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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화가 조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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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구기호650.9911/이54ㅈ
  • 저자명이성혜 지음
  • 출판사파주:한길아트
  • 출판년도2005년
  • ISBN8991636055
  • 가격15000원

상세정보

이성혜(李聖惠) 교수는 조희룡 연구에서 눈부신 성취를 거둔 문학연구가이다. 석박사 논문 주제가 모두 조희룡인데 2002년에는 배전(裵 *文변+典) 연구를 출간하여 미술사의 폭을 넓히고 있음에 감탄했던 적이 있다. 나는 조희룡에 빠져 늘 헤매고 있었거니와 19세기 미술인들이 펼쳐낸 넓이와 깊이를 조희룡으로부터 헤아리면서 그 실상을 뚜렷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모두들 김정희란 큰 봉우리만 보고 나머지를 그야말로 아류 따위로 취급해 미술사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터에 당대 미술세계의 방대한 구성과 그 미학의 심오한 성취를 쪼그려뜨리는 데 빠지지 않도록 해 준 이가 바로 조희룡이었다는 뜻이다. 미루어 짐작하기에 이성혜 교수 또한 조희룡에 매료당해 있는 학자로 <<조선의 화가 조희룡>>에 그 감동이 깊게 스며있음을 헤아릴 수 있으니 나는 이 책을 구해 한 번은 단숨에 읽었고 또 한 번은 공부하듯 몇 날 몇 일을 읽었다. 그윽함과 뜨거움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나신지 140년인 올해, 19세기 묵장의 영수 조희룡을 누구라서 이처럼 살아 숨쉬게 새겨낼 수 있을까. 
중인 세상으로 전환해 갔던 19세기 전반기를 아름답게 수놓은 한 예술가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이처럼 열정적으로 되살려 낼 수 있음은 오랜 세월 쌓은 내공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일 게다. 문학, 회화, 미학 분야를 조리 있게 게다가 깊이 있게 서술해 나간 글 솜씨 또한 빼어나니 조희룡에 빠진 나로서야 행복한 독자라 하겠거니와 아름다움에 목마른 이들에겐 너무나도 큰 글읽기의 즐거움을 줄 것이다.
최열 | 미술평론가


벽오사를 만들어 시, 서, 화를 주고받다

조희룡은 조선 후기에 들어온 중국의 문인화를 이 땅에 착근시켜 조선문인화를 창안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9년에 태어난 그는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학문과 서화를 배우고 19세기 중엽 화단에서 중추적 구실을 했다. 조희룡은 평소 벽오당에 모여 시를 읊조리고 그림을 그리던 유최진, 전기, 이기복, 이팔원 등과 1847년에 벽오사(碧梧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거기에서 이론을 토론하고 작품활동을 전개해나갔다. 또 그는 고서화와 함께 골동품을 좋아했고 중국과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나라 화적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다.
이 책은 「조희룡 문학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경성대 이성혜 교수가 수년에 걸친 지속적인 연구 끝에 조희룡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한 평전이다. 책의 제1부에서는 조희룡 문학예술의 성과와 의미를 총제적으로 제시했다. 제2부에서는 조희룡의 문학론을, 제3부에서는 조희룡의 화론을, 제4부에서는 조희룡의 예술론을 다루었다.

조선문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조희룡 이전의 18세기 회화사는 사대부의 여기적(餘技的) 그림과 화원(畵員)의 직업적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19세기 추사 김정희에 이르러 이른바 완당바람으로 접합점을 갖는다.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으로 그림에 높은 정신세계를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추사의 논리는 당시 여항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추사의 문하에 출입하던 많은 여항의 화가들은 이전의 기예에 의한 기교의 그림에서 정신적 관념의 육화를 위한 문장의 기운을 연마하게 된다. 이는 마침 성장하던 여항인들의 경제적 지위, 교육적 열의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익어갔다.
조희룡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대부적 여기로 존재하던 문인화를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예술세계로 독립시켰다. 그는 추사가 주장했던 남종 문인화의 사의(寫意)를 적극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사의에 형사(形似)를 보태고 기예와 재예에 학문의 기운을 더해서 새로운 세계로 존재하는 예술의 독립과 자율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처럼 조희룡의 문학과 예술은 18세기 학문의 축적과 경험적 토대, 그리고 선배 문인들의 실험적 성과를 모두 안고 새로운 글쓰기와 그리기를 시도한 19세기 문학예술의 결정판이다.
20세기가 되면서 문인화가 퇴조하고, 문인화에서 제화(題畵)가 약화되며 장승업같이 독서적 문기(文氣)가 없는 전문화가가 등장한다. 그러므로 조희룡의 문학예술은 19세기 여항문화의 대미이자 동시에 20세기 새로운 문화예술의 시작점이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의 분수령, 그 정점에 자리한다.

매화를 사랑하여 백발이 되었네

조희룡은 산수와 함께 사군자를 잘 그렸다. 그 가운데서도 매화를 즐겨 그렸다.
그가 열네 살 되던 해 어떤 집안과 혼담이 있었으나 너무 허약해 보인다며 퇴짜를 맞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조희룡에게 퇴짜를 놓고 다른 사람과 혼인했던 여인은 얼마 안 되어 과부가 되었으나 그는 칠십이 넘도록 살았다. 조희룡은 이런 글을 썼다.
“장수할 상이 아닌데 늙은 나이 되었고, 매화를 사랑하여 백발이 되었네.” 
그는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다(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라고 하였다. 그만큼 그는 매화에 경도되어 있었다. 매화에 골몰하는 만큼 조희룡은 매화를 가장 잘 그렸는데, 특히 홍매에 뛰어났다.

유배지에서 완숙한 기량을 닦다

조희룡은 1851년 조정의 예송논쟁에 개입하였다가 예순세 살 때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에 유배 조치된다. 그는 유배지 오두막집에 ‘만구음관’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그 속에서 칩거하면서 집필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만구관음이라는 이름은 ‘만 마리 갈매기가 우짖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처음 유배를 간 조희룡은 자신이 왜 유배를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분노에 차 있었다. 그리고 낯선 외딴 섬에서의 생활이 두려움과 공포의 연속이었음을 그의 문집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안정을 찾고 나중에는 오히려 유배생활을 통해 이론을 정립하고 완숙한 화가로서 절정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당호가 있는 그의 그림 19점 가운데 8점이 이때 나올 정도로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였고, 묵죽법과 괴석도 그림에 일가를 이루었다.
조희룡은 1853년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서울에 돌아와 후배를 지도하고 작품활동을 하다가 1866년 7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표적인 저서와 그림

그의 저술 대부분은 유배지 임자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표적인 책으로 자서전적인 회고록 『석우망년록』과, 당시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 문장, 서화, 의술, 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호산외기』가 있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김홍도, 최북, 임회지 등 일곱 명의 화가에 대한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 교우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밖에도 임자도에서 벗들과 주고받은 편지인 『수경재해외적독』, 화론 『화구암난묵』, 시집 『우해악암고』, 화제(畵題)에 대한 산문인 『한와헌제화잡존』 등이 있다.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매화서옥도」「홍매대련」「홍매도」「묵매도」「묵란도」「괴석도」「군접도」「국화도」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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