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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 청구기호838/서14ㄷ
  • 저자명서경식 지음;김혜신 옮김
  • 출판사파주:돌베개
  • 출판년도2006년
  • ISBN897199231X
  • 가격12000원

상세정보

디아스포라란 무엇인가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원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대문자로 쓰면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 민족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들, 노예해방 이후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등장한 중국인 노동자들(쿨리),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이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 등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와 땅을 떠나도록 강요당한 사람들은 모두 디아스포라인 것이다. 
이들 디아스포라 탄생의 배경에는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분쟁 및 세계대전, 자본주의의 전지구화 등의 근대 역사가 놓여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국민국가라는 견고한 틀 안에 갇혀 이러한 역사의 총체를 사유하지 못하고 현상의 단편만을 본다면 근대의 억압적 정치체제를 강화해 계속해서 뿌리 없는 인간들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근대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내던져진 디아스포라야말로 ‘근대 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어떤 종류의 지배와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소수자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 진정한 모습을 보기 위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가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바라본 예술·인간·시대
서경식은 일제시대 철도건설 노동자로 일본에 건너간 할아버지 대부터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이다. 본명을 사용하며 교토의 조선인 밀집지역에서 자라난 그는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차별과 억압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살아왔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저항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레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억압과 폭력에 눈을 떴고, 저항적 민족의식을 키웠다. 하지만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에 참여하고자 염원하며 한국으로 유학을 온 그의 두 형, 서승과 서준식은 ‘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19년, 17년의 옥고를 치렀다. 서경식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던 꿈이 좌절된 그 순간부터 형들의 옥바라지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오랜 세월을 방황하며 흘려보내야 했다. 
그의 글이 소수자만이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진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험들 때문이다. 한 사회에서 소수자로 산다는 것, 과거에 자기 민족을 지배한 자의 언어를 모어로 삼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은 왜 남들과 다른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런 불안하고 예민한 정체성을 그는 ‘디아스포라’적이라고 부른다. 그가 여행길에서 만난 다양한 예술작품들, 사람들, 장소들은 이렇듯 불안하지만 예리한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들인 윤이상,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 슈테판 츠바이크뿐 아니라 조양규, 니키 리, 데이비드 강, 시린 네샤트, 자리나 빔지 등 낯선 디아스포라들의 일화는 예술과 인간과 시대에 대한 가려진 진실들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후반 미국 아카데미에서 ‘포스트 식민주의’ 이론이 수입되면서부터다. 그 사이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등 다양한 제3세계 지식인들의 논의가 소개되기는 했지만,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흡수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그렇게 수입된 언어들은 우리의 경험을 담아내고 성찰하기에는 너무 아카데믹했다. 
하지만 서경식의 글은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시작해 결코 난해하거나 현란하지 않은 언어로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의의를 근대의 정치체제와 연관해 해명한다. 이는 민족분단으로 인한 이산이나 해외입양의 문제를 근대의 억압적 정치체제와 연관해 진지하게 사유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우리 사회에서 시사점이 크다. 
재일조선인, 중국의 조선족, 스탈린 시대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구소련의 고려인(카레이스키), 오늘날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코리언 아메리칸, 1960년대 당시의 서독 정부가 받아들인 이주노동자의 자손으로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수만 명의 코리언, 그리고 한국이 국가적으로 추진해온 국제 입양의 결과 현재 20만 명이 넘는 코리언 입양자들. 이 전부를 합한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수는 대략 6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코리언 디아스포라들을 ‘우리’라는 틀 바깥으로 밀어내며 이루어지는 민족의 역사는 그것이 아무 저항적인 것이라 해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를 사유한다는 것은 근대가 낳은 전 세계 디아스포라들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며, 그러한 이해를 전제로 민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편적 해방을 향한 열망으로 계승하면서, 민족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방향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의 공허한 상호 비판을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계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힌 대로 이 글은 정치·사회·사상·문학·예술 등 종래의 장르 구분을 넘어선다. ‘디아스포라’라는 주제 자체가 종래의 사고나 담론의 틀에 고분고분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소수자의 경험과 보편적 언어 사이, 또 다양한 장르들 사이, 또 암울한 현실인식과 강렬한 희망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욕망에 기대 보편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디아스포라들

코리안 디아스포라
윤이상, 다카야마 노보루, 조양규, 문승근, 니키 리, 미희-나탈리 르무안느, 민영순, 데이비드 강, 김하일…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한국에 끌려와 한때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당시 국제 여론의 항의를 이기지 못해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왕성하게 작곡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해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역할을 하며 진정한 민주화가 성취될 때까지 조국의 흙을 밟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마침내 ‘문민정부’의 깃발을 내건 김영삼 정부가 등장한 1994년, 윤이상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의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를린을 떠나기 하루 전 한국정부가 윤이상에게 ‘과거의 행동을 반성한다’ ‘앞으로 북한과 절연한다’는 입장을 표명해달라고 요구했고, 윤이상은 귀국을 취소했다. 노음악가의 망향의 정마저 협상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권력의 비열함과 잔혹함은 군사정권이 물러간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1990년 형의 출옥을 준비하기 위해 고국을 오가던 서경식은 초조감이 상당한 수위에 달했다고 느낀 어느 날 광주를 찾았다. 정적에 잠긴 채 풀로 뒤덮인 쓸쓸한 무덤들 앞에서 형들이 살아서 감옥을 나오리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고, 그러한 절망의 와중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했다. 10년이 지난 2000년 5월 다시 방문한 광주에는 망월동 가까이 국립5·18묘역이 정갈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오랜 세월 금지곡이었던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광경을 보며 단순한 감회를 넘어, 어떤 위화감과 아쉬움의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맛보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디아스포라임을 한층 절감한다.
조양규는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북한으로 귀화한 화가다. <맨홀B>, <밀폐된 창고>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는 1926년 경남에서 태어나 해방직후 좌익운동, 통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는 일본 미술계에서도 곧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1959년부터 ‘북조선귀국운동’(북송사업)이 시작되자 북조선으로 건너갔다. 그곳이 “도구도 표현도 일본보다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공중에 매달린 듯 어중간한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조국의 현실 속에서 싸우고 싶다”는 것이 귀환의 이유였다. 
데이비드 강은 어려서 캐나라도 이민한 코리언 디아스포라다. 오랫동안 예술(문화)와 정치, 역사의 관계에 천착하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소의 혀를 입에 물고 먹, 오일, 케첩 등을 물감 삼아 긴 거리를 고행하듯 기어가는 퍼포먼스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서경식은 그의 작품을 보고 재일조선인 1세 시인인 김하일을 떠올렸다. 김하일은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야학에서 공부했지만 한센병이 발병해 요양원에 격리된 채 고독한 삶을 살았다. 1947년 외국인등록증이 발급되어 지문날인의 의무가 부과되었으나 손가락이 없어 지문을 찍을 수가 없었다. 병으로 손가락의 감각을 잃고 또 그 손가락을 잃고 눈까지 먼 김하일은 혀로 일본어와 조선어 점자를 익히고, 또 그렇게 배운 점자로 조선의 역사를 읽었다. 그의 작품은 2004년 일본 도쿄케이자이 대학에서 열린 ‘디아스포라 아트의 현재’에서 공연되었으며, 이 심포지엄에는 데이비드 강 외에도 벨기에에 입양되었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미희-나탈리 르무안느, 2002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코리언 디아스포라전의 큐레이터를 맡았던 민영순 등 다수의 코리언 디아스포라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유대계 디아스포라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파울 첼란, 펠릭스 누스바움, 슈테판 츠바이크,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생존 작가로 나치의 극악한 폭력을 고발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의 정체성을 다중심적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바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불길하게 예감했던 그는 1987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자폭공격이 한창이던 당시 런던을 방문한 서경식은 자주 자폭공격의 표적이 되던 미국 대사관 근처 호텔에 머물며, 창으로 몸을 던진 프리모 레비를 생각한다. 
펠릭스 누스바움은 오스나브뤼크에서 전형적인 동화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확고한 전통을 가진 유대교도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다수자에 완전히 동화된 것도 아닌 양가적인 정체성은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 유학하던 그는 나치의 손길을 피해 벨기에로 돌아왔으나 독일군이 침공하자 벨기에 당국에 의해 독일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인질’로 구속되었다. 수용소를 탈출해 브뤼셀로 돌아간 그는 연인과 함께 은신처에서 몸을 숨긴 채 창작에 몰두했다. 그 시절에 탄생한 작품이 바로 <유대인등록증을 들고 있는 자화상>이다. 2002년 누스바움에 관한 TV 프로그램 촬영차 브뤼셀과 오스나브뤼크를 방문했던 서경식은, 그림 앞에서 자신을 찍고 있는 일본의 한 방송사 카메라를 향해 그림 속의 남자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외국인등록증을 꺼내 들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사가로 유명한 유대계 작가다. 전형적인 동화 유대인으로 휴머니즘, 자유주의, 개인주의라는 근대의 보편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바란 코스모폴리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치의 침략으로 그러한 이상은 하루아침에 공허한 미망이 되어버렸다. 그의 책은 불태워지고, 그는 쫓기듯 고향을 빠져나와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제서야 츠바이크는 근대가 그가 믿었던 이상이 실현되어가는 장이 아닌 침략과 지배의 야욕이 확산되고 있던 시기임을 깨닫는다. 1942년 리우카니발이 한창이던 망명지에서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장 아메리는 독일어를 모어로 배우며 자라고, 독일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했다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 이후에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서경식은 브뤼셀을 방문하던 때 나치 점령하 벨기에에서 공포의 상징으로 통했던 브렌동크 요새를 찾았다. 그곳은 아메리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파울 첼란 역시 아메리와 마찬가지로 독일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한 유대계 시인이다. 불어, 러시아어, 이디시어 등 수많은 언어에 능통했지만 평생 자신의 모어인 독어 이외의 언어로는 시를 쓰지 않았다. 1998년 여름, 서경식은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 파리를 돌고, 마지막으로 그의 무덤이 있는 티에의 묘지를 찾았다. 그의 무덤에는 유대식 성인 안첼의 철자를 바꿔 자신이 직접 만든 성인 첼란이 새겨져 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디아스포라
시린 네샤트, 오퀴 엔베조, 자리나 빔지, 잉카 쇼니바레, 아이작 줄리언, 트린 민하, 피오나 탄, 모나 하툼…

시린 네샤트는 2000년 제3회 광주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 이란계 여성 아티스트다. 이란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시린 네샤트는 조국(이란)과 모국(미국)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문화 속에서 자기 분열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디아스포라로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이란 여성의 이미지는 서구중심적 입장에서 이슬람 문화의 여성 억압을 비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비판의 위험까지 경고한다. 
자리나 빔지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인도계 우간다 출신 아티스트다. 인도계인 자리나 빔지의 가족이 우간다로 건너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망명한 데는 역시 식민주의 역사의 상처가 가로새겨져 있다. 인도를 식민지배했던 영국이, 동아프리카까지도 장악하게 되자 아프리카 오지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인도계 상인들, 노동자들, 하급관료들을 대량으로 이주시켰던 것이다. 우간다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이란에서는 정치적 불안을 거쳐 외국계 시민들을 추방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2002년 독일 카셀에서 열린 ‘도쿠멘타 11’에서 외국인 배척과 내전의 공포라는 경험을 형상화한 자리나 빔지의 작품을 본 서경식은 형을 면회하기 위해 방문했던 대전교도소의 기억을 떠올린다. 작가의 사연과 내력을 알기 전부터 몸에 새겨진 폭력의 기억이 자연스레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 책을 지은 서경식은 
1951년 일본 쿄토에서 태어나 1974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다.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프리모 레비로의 여행>으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으며, 2004년 현재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있다. 그 외에 지은 책으로 <분단을 살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의 사신> 등이 있다. 
자신의 삶이 조국의 어두운 정치현실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고, 조국의 민주화와 경제적 자립을 한국 땅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갈망했던 그였지만 항상 자신이 그러한 역사와 현실의 바깥에 있다고 느껴왔다. 그 동안 짧은 여행 등으로만 한국을 찾았던 그는 2006년 3월부터 성공회대학의 연구교수로 꽤 오랜 기간 한국에 머물게 된다. 처음으로 조국 땅에서 생활하며 내부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조국에서의 삶이 편안하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외부와 내부의 대화가 새로운 ‘우리’를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대화의 일환으로 국민국가와 근대 정치체제, 재일조선인 문제 등을 분석적이고 집약적으로 정리한 글을 모아 돌베개에서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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