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검열의 압박에도 수백 종의 시사풍자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 책은 그 중 대표적인 풍자화가 5인의 풍자화를 모아 소개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자유롭고 날카로운 통찰과 해학의 미를 느낄 수 있다.
책소개
나는 고발한다, 권력자들을 - 류재화
왕 혹은 권력자는 늘 풍자 대상이다. 권력자는 1인의 몫에 과하는 특권과 명예를 얻은 대신 언제든 그것을 잃는 순간을 맞이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신기하게도 왕관의 모양이 우유 방울이 터질 때의 모양, 혹은 원자가 폭발할 때의 모양과 닮았다고 말한다. 우주만물의, 인간만사의 모든 ‘터짐'은 그 기하학적 모양새가 비유적으로 닮아 있다. 들쭉날쭉 뾰족한 왕관의 모양은 지상 최고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절정에 이른 것은 언제든 폭발하게 마련이라는 자연의 보편적, 물리적 속성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권력은 끌어내려지든 스스로 내려오든 반드시 낙하운동을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 앞에서, 혹은 뒤에서 비속어의 향연을 벌인다. 지배자의 폭력적 ‘행'(行)을 향해, 무력한 혹은 강력한 잡스러운 ‘언'(言)의 무기.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는 네로에게 복수할 일념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사티리콘』(Satyricon)을 썼다. ‘사티리콘'은 에로틱하고도 외설적인 시 ‘사투라'(satura), 그러니까 비속시이다. 페트로니우스는 황제와 그 측근들의 방탕한 ‘행위'를 역시나 방탕한 ‘언어'로 이야기했다. 페트로니우스는 그 풍자를 넣은 봉투를 봉인해 황제에게 보낸 후, 자신의 반지를 깨뜨려 자결했다.
프랑스어 ‘사르카즘'(Sarcasme, 풍자)은 그리스어 ‘sarx'에서 유래한 말로, 인간의 행복이 거하는 육체를 뜻한다. ‘사르카즘'이란 적의 살가죽을 벗겨내는 일이다. 한자어 ‘풍자'(諷刺) 역시나 바람 같은 언어이나 칼의 자상이 역력하다. 풍자란 가면을 벗기는 것을 넘어 그 살가죽 이면의 속성까지 다 드러내보이는 일이다.
고대 로마에서 숭배행렬의 맨 앞에 세워진 것은 남근이었다. 남근은 권력의 표상이자 인간 그 누구에게나 동물적 감각을, 성적 흥분을 일깨우는 표상이었다. 그것은 쾌락의 대상이자 금기의 대상, 이율배반이자 동의어 반복이다. 권력자 공격은 곧 남근 공격, 남근은 공격 대상이자, 공격 수단이 된다. 풍자에 수반되는 음란함은 그것이 가장 원초적이고 효과적인 공격법이기 때문이다. 풍자적 의례에 소용되는 비속함, 그것은 처절하고 철저한 궁극성이다.
역사적으로 풍자가 기승하는 시대는 탄원도, 읍소도 무력한 소통 불가능의 역행적이고 퇴행적인 시대와 겹친다. 풍자는 가벼운 바람처럼 경박하고, ‘잡스럽기' 이를 데 없는 형식을 취하나 풍자 대상과 풍자의 주체는 사실상 치열하게 죽음을 건 이중결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풍자를 하는 이는 반어와 독설의 비속어로 비루한 공격을 가하며, 풍자 대상이 된 이는 역시나 비루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그들을 탄압한다. 상식과 법도가 통하지 않는 시대, 반이성이 폭주하는 시대, 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 목소리를 낼 힘을 잃고 절망하거나 냉소적으로 자조한다. 몸이 아픈 것이 몸의 이상 현상을 알리는 신호이듯, 풍자는 사회의 이상 현상을 알리는 경계 신호이다. 음란하고 음험한 비속어와 풍자가 팽배한 시대는 그만큼 많이 ‘아픈' 시대이다.
촌철살인 언어의 칼이 적을 칠 수 있는 무기라면, 웃음은 적을 무장해제 시키는 또 하나의 기묘한 무기이다. 이성은 벌하나 웃음은 용서한다. 천둥 비가 온 뒤 하늘은 말갛게 갠다. 다시 해가 뜬다. 훨씬 더 슬픈 것을 말하기 위해 훨씬 더 ‘웃기게' 그리는 풍자화의 뒤틀린 선들. 풍자화의 가벼움은 사물 속에 내재된 본성을 깊이 연구한 후 그것을 가볍게 ‘터치'하는 기술적 태도의 가벼움이지, 하위 예술로 치부될 근거를 제공하는 질적 가벼움은 아니다.
에르네스트 라비스(Ernest Lavisse)는 프랑스의 국민 역사책이나 다름없는 『프랑스 역사』(Histoire de France, 1925)에서 프랑스의 카리카튀르(caricature, 풍자화)가 역사상 가장 영화를 누린 시기는 1880~1900년이라고 적고 있다.
왜 하필 1880년일까? 여기서 소개하는 풍자화가 5인이 열정적으로 수백 점의 데생을 그려댔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다. 1881년 7월 29일 프랑스에서는 마침내 표현의 자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다. 이 법률은 오늘날 전 세계 언론자유법의 기초가 되었고, 검열을 종식시키려는 의지를 만방에 알림으로써 세계 민주주의의 모델이 되었다. 역사의 좌표에 이 점을 찍기까지, 19세기 프랑스의 백 년은 한마디로 프랑스 혁명(1789) 정신의 유산을 놓고 온갖 갈등과 격론이 끊이지 않은 열병의 시대였다. 전변(轉變)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신념이, 의지가 상충하고 상생하는 거대한 도가니였다. 두 진영의 투사들은 추구하는 가치의 깃발을 먼저 꽂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승자는 왕당파도 공화파도 아닌, 우파도 좌파도 아닌 여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바로 그것이었다. 프랑스어에서 ‘논쟁/논박'(argument)이라는 단어는 ‘여명'(aube), ‘모서리'(angle)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서로 각을 잡으나, 그 각과 그 모서리는 서로 이어진다. 여명은 어둠과 빛이 갈라지는 지점이자 이어지는 지점이다.
『프랑스 역사』, 제3공화국(1870~1940) 초기 편을 집필한 샤를 세노보스는 19세기 말 프랑스 풍자화에 대해 이렇게 요약한다. “삽화 정기간행물의 연이은 성공을 통해 1870년 이후 풍자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데는 영국 코믹 판타지의 영향 아래 정치 풍자화를 더욱 시적으로 변모시킨 도미에의 공이 크다. 프랑스에서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코믹한 재능들이 그야말로 만개하였다.”
앙드레 질은 반(反)나폴레옹 3세를 공개적으로 표방한 『달』(La Lune, 1866)에 수위 높은 풍자초상화를 그리며 이름을 날렸다. ‘달'은 스스로를 태양이라 우기는 권력자를 비웃는 상징이었다. 나폴레옹 3세의 캐리커처가 나간 후인 1867년 12월 『달』은 검열에 시달리다 폐간된다. 그러나 달은 반드시 이지러지는 법이라며, 이어 『몰락』(L'eclipse, 1876)을 다시 만든다. 이것도 채 1년이 못 가 사라지며, 완전 기울어 피멍으로 죽어가게 생긴 달을 비유하듯 『적갈색 달』(La lune rousse)을 다시 낸다. 앙드레 질의 풍자화는 숱한 검열 대상이었고, 이를 괘념치 않는다는 듯 질은 커다란 가위를 든 못 생긴, 성질 까다롭게 생긴 ‘마담 아나스타샤'라는 인물을 창조해낸다. 질의 열혈 팬들은 킥킥거리며 환호한다.
도미에는 1879년 2월 11일 사망하는데, 그의 부음 기사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세대는 도미에를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아는 도미에의 명성은 그가 사후에 얻은 것이다. 그 시기는 장 루이 포랭(Jean-Louis Forain)과 카랑 다슈(Caran D'ache), 폴 가바르니(Paul Gavarni) 등 많은 풍자화가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시기이다. 세노보스는 도미에가 만들어낸 이런 풍자 전통은 제3공화국이 이뤄낸 ‘작품'이었다고 말한다. 가바르니의 열렬한 찬미자였던 에드몽 공쿠르(Edmond Goncourt)는 “도미에를 만든 것은 바로 공화주의자들”이라고 말했다.
공화주의자들의 전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였다. 그것은 시민주권,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다. 『카리카튀르』(Caricature)에 그림을 그리던 도미에의 초기 시절은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던 시기이다. 1873년 제3공화국 수립도 언론 자유에 한몫했다. 보불전쟁(1870~71) 패전 장군 출신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Patrice de MacMahon)은 제3공화국 초기 7년간 대통령을 지내면서 반공화주의를 책동한 인물로, 새로운 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저어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당시 가판대에서 가장 잘 나가던 앙드레 질의 그림은 경찰에 의해 무려 72회나 가판대에서 끌어내려졌다. 1879년 1월 5일 의회 선거는 보수파의 견고하기 짝이 없는 보루에도 공화파의 승리가 예견되었다. 마크마옹은 같은 달 1월 30일 사임했고, 도미에는 2월 11일 사망했다. 공화국의 새 대통령이 된 쥘 그레비(Jules Grevy) 역시 신문 감시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전 대통령과의 차이라면, 양 극단의 신문을 하나씩 ‘침'으로써 언론 탄압에서 어떤 균형을 보였다는 점이다. 가령, 반교권주의 신문인 『적갈색 달』을 한 번 치고, 이어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의 풍자지인 『젊은 감시원』(La Jeune Garde)을 한 번 쳤다. 그리고 마침내 1881년 7월 29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백여 개의 풍자지가 자유로운 톤을 구가하며 세기말까지 계속해서 쏟아져나왔다. 풍자 수위가 지나치게 높아 정신건강에 좋지 않거나, 너무 유치하게 가벼운 잡지들, 혹은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 『펠리시앵 롭스』(Felicien Rops)같이 유황냄새 자욱한 사탄 같은 신문들은 자연스레 도태되었다. 도미에 이후 작가들은 도미에와 당대의 작가들에게 분명히 빚진 것이 있다. 공화파들이 싸워 얻어낸 표현의 자유다. 도미에가 사망한 해는 표현의 자유가 결정적으로 승리한 해였다. 역경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여기 소개하는 5인의 풍자화가 앙드레 질, 장 루이 포랭, 카랑 다슈, 아돌프 윌레트(Adolphe Willette), 테오필 스타인렌(Theophile Steinlen)은 모두 도미에의 후배들로, 시대적 정황 차이도 있지만 정치 성향이 다 같지는 않았다. 앙드레 질이 활동하던 시기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스스로를 나폴레옹 3세라 칭한고 제2제정(1852~70) 시기다. 앙드레 질은 반제정운동의 선두에 섰다. 포랭과 카랑 다슈, 윌레트 등이 활동하던 시기는 제3공화국(1870~1940)이 막 들어서고, 드레퓌스 사건(1894)과 그 재심(1899)을 계기로 프랑스 전 사회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격론을 벌일 때다. 포랭과 카랑다슈는 21세기의 시각으로 보면 확실히 보수적인 성향을 띤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PSST…!』(1899)를 창간한 것에서 보듯, 두 사람은 반유대주의자, 반드레퓌스주의자였고, 윌레트는 반유대파 후보로 지역의회 선거에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복잡한 사회적, 심성적 지형 속에 이들을 놓고 보면, 이들의 우국충정이 어떤 점을 간과하는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된다. 스타인렌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반자본주의자였지만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포랭과 카랑 다슈를 보수주의의 틀 안에 가둘 수만은 없는 것이 그들은 누구보다 속물을 비판했으며 권력과 자본에 지극히 냉소적이었다. 프랑스 국민 전체를 양분시켰다 할 정도로 첨예한 갈등에서 이들은 분명 반유대주의, 반재심파 진영에 있었다. 그 배경에는 우선 이들의 애국주의가 있었고, 그 애국주의는 19세기 말 태동한 국가주의(내셔널리즘)와 결합되기 쉬운 것이었다. 그 근원과 배경은 프랑스 혁명의 전개과정을 면밀히 들여다볼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풍자화가 사회 모순과 인간 부조리의 단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공감할 수도 있는 부분이 많으나,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소 난해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주로 활동한 제3공화국 초기 시대, 제3공화국의 성립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3공화국은 프랑스 혁명으로 군주제를 몰락시키고, 그 후 80여 년에 걸쳐 일곱 차례의 정치 체제(입헌군주제 3차례, 공화정 2차례, 제정 2차례)를 실험한 후 이뤄낸 성과물이라 할 것이다. 1894년에 터진 드레퓌스 사건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이 일종의 임계점 역할을 함으로써 100여 년간 프랑스 사회에 누적되어 왔던 갈등들이 폭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사건을 치르면서 프랑스는 인간의 편견과 망상이 얼마나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보았고, 파시즘의 추악한 모습을 미리 봄으로써 20세기에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파시즘 정권을 결코 허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시련을 먼저 겪은 자가 누리는 긍지였다. 한 차원 높은 정치, 사회, 문화적 지형을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진통, 통과수행. 애국이, 민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주권이, 인권이, 자유와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천적 신념으로 각인하게 만들어준 그야말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들의 시대를, 이들의 풍자화를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큰 맥락만이라도 짚어야 할 것이다.
19세기 프랑스 역사는 18세기 말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한 계층간의 다툼으로 점철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179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한 3인 집정부는 공화정 성향을 가진 자산가층과 혁명 덕에 소토지를 얻은 농민의 지지를 받아 서서히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다. 나폴레옹은 정권을 장악한 후 다시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는 한편,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 라인 강 좌안 방면을 종속시킨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발생한 이웃 주변 봉건국가들의 간섭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나폴레옹은 대외적 안정과 더불어 국내 상공업을 진흥하고 교육을 장려하는 한편, 민법 제정 등 대혁명의 유산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나폴레옹 정권은 더욱 안정기를 맞는다. 이에 나폴레옹의 야망은 더욱 커져, 1802년에는 종신통령에, 1804년에는 세습 황제인 나폴레옹 1세에 오름으로써 프랑스 제1공화국(1792~1804)은 12년 만에 붕괴된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비롯해,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을 실시하며 영국보다 좀 뒤처진 감이 있던 자본주의의 기초를 마련한다. 대혁명 기간 동안 토지를 획득한 농민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자 점차 보수화된다. 앙시앵레짐의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어 부유해진 시민계급과 토지 소유농이 나폴레옹 통치의 지지기반이 된 것이다. 나폴레옹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은 이렇게 보수화된 대중들의 지지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혁명 이후 파생한 내셔널리즘 형성도 한몫했다. 프랑스 혁명을 지켜본 이웃 왕조 국가들은 일종의 혁명간섭군을 조직, 끊임없이 프랑스를 위협하였고, 이런 조국의 위기는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국가주의적 감정을 고취시켰다. 나폴레옹은 전승의 영광을 말할 때마다 이 국민주의에 호소했다. 그리고 조국을 방위하기 위해 징집된 혁명군을 기반으로 근대적 전술로 무장한 국민군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대항하여 스페인 민중들이 일어났고, 프러시아, 러시아 등 외국 봉건국가들의 용병도 근대화했다. 프랑스 혁명군이 전파한 국민주의가 전 유럽에 침투하면서 초래된 일종의 부메랑 현상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루이 18세는 혁명 원리와 절대왕권을 혼합한 입헌군주적 헌장을 공포한다. 앙시앵레짐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왕조는 1827년부터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토지귀족의 지지도 시민계급의 지지도 얻지 못한다. 1828년 시민계급을 완전히 무시한 선거법이 개정되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이 총궐기, 부르봉 왕조의 후손이면서도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를 왕위에 앉힌다. 이 왕정복고 기간 동안 은행가, 상인, 산업가 들은 루이 18세의 헌장 덕에 기득권이 보호되는 데 만족하였고, 프랑스 혁명 세력의 주축이었던 자코뱅주의자들이 다시 대두할까 두려워 입헌군주제를 옹호하였다.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조(1830~48)는 루이 18세의 헌장을 그대로 시행하는 한계를 보였고, 입헌정체가 다소 완화되긴 했으나 국민은 여전히 투표권을 갖지 못했다. 선거법 개정을 위해 시민과 노동자층이 합세하여 궐기함으로써 1848년 2월, 7월 왕조는 무너지고 소시민적 사회주의자였던 루이 블랑이 주축이 된 임시공화정이 수립되는데, 이것이 제2공화국이다. 이 임시공화정부는 국립작업장을 설치하여 10만 명 이상의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한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및 보통선거제 등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 실시한 총선에서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했던 소토지 소유 농민들은 도시노동자들의 과격한 요구가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결국 총선에서 급진 세력이 패배하고 온건파가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급진파 시민들과 파리 노동자들이 다시 6월 봉기를 일으키고, 루이-외젠 카베냐크(Louis-Eugene Cavaignac)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이들을 진압, 1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카베냐크 장군은 파리에 계엄령을 실시하지만 사태는 수습되지 않는다. 이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전면에 부각된다. 도시노동자 및 시민 세력에 늘 위협을 느끼고 노동과 자본의 대립에 불안을 느끼던 소농민층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와 추모를 이용하여, 그 조카가 다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루이 나폴레옹은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카베냐크를 물리치고 당선된다. 그리고 숙부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새 헌법을 제정, 자신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확대한다. 그리고 1852년 12월 마침내 제정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나폴레옹 3세라 칭하며 제위에 오른다. 이로써 의회의 독립성은 상실되고, 대규모 관료조직에 의한 통제가 강화되는 한편 노동자의 결사 및 단결의 자유가 금지되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억압된다.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적 반대세력의 대두를 막기 위해 상공업 및 금융업에 대한 보호 정책을 앞세우며 프랑스 자본주의를 정착시키고, 제정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전 세계적 규모로 식민지 획득 전쟁을 벌이다 마침내 신흥 프러시아에 대항하는 보불전쟁(1870~71)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민중의 생활고는 나아지지 않고, 제정의 억압정책에 불만을 느낀 세력은 쌓일 대로 쌓이게 된다. 결국 보불전쟁에서도 패해 1870년 9월 세당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프러시아의 포로가 된다. 파리 시민은 즉각 공화제를 선포하고 국민군을 결성, 파리 방위를 결의하나, 부르주아가 다수를 차지하는 의회를 중심으로 티에르(Louis Adolphe Thiers)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프러시아군과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수도를 베르사유로 옮기며 파리를 무장 해제시키려 한다. 파리 시민과 국민군은 외국 침략군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1871년 3월 18일 정부군의 공격에 앞서 봉기함으로써 파리 코뮌이 성립된다.
파리 코뮌은 보통선거로 시의회 의원을 선출하는데, 그 대다수는 근로자였다. 파리 코뮌은 중앙정부를 폐지하고 자치도시를 수립하며 자본의 유상몰수, 최저임금 보장, 정교 분리 등 상당히 구체적인 안을 낸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40일 만에 티에르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코뮌 지지자 수만 명은 유형을 떠나거나 처형되었다.
파리 코뮌 지지자들을 철저히 탄압하며 출범한 제3공화국은 왕당파 세력을 안고 가는 불완전한 공화국으로, 1875년 의회에서 353대 352라는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공화제를 명문화한 법률을 가까스로 성립시켰다. 알제리 주둔군 사령관을 지낸 왕당파 마크마옹 장군이 제3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 동안 두 갈래로 나뉘어 있던 전통 왕당파와 오를레앙파는 합심하여 군주제의 부활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1877년 의회 선거에서 국민들은 극우파를 물리치고 공화파를 대거 선출함으로써 왕당파와 결탁하였던 상층 부르주아 정치 세력은 크게 약화한다. 제3공화국 수립 후 프랑스는 보불전쟁의 패배를 만회하려는, 이른바 독일에 대한 ‘복수전'(Revanche)을 펼친다. 보불전쟁에서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러시아에 빼앗긴 프랑스는 영토를 되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고, 이 같은 분위기를 틈타 조르주 불랑제(Georges Boulanger)라는 전쟁 영웅이 떠오른다. 그는 육군장관에 취임한 후 왕족 출신을 군에서 추방하는 결단력을 보임으로써 농민과 도시 소시민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그는 군 내부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독일에 대한 강경 자세로 이른바 애국주의를 고취하며 여러 계층을 어느 정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가 위기 때마다 다시 나오는 애국주의, 국수주의는 반의회주의로 변질되기 십상이었다. 불랑제는 퇴역한 후 정계에 투신하며 현역 군인 시절의 평등주의적 색깔을 잃어버리고 공공연히 왕당파들과 결탁, 반공화주의를 표방한다. 알자스-로렌 영토 회복이 쉽지 않자 쥘 페리(Jules Ferry) 내각이 들어서면서부터 국민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한 식민지 사업이 전개된다. 1881년 튀니지 점령, 1883년 베트남 보호국화, 1883~85년 청불전쟁, 1885년 마다가스카르 보호령, 기타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 참여 등 프랑스 식민지 면적은 1870년부터 1890년에 이르는 동안 18배 이상 확대된다.
그러나 제3공화국의 지나친 식민지 정책의 부산물로 파나마 운하 회사 뇌물 스캔들이 터진다. 해외 식민지 운하 건설로 크게 위신을 떨치던 프랑스는 1881년 파나마 운하를 착공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에 식민 투자를 확대하려 하였다. 이 운하 건설 사업에 참여한 유대인 갑부 자크 드 라이나흐(Jacques de Reinach)는 자금난을 겪자 거액의 뇌물을 프랑스 정부 각료와 의회, 신문사에 뿌리면서 1888년에 파나마 운하 건설 자금을 복권 발행으로 조달한다는 허가를 받아낸다. 그러나 복권 판매가 쉽지 않자 결국 회사는 파산하고, 수억 프랑이 정관계 뇌물로 쓰였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50만 명에 달하는 소액투자자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이때 극우 논객 에드몽 드뤼몽(?douard Drumont)은 반의회주의에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선동적인 신문 『자유 언변』(La libre Parole)을 창간, 소시민의 여론을 주도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그 유산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사회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애국주의는 국수주의, 군국주의로 변질되기도 하고, 정치적 스캔들에 따라 때로는 반의회주의, 반공화주의로 나타나기도 하며, 이것이 다시 반유대주의를 조성하기도 한다.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국가주의에서 비롯된 민족적 감정 이외에 반자본주의에 대한 감정도 있었다. 앙시앵레짐 때부터 궁정과 귀족에게 대금업을 하며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은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금융자본가로 급성장하였고, 유대인은 왕당파의 상징, 악랄한 증권투기가의 상징, 속물적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789년 혁명 당시 인권 및 시민 권리선언에 의해 유대인에게도 프랑스 국민과 동일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등 18세기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유대인은 부와 부패의 상징이라는 인식이 프랑스의 가난한 노동자층만 아니라 중산층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4년 9월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드레퓌스라는 부유한 유대인 가문 출신 대위가 독일 대사관에 비밀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진범이 나타나면서 무죄가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유죄를 선고받는다. 이에 에밀 졸라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그의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사회의 여론은 비등하여 프랑스 전국은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 양 진영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싸운다. 우선시하는 두 가치의 대립이었다. 재심 요구파는 진리, 정의, 인권을 민족, 국가, 애국의 가치보다 우선시하였고, 재심 반대파는 국가의 존위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보수 애국주의자들이었다. 드레퓌스파는 국가 이익, 공공 이익이라는 명분하에 시민 개인의 인권이 희생될 수 있음을 대단히 선구적으로 미리 직시한 것이었으며, 반드레퓌스파는 아직도 국가와 민족의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당대의 보편 심성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애국주의' ‘민족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정치권력에 의해 이용되기 때문이다. 애국심이라는 ‘착한' 심성은 언제든 파시즘의 도구로 쓰일 수 있었다. “내가 애국자인 줄은 모르겠지만, 국기가 훼손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포랭은 말했다. 그렇다고 국기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개인을 훼손하는 일이 허용되어서도 안 된다. 국가와 지배 권력이 동일시되는 비각성의 시대, 시민(市民)이 신민(臣民)으로 강요되는 시대, 시민주권은 국가주권 앞에서 당연지사처럼 희생되어왔다. 애국주의를 고무하는 여론에 휩싸여 ‘민중'은 ‘군중'이 될 수도 있었다. 앙드레 질은 〈민중〉(『몰락』 제57호, 1869)이라는 그림에서 ‘Les Peuple'이라는 문법에 어긋난 기이한 명사 제목으로 ‘민중'이 무엇인지 묻는다. ‘Peuple'은 단수 명사다. ‘Les'는 복수 명사 앞에 붙는 정관사다. 따라서 ‘Les peuples' 아니면 ‘Le peuple'로 써야 맞다. 요컨대, 앙드레 질이 보내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피플'은, ‘민중'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진 민중은 일반화되어, 집단화되어 단단해질 수 있지만, 단단해지는 만큼 둔중해진다. 민중은 각성한 개인 입자들이 밀도 있게 바싹 붙어 복수를 이룰 때 큰 힘을 발휘한다. 복수가 ‘살아' 있는 단수,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우선 존중되고, 그리고 논박되는 시대, 그것이 ‘민주'(民主)다.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의 교훈은 바로 그것이었다. 조르주 클레망소(George Clemenceau)는 이렇게 외쳤다. “국가이익이라는 것이 오늘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을 잃고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입니다.”
숱한 검열의 압박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수백 종의 시사풍자지를 쏟아냈던 백여 년 전, 프랑스에서는 이런 시사지를 ‘작은 신문'(petite presse) 혹은 ‘재미난 신문'(journal amusant)이라 불렀다. 밀림의 왕 사자를 귀찮게 공격해 승리한 것은 작은 날벌레 ‘각다귀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가 훨씬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는 오늘날,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 풍자지의 숫자는 프랑스에서도 19세기의 종수에 미치지 못한다. TV 《기뇰》(guignol)이나 《샬리 엡도》(Charlie Hebdo) 같은 풍자 언론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풍자지의 전성기는 그야말로 19세기 말이었다. 지금은 울부짖는 각다귀들이 필요 없을 만큼 태평성대의 시절이어서일까?
풍자화가들의 위상은 세 가지가 될 수 있다. 가령 도미에는 언론인인가?, 화가인가, 문학가인가? 또 앙드레 질은? 포랭은? 어찌됐건 이들은 정치가가 아니라 예술가다. 이들은 신마저 조롱할 수 있는 신성모독의 권한을 가졌다. 프랑스인들은 풍자화가들을 가리켜 ‘집게 왕'이라 불렀다. 모럴에 갇혀 어떤 흥분도, 자극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언어는 예술이 아니다. 비속하고 가벼워 오히려 고급한 풍자를 모럴로 재단하는 우리 시대, ‘내용'을 해독하기 전 ‘형식'을 탓하며 독해의 눈도, 통찰의 눈도, 혜안도 스스로 닫아버린 이 시대, 19세기 프랑스 풍자화가들의 비속시가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줄지 모른다.
지은이 한길책박물관 기획; 류재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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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Andre Gill 앙드레 질 1840-1885
Jean-Louis Forain 장-루이 포랭 1852-1931
Caran d’Ache 카랑 다슈 1858-1909
Adolphe Willette 아돌프 윌레트 1857-1926
Theophile-Alexandre Steinlen 테오필-알렉상드르 스타인렌 185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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