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전 장우성 화백이 1981년 12월부터 5개월간 101회에 거쳐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화맥인맥>을 다시 묶어 펴낸 책이다. 월전의 가족사와 그림을 시작하게 된 동기,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느껴야 했던 화가들의 좌절과 번민 등 화단의 갈등과 변화를 그린 월전의 회고록이다.
책 소 개
<화맥인맥> 30년 만에 새롭게 복간
이 책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81년 12월부터 5개월간 101회에 거쳐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화맥인맥>을 다시 묶어서 펴낸 것이다. 장우성 화백은 작고한 미술 전문기자 이규일李圭日의 권유로 이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월전은 당시 연재를 시작하며, 심리적 압박을 심하게 느꼈는데, 자서自序(본문 10~11페이지)에서 밝히기를 “나와 관련된 많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함께 들추어내지 않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내 주변 일들을 공개함에 있어 나는 과연 호도糊塗나 과장 없이 솔직·적나라하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 적고 있다. 그러나 월전은 “나는 생각했다. 내가 살아온 시대적 환경,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한 모든 연관된 주위의 양상은 어쩔 수 없이 한 시대와 사회의 단면인 것이며, 그것은 좋든 싫든 한 개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며.....” 연재를 결심하고, “남의 흠은 되도록 부드럽게, 내 일은 더욱 더 냉정하게 피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월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지 연재 중에 다행히도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개인의 회고록을 넘어선, 한국 근현대미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
이 책은 월전이 고희古稀를 지나, 그가 성취한 화업畵業을 회고하며, 미술계 안팎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회상하며 쓴 회고록이기도 하다. 월전의 가족사와 그림을 시작하게 된 동기, 당대의 화숙畵塾에서 함께 교유했던 동료 화가들과의 교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느껴야 했던 화가들의 좌절과 번민, 소위 국전 파동을 거치면서 고조되었던 화단의 갈등과 변화 등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장학구 이천시립월전미술관장은 이 책이 “월전 선생의 회고록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문헌자료가 희소한 근현대미술사의 사각지대를 비추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며 “30여 년 시간이 흐르면서 책은 절판되었으나, 그간 여전히 많은 수요가 있어, 이 개정판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달月을 좋아하는 천성과 마을 이름 사전絲田에서 한 자씩 따온 호 월전月田
어린 장우성은 어른들의 뜻에 따라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지만, “그림만 쳐다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본문 32페이지)”로 그림을 좋아해서 옛날 그림들을 보고 모작하다가 부친에게 꾸중을 듣곤 했다. 그러던 중 어린 장우성은 서울여행을 하게 되고, 큰 자극을 받아 일본어 공부에 매달리게 되는데, 배일수구排日守舊 사상에 철저했던 어른들이 “일본 사람의 앞잡이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환쟁이가 낫다.(본문 34페이지)”생각으로,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고 한다. 글공부를 열심히 해서 선비로 입신양명하기를 바랐던 어른들로서는 파격적인 용단이었다. 장우성이 서울로 떠나던 날 부친이 달을 좋아하는 장우성의 천성과 마을 이름 사전絲田에서 한 자씩 따서 ‘월전月田’이라는 호를 지어 주면서, 다음에 훌륭한 화가가 되면 쓰라고 했다(본문 34페이지)고 한다.
화맥과 인맥, 스승 이당과의 묘한 갈등
서울로 상경한 장우성은 이당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우고, 위당 정인보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1932년 <해빈소견>이라는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며 화단에 데뷔한다. 장우성은 이후 당대의 서화가들과 화맥과 인맥을 형성해 간다. 이 책에는 오세창(104페이지), 손재형(52페이지), 백윤문(90페이지), 김용준(186페이지), 배렴(256페이지), 이응노(259페이지), 허백련(336페이지), 장발(262페이지. 270페이지) 등 많은 서화가들과 나누었던 교유와 에피소드들이 소개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서울대 미술학부 창설 과정(본문 161~173페이지), 국전을 둘러싼 갈등(본문 244~255페이지), 한국전쟁 당시 한국미술계 동향(본문 193~239페이지) 등이 자세하게 실려 있어 자료적 가치 또한 높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스승인 이당 김은호와의 묘한 갈등이다. 장우성 자신이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분문 89페이지)”라고 여겼던 이당과의 갈등은, 조선일보 기고문을 둘러싸고 2회 후소회 전을 열 때(본문 86~89페이지), 정읍 충열사 이충무공 영정 제작을 둘러싼 갈등(본문 297~303페이지) 등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지은이 ㅣ 장우성
1912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호는 월전月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화숙畵塾인 낙청헌絡靑軒에서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해빈소견海濱所見〉으로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했다. 그 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속 4회 특선을 함으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서울대와 홍익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위원, 문교부 문화재보존위원,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등으로 활동했다. 작품으로 〈이충무공 영정〉 〈한국의 성모와 순교복자〉 〈백두산 천지도〉 〈김유신 장군 영정〉 등 다수가 있으며, 저서로 『화맥인맥畵脈人脈』(1982), 『화실수상畵室隨想』(1999), 『화단畵壇풍상70년』(2003) 등이 있다. 2005년 향년 94세로 작고했다.
목 차
자서 - 장우성 10
책을 다시
펴내며 - 장학구 12
지관의 예언 28
그림 공부 허락 31
위당댁 출입 35
이당 화숙 39
성당의 상서회 42
화맥의 형성 45
협전과 선전 48
소전 손재형 52
육교한어학원 56
협전의 폐막 59
다방 순례 64
후소회 발족 68
신문 화평 71
석문사 탱화 75
첫 신문 새해 휘호 78
강릉 여행 82
풀 수 없는 수수께끼 86
향당 백윤문 90
조선미술전람회 93
두 번째 목포행 97
일본 나들이 100
위창 오세창 104
청춘 일기 109
선전 수상 답사 113
여성 모델 117
가친 회갑 기념 화첩 122
구룡산인 김용진 126
초상화에 관심 129
여주 선유대 135
두 가지 기록 139
평양 구경 142
총후 미술전 146
광복의 날 151
해방 기념 미술전 154
서화 골동 158
서울대 미술학부 창설 161
미술학부 학생들 164
한국화의 방향 168
미술대 교사 시비 171
국제 성화전 174
제1회 국전 179
김흥수 씨의 나부 군상 183
근원 김용준 186
첫 개인전 189
6.25 동란 193
교수 인민 재판 196
김일성 초상 199
부역자 심사 202
1.4 후퇴 205
정훈국 미술대 208
첫 종군 212
종군 일기 215
육탄 4용사 219
부산 피난 시절 223
전시의 미술전 227
충무공 영정 229
영정 봉안 234
전후의 화단 237
문화보호법 240
미술계 두 동강 244
국전 파동 247
국회서 미술 논쟁 250
쌓이는 반목 253
배렴의 죽음 256
고암 이응노 259
우석과 불재 262
철농 이기우 266
학장 운동 소문 270
풀린 오해 274
미술대 삼총사 278
후소회원 281
4.19 이후 284
서울대 교수직 사퇴 289
국전 추천작가제 개편 293
정읍 충열사 영정 297
충무공 영정 싸고 잡음 300
낙선 작품전 304
미국 전시회 307
호평 받은 전시회 310
워싱턴 동양예술학교 314
미국에서의 생활 318
미국 일기 321
귀국전 325
일중 김충현 329
본격 상업 화랑 333
의재 허백련 336
16회 예술원상 파란 339
일본 여행 343
운전 허민 346
추사 김정희 350
국전 심사 제도 개선 354
국회의사당 벽화 제작 358
백두산 천지도 364
예술원 활동 366
예술원 회원들 370
첫 일본 전시회 373
위인 초상화 377
유럽 여행 384
동남아의 예술 단체 392
1980년 파리 미술전 396
1982년 쾰른 미술전 399
작가 약력 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