어느 왕가의 어떤 행사에서의 모습을 그렸느냐를 설명하는 대신, 그 의뢰가 화가에겐 어떤 의미를 가졌고 의뢰인은 그것을 어떤 정치적 혹은 개인적 수단으로 사용했는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려줌으로써 사회와 예술가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정치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풍자적 성격의 판화를 제작하다가 정치 비판이 금지되면서 일순간 서민적 서정주의자로 탈바꿈한 도미에나 세계대전 당시 나치 탄압으로 타국으로 피난해야 했던 유대인 예술가들, ‘퇴폐예술가’로 찍혀 작품을 소각당하는 수모를 당한 샤갈도 모두 비슷한 예다.
이 같은 예술가들의 구체적인 사례의 제시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정치·사회 등 보다 폭넓은 스펙트럼을 통해 그림과 화가를 바라보고 이해하게 한다. 더이상 그림과 화가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안에 존재하는 죽은 ‘유물’이 아닌, 한때 사람과 사회 안에서 숨쉬었던 ‘실재’가 되는 것이다.
화가의 실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화가들은 으레 고상하게 그려진다. ‘예술가’라는 이름을 둘러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견고한 아우라가 감상자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마치 성직자가 한평생을 신에게 바치듯, 화가는 오직 그림에만 심취해 속세와는 거리가 먼 청초한 삶을 살았을 것만 같다. 이것은 물론 지나친 억측이며, 사실의 정당한 기록과 공유 대신 객관적인 기준이 부재한 일부 미술사학자들의 취사선택이 선행된 결과일 뿐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미술사학자들의 무심한 ‘가위질’에 잘려나간 화가들의 인간다운 면면들을 복구한다. 고야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벌금을 물은 일, 루소가 은행사기에 연루돼 수감된 일, 뭉크가 폴란드 작가의 부인과 열애에 빠져 우울증세를 악화시킨 일 등 욕심과 질투를 알고, 천재성과 함께 심약함과 어리석음도 가졌던 화가들의 진정한 모습을 그린다.
살인·투기·표절시비 같은 화가와는 도저히 관계 지을 수 없을 것 같던 단어들도 속속 등장한다. 첼리니는 유명한 매너리즘 조각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대에는 술과 여자, 결투 같은 악덕을 거듭해 악명이 높았고 교황청의 보물을 훔쳐 투옥까지 당했으며, 상해·강도·동성애 등의 죄목으로 네 번 이상 법정에 선 기록도 있다. 극적인 리얼리즘 화법으로 빛과 형상에 대한 근본원칙을 확립했다고 일컬어지는 카라바조는 천성적인 격한 성격으로 친구를 살해하고 로마에서 추방당했으며 말타에 가서도 기사의 노여움을 사 지하 5m 감옥에 투옥됐다가 탈옥해 여생을 도망자 신세로 보냈다. 또 ‘빛의 화가’로 유명한 렘브란트는 ‘시민사회의 첨단을 달리는 화가’로 가장 호사스런 생활을 누렸지만 과도한 미술품 수집과 사치, 투자의 실패, 작품 알선 등으로 빚더미에 앉기도 했다. 화가들이 일으킨 이러한 크고 작은 사건들은 작품이 미술관에 옮겨지면서, 화가의 인생사가 미술사학자의 검열을 거치면서 탈색된 원이미지와 빛깔을 복원시키고 작품을 보는 보다 정확한 눈을 갖게 한다.
환상주의 거품 뺀, 명쾌한 리얼리티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지은이 특유의 ‘잔 멋’이 배제된 깔끔한 문체다. 다소 투박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그의 서술방식은 오직 확인된 사실만을 전달하고 추정이 가능할 뿐인 이야기는 약간의 단서만 제공함으로써 독자 스스로의 상상과 판단에 맡기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어쭙잖은 감정의 끼어듦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문체는 이야기의 객관성을 심화하고, 우리가 흔히 예술가들에게 갖게 마련인 그릇된 환상과 낭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보조한다.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로 미술계에 입문해 당시만 해도 미개척 분야였을 미술사회학에 정통한 지은이는 그림과 화가에 대한 독특한 접근방식으로 수많은 세미나에 초빙되고 글을 청탁받는 유명 미술인사이다. 특히 그는 피카소와 샤갈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과의 직·간접적인 교류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보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몇 년 전 한 장의 그림이 고흐의 「농부」로 판명돼 당초 견적의 6천배가 넘는 가격에 낙찰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문기자들이 하나같이 그를 찾았을 정도라고 한다. 기사를 인용하면, 그가 “그 분야에 있어 최고의 정보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 나오는 일화들은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대강 얽어놓은 것도, 부분적으로 지은이의 상상력이 첨가된 것도 아닌, 일체의 허구와 조작이 없는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책 뒤편에 붙은 부록 ‘사건연보’는 이러한 객관성을 극대화하고 독자들에게 미술사를 보는 좀더 체계적인 눈을 갖게 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책에 기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각 연도 아래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정리해 미술사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시각을 갖게끔 했다. 간혹 한 해에 두세 가지 사건이 겹치는 부분―프랑스혁명이 있었던 1789년에는 다비드가 역작 「브루투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옮기는 호위병들」을 그린 해이기도 하지만, 푸젤리가 유부녀와 프랑스로 떠날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다 남편에게 발각당한 때이기도 하다―이 있는데, 이는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사이트의 ‘이 시각 세계’ 코너를 연상케 해, 보는 재미를 더하는 동시에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고의 폭을 확장시켜준다. 화가의 일생, 그들이 남긴 작품을 우리의 삶과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에 바짝 밀착시켜주는 또다른 장치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 화가와 ‘나’를 잇는 다리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림의 의미나 화가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미술작품에 대한 일부 이론가들의 현학적인 태도를 비난했지만, 그들의 연구와 기록이 없었다면 애초 미술의 역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화가와 그림에 대한 우리의 기억 또한 자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과 화가의 삶을 둘러싼 ‘사건’들의 이해는 소위 ‘가공’된 역사를 습득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우리의 기억은 분명 이 가공의 역사에 근거하지만, 그것을 좀더 진실에 가깝게 하고 죽음의 시간을 생생한 삶의 시간으로 전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으려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져야 한다. 그러려면 화가와 ‘나’ 사이에 벌어진 엄청난 시공의 틈을 극복해야 하는데, 시간은 절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방법은 하나다. 그들의 시간과 무대를 간접 경험하는 일, 그들이 겪은 ‘사건’을 이해하는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