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은 정치처럼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다. 또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실천적 행위에 의해서 구성되어지는 존재이다. 그 움직임과 함께 리듬을 타는 미술비평이 제공하는 세계가 『트랜스리얼: 미술과 비평을 가로지르는 정치미학』이다.
아르케 혹은 에이전트
민심과 천심의 차연(差延)은 마음의 후유증으로 겪어내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려는 시기, 나/우리의 “스물과 스물 하나”를 성찰한다. 이것은 역사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었다. 더 나아가 철학사가 아닌 현대미술에 대한 비평 같다. 그래서 “현대미술은 시각예술이 아니다!” 뿌리와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인식인가 감각인가, 진리인가 쾌락인가! 짓궂게 더 묻자.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을 가로지르는 현대미술은 어떻게 행위하며 스스로를 구성하는가? 모든 예술은 정치적일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것 또한 미적이다. 그리고 지정(地政)학적 상황은 새로운 미학을 지정(指定)한다. 이 어려운 지경(地境)에 비평은 지금 헤맨다. 미술이 시각에 의존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려면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 그 미학은 아주 의학적이다. 신경과학은 감각학으로서 미학에 대한 이미 와있는 미래의 버전이다. 또 미술에 대한 역사학은 지속 가능한 과거를 현재에서 구현할 수 있는가를 의심받는 상황 속에서 경제학은 새로운 기능을 제시하고 있다.
물음: 주체와 행위
노동과 여가를 함께 구현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은 물음을 통해서 양자를 이어준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일자리를 외치는 노동에 있는가, 아니면 인간만이 누리는 여가에 그 방점이 놓이는가? 노력은 언제나 칭찬 받지만 꼭 옳은 것은 아니다. 노동과 노력은 다른 것이다. 존재 망각의 노력인 계몽의 기획과 의도가 오늘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이 어려운 말들이 우리를 지탱한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 우리는 행복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물, 불, 흙, 공기. 모든 것의 근원(아르케)인 이 네 가지가 행복을 구성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약물, 섹스, 돈, 권력은 행복의 아르케일 수 있을까? “물음이란 어느 것이나 하나의 탐구이다. 모든 탐구는 탐구되는 것으로부터 선행적으로 방향을 규정받는다.” 끔찍하지만 행복이 “나”를 규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행복과 관련해서 대충 이렇게 말하고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주 특이한 종류의 질문이다. 그 물음의 형식은 어떤 특정 사물에 대한 것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그렇다면 이른바 추상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과는 유사한가? 자유란 무엇인가, 혹은 지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이 그런 종류이다. 그러면 그 물음에 대한 분석이 곧바로 그 물음을 받는 대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을까? “물음이란 어느 것이나 탐구이다. 모든 탐구는 탐구되는 것으로부터 선행적으로 방향을 규정받는다.” (이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와중에 느닷없이 현대미술과 행복을 접속할 수 있을까? 아르케와 에이전트의 혼돈 속에서 말이다.
현대미술: 접속의 하이테크네
에이전트라는 행위로 구성되는 주체의 귀환을 바라보자! 우리 현대미술의 시대, 에이전트의 작업은 대량생산된 소비재의 번지르르한 외양과 포장을 참조했던 것이다. 상품/일상용품이 요란하게 번쩍거릴 때 그 매끄러움은 팝 아트와 뒤섞여 혼란 속에서 위로의 에로티시즘을 미끄러진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일상적인 삶들이 소비 중심의 팝 라이프를 수용하는 듯,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의미가 결여된 현대문명의 피상성을 예찬하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삶이 이상(Idea)과 일치하는 존재론으로 행복을 설명하는 고대 그리스 미학을 세속화한 로마 제국의 미술은 권력에 대한 찬양으로 보이는 기념비적 미술로 현대공공미술의 전사(前史)를 보여주었었다. 이후 국가미술 혹은 종교미술은 유사하게 자신의 힘을 미술에 행사한다. 그리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것은 21세기에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전유(轉喩)와 콜라주는 샘플링과 리믹싱으로 대치된다. 발견된 사물이 하나의 작업으로서 새로운 매체와 데이터 네트워크를 포괄하는 하이테크네와 접속하는 것이다. 구글의 이미지 미학은 마음대로 재조합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을 작가들뿐만 아니라 네티즌 모두에게 제공한다. 현대미술의 제작과 매체에 대한 테크놀로지는 인류학적 인식론 속에서 새로운 원근투시도법을 구동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까닭에 예술경제이론의 새로운 주장이 주목하는 것은 상상력과 함께 소유의 에로틱한 삶에 대해서이다.
떠나자! 현대미술의 근본 혹은 "자본"에로
정치의 왜곡 혹은 왜소화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예술을 한정한다. 그래서 철학은 회의론에 불과하고, 다양한 이론의 표명은 도덕적 상대주의로 폄하되거나, 학계의 사회 비평가들이 행하는 논평은 악의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 몽상가들의 지껄임이라고 취급당하는 종교인들의 이상들, 그리고 삶에 대한 관조를 수행하는 예술계의 기획 등 이 모두는 인간 문명에서 각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정치를 주체적으로 구성한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유명론은 그저 이름뿐이라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야말로 우리라는 시대를 알게 한다. 그렇다면 인정하자. 불편하더라도! 정치는 어디 있는가? 보수적인 조롱 속에서 현대미술이 종교 혹은 정치와 맺는 관계를 고민하다보면 끊임없이 “자본”을 묻게 된다. 더럽게 섹시한 돈과 권력에 대한 작업은 보이는 것보다 다양한 양태이다. 최선을 다해 현대미술은 정치적 모험에로 뛰어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인류학적 인식론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정치는 인간 삶의 많은 스타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현대미술은 자기를 구성하는 행위들 그리고 이중성으로 가득한 인간의 정치적 삶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정치가 얼마나 다양하게 변할 수 있는가를 간파해야 한다. 이 특수한 지역에 대한 확실한 도로 표지판은 없을 지라도 그 미학적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은이 | 김병수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문청시절’에는 시인을 꿈꾸다가 문학과 사상을 구분 못한 덕분에 경희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은사님에게 ‘예술 철학’을 공부하러왔다고 말했다가 그것이 예술과 철학을 동시에 연마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 루오와 르동의 화집을 들고 다니며 시를 읽다가 군대를 다녀와 “세상은 왜 없지 않고 있는가?”를 묻는 하이데거를 통해 형이상학에 심취했고 그 이후 세상의 이유를 예술에서 찾으려는 심정에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진학하여 석사를 거쳐 박사를 수료했다. 우연한 기회에 공채를 거쳐 1991년 동양그룹이 운영하던 서남미술관 큐레이터로 미술계에 입문, 1997년 『미술평단』에 미술평론이 당선됐고 홍익대학교를 비롯하여 경기대미술디자인대학원, 경희대, 대구카톨릭대대학원, 동국대, 수원대대학원, 안동대 등에서 미학·미술사학·현대미술론 등을 강의했다. 『열린 미학의 지평』(공저), 『한국현대미술가 100인』(공저),『21세기 한국의 작가 21인』(공저) 등을 펴냈다. 현재 홍익대에서 강의하며 미술전문지 『퍼블릭 아트』에 「사상가로 보는 현대미술」을 연재중이다.
목차
서문
1부 미술과 비평의 정치미학
'하찮은' 미술비평?
교유와 안목 그리고 '분쟁적' 사유
미술과 비평의 정치미학
미술과 비평의 에토스
안젤름 키퍼: 오, 숭고한 정치미학
"미술은 있어도 미학은 없다"?
실감나지 않는 이야기: 미학과 현실정치
2부 글로벌-로컬의 지정학적 미학
'한국화'의 탈영토화를 꿈꾸며
네 미학은 뭐야?
한국 공공미술의 미학을 향하여
지구지역 시대에 미술과 비평은 위기인가?
다문화 예술철학: 그 철학적 공간에 대한 여행 가이드
글로벌-로컬의 지역미술?
3부 에이전트로서 현대미술
경영과 현대미술
미술은행은 한국은행인가?
화랑미술 vs. 공공미술
일(一)과 다(多)는 우리의 일과다
미술관의 미학적 차원
세계를 리프로그램하는 현대미술
트랜스리얼: 테크놀로지 정보미학의 아름다움
"현대미술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시각예술 너머의 현대미술
본문 수록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