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 년 동안 연필그림만을 그린 저자의 10주기를 기념해 출간된 이 책은 연필화 중 145점을 엄선하여 수록하고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표한 평문과 회고문 9편, 작가 노트,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 사진과 함께 보는 작가 연보 등이 실려 있어, 그 동안 주목 받지 못한 예술가의 모든 자료를 총망라하는 결정판의 면모를 충실히 갖추었다.
책 소 개
연필 오채론(五彩論)의 화가, 원석연
“그 연필화들은 부드러움과 강도가 조절된 세밀한 질감의 묘사와 표현적 완벽성 등으로 인해 확대경으로 세부를 살펴봐야 할 만큼 정밀하게 이루어져 있고, 얼핏 보아서는 인쇄된 화면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 더욱 대담하게 설정되고 있는, 그려진 소재와 여타 공간인 흰 종이 바탕의 선명한 관계설정 및 표현감정의 연장적 계산 등은 이 작가의 신비스런 마력이자 특이한 화면창조이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적 사유적 공간미학의 실현이고, 그려진 사물과 자연풍정의 공간구성 및 정감적인 핵심의 강조 등도 모두 그러한 엄격한 표현행위로 구현되고 있다. ‘연필색도 색이다. 구사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색감과 질감을 나타낼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전통적인 수묵화의 미학이 본질적으로 ‘묵오채(墨五彩)’의 원리에 기초해 있다는 표현사상과 원석연의 ‘연필 오채론(五彩論)’의 신념은 상통된다. 재료와 기법상으로만 다를 따름이다.” - 이구열(李龜烈) 「원석연, 그 연필화의 감동과 신비」(1989) 중에서.
육십여 년 동안 오로지 연필그림만을 그린 화가 원석연(元錫淵, 1922-2003). 서양화가 이중섭(李仲燮), 김훈(金薰), 백영수(白榮洙), 한국화가 이영찬(李永燦) 등과 교유했고,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가 남산 기슭에 세운 고암화숙(顧菴畵塾)에서 서양화가 박석호(朴錫浩)와 함께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동시대 작가들에 비해 그의 이름과 작품은 유난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료화가들 사이에서도 ‘괴벽이’ ‘대꽂이’ ‘바카쇼지키’(ばか正直. 일본어로 고지식한 사람, 우직한 사람이란 뜻)로 불릴 만큼 독특한 성격이었던 데다가, 연필화가 제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 나가며 점점 더 단절과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던 탓이었다. 그는 1949년 제1회 「국전」에 출품한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공모전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개인전을 통해서만 사람들과 연결됐다. 종이에 연필로 실물 크기의 개미 한 마리만을 그려 놓고 같은 크기의 유화 작품과 동일한 가격이 아니면 팔려고 하지 않았고, 꼬박 며칠 동안 그린 초상화를 초상의 주인이 수정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찢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는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그의 십 주기를 기념해 출간된 이 책 『원석연(元錫淵)』은 격변의 한국근현대사를 살아온 한 독특한 화가의 작품과 생애를 조명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세상에 정당히 드러내고 기억되게 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한국 근대회화사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독특한 존재
원석연은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19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한 것이 그가 받은 미술교육의 전부였다. 해방 후,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에서 서울로 내려와 충무로에서 행인이나 상인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주며 생계를 이어 갔으며, 1945년 미공보원(USIS)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품한 그의 작품 두 점이 모두 입선했는데, 「국전」에서 연필화가 입선한 경우는 원석연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1956년 서울 미공보원 화랑에서 열린 여섯번째 개인전부터는 원석연 특유의 정밀묘사가 정립되기 시작했고, 1960년대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한국적인 소재들은 이후 2000년대까지 꾸준히 등장하면서 원석연 작품세계의 독특한 일부분을 이루게 된다.
수천 마리의 개미들이 떼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을 그린 ‘개미’ 연작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킨 이 그림은 삶의 삼라만상,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의존, 성실, 불굴의 투지, 그리고 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이나 연민, 절대 고독에 대한 페이소스를 표현하고 있다. 이후 원석연의 연필화는 무르익은 기량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 엄격한 소재 분석 등이 어우러져 원숙하고도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화면에 여백을 많이 남겨 놓거나 배경 전체를 빈 공간으로 설정하고 한가운데에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사물을 두어 흰 여백과 대조되게 함으로써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특히, 거대한 무(無)의 공간과 대치하는 듯한 한 마리 개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원석연 자신의 모습이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관조를 통해 얻어진 맑은 침묵의 화면은 말년의 원석연이 도달한 회화적 성취였다.
그러나 원석연이 작업하던 시기는 전통시대의 미학이 지배적이던 한국 근현대 미술계의 상황, 즉 ‘모필(毛筆)의 시대’였기에, 붓이 아닌 연필로 그린 그의 그림에 대해 미술계는 소원(疏遠)할 수밖에 없었다. 연필화가 무대 뒤편의 작업으로 인식되는 화단의 태도를 못 견뎌 한 원석연은 특유의 뚝심과 수도자와도 같은 침묵으로 대응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원석연의 작품과 고독한 삶을 이제라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 근대회화사에서 연필이 지녔던 역할과 가치에 대한 연구에서뿐만 아니라, 연필화가 지닌 고유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 주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석연 십 주기 기념 출판과 추모전
그의 수많은 연필화 중 145점을 엄선한 이 책은, 정물, 풍경, 인물과 동물, 개미 연작 등, 삼십대 초반이던 1954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해인 2003년에 이르기까지의 오십 년 동안의 대표작을 소개한다.(집필 과정에서 찾게 된 1949년 제1회 「국전」 입선작 '얼굴'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으로, 연보에 수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자료조사, 유족 및 지인들과의 심도 있는 인터뷰를 통해 새롭게 씌어진 미술사학자 김경연의 작가론은 그동안 인상적으로만 언급되어 온 원석연의 작품과 생애를 기록과 증언에 근거해 객관적 시각으로 온전히 정리하고 있다. 책 끝에는 미술평론가 유준상(劉俊相), 이경성(李慶成), 이구열, 윤범모(尹凡牟), 오광수(吳光洙), 홍경한(洪京漢), 부산 공간화랑 대표 신옥진(辛沃陳), 겸재정선기념관장 이석우(李石佑) 등이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표한 평문과 회고문 9편, 단편적이나마 화가의 생각을 가까이 느껴볼 수 있는 작가 노트, 아내 윤성희(尹成姬)와 주고받은 편지, 사진과 함께 보는 작가 연보 등이 실려 있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예술가의 모든 자료를 총망라하는 결정판의 면모를 충실히 갖추었다.
작품집의 출간과 함께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는 2013년 6월 20일부터 7월 28일까지 원석연 십 주기 추모전이 열린다.
지은이 ㅣ 원석연
황해도 신천 출생의 연필화가로,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화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한 후 월남해, 서울 충무로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1945년 서울 미공보원(USIS)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화가로서의 존재를 처음 드러냈고, 이곳에 근무하며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947년 남산 기슭에 개설한 사립미술교육기관인 고암화숙(顧菴畵塾)에서 데생을 가르쳤으며, 1949년 제1회 「국전」에 〈얼굴〉과 〈조망(眺望)〉을 출품, 두 점 모두 입선했으나, 이후 공모전에는 단 한 번도 참가하지 않는다. 부산 미화랑, 서울 미8군 도서전시관, 미국 볼티모어 시티 스튜어드(Baltimore City Steward) 화랑, 조선호텔, 미도파화랑, 신세계화랑, 그로리치화랑, 갤러리 아트사이드 등에서 말년까지 사십 회 가까운 개인전을 열었다.
목 차
연필화가 원석연 / 김경연
A Summary - Pencil Artist, Won Suk Yun
作品
記錄
원석연을 향한 시선들?회고와 평문
작가 노트
사진과 함께 보는 작가 연보
수록 작품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