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실무, 교육, 비평, 연구 현장에서 오랜 시간 경험과 식견을 축적해온 중견 디자이너 13인이 현 상황을 분석하고, ‘디자인 회생의 길’을 모색한 결과물을 엮었다. 전반부에는 상처투성이 디자인의 ‘비판과 진단’을, 후반부에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비전과 제안’으로 나누어 담았다.
책 소 개
“디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누구나 한마디쯤은 할 수 있는 시대,
일상 속에서 어떤 대상을 디자인의 여과 없이 만나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
디자인은 우리에게 과연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이라는 독이 있다.
복어의 독 성분으로, 치명적이라고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 적절히 사용하면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테트로도톡신의 가장 무서운 점은 감염되면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온몸이 마비되어 죽어가는 자신을 시시각각 인지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디자인이 속수무책으로 자멸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치 테트로도톡신에 마비된 것 같다.
디자인이 주위에 해를 끼치는 독이 될지,
이 상황을 타개하고 본연의 위치를 되찾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약이 될지는 디자인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디자인의 ‘죽음’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텐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이 한 이 유명한 말을 디자인에 적용해본다면, “디자인은 현실을 따른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특히 현재 한국 디자인계는 더욱 그러하다. 좀처럼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제 상황이 불러온 ‘현실의 위기’에 휘둘리다 못해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 이에 지난 2012년, 리코드(한국디자인연구소)를 주축으로 모인 18인의 디자인 전문가들이 이미 ‘디자인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현실을 직시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디자인은 죽었다』).
IMF 이후 시들해진 디자인 열기가 전(前) 서울 시장의 ‘디자인 서울’ 정책으로 잠깐 반짝 살아나는가 싶더니, 경제가 어려워서인지 정책의 차별화를 위해선지 최근 디자인 분야는 끝을 모르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디자인은 유행을 타는 산업이 아니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이후 산업의 발전과 함께 꼭 필요한 분야인데 말이다. 전반적인 경제 불황과는 별도로 디자인 침체기가 이처럼 지나치게 오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자인은 독인가, 약인가?』는 바로 그 이유를 짚어보기 위한 본격적인 시도로서, 디자인 실무, 교육, 비평, 연구 현장에서 오랜 시간 경험과 식견을 축적해온 중견 디자이너 13인이 현 상황을 분석하고, ‘디자인 회생의 길’을 모색한 결과물을 한데 모아놓았다.
어려움에 빠진 현 디자인의 상황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의 분석과 날카로운 비판이 나왔지만,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디자인의 태생적 특수성을 그 원인 중 하나로 짚고 있다. 우리나라 디자인은 유럽이나 미국과는 그 태생이 다르다. 서양의 디자인이 산업현장의 필요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면, 우리 디자인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을 목적으로 정부에서 산업계에 요구하는 형식으로 태어났다. 주어진 환경에 맞춰 인위적으로 탄생했으니 자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치열한 고민과 철학 없이 몸집만 불리다가 자립해야 하는 순간이 오니 쉽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또한, 좋든 싫든 선정성으로 점철된 역동적인 지점에서 발아, 성장한 것이 디자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빨리 많이 생산하는 시스템이 가속되면 경제가 성장하고, 먹고살기 좋아지면 곧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리하여 ‘빨리’, ‘많이’, ‘크게’가 지상 최대의 명제가 되었으며, 그 가치가 무너지면서 디자인의 침체도 길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외부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독소’들도 한몫하고 있다.
“사회문화 연구, 심리학, 마케팅 등 타 분야와의 융합에서 마치 디자인 전문가인 것처럼 거창하게 설파하는 사람들,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저 이용만 하는 디자인 정책가 등 외부로부터의 불순한 ‘독소’에 디자인이 마비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디자인계 내부에 쌓인 불순물이 썩어서 무색무취의 독소로 변질된 것일까? 또 디자인이 삶의 가치를 높여준다느니 대상에 가치를 부여한다느니 미사여구를 남발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디자인에 독이 된 것은 아닐까? 여하튼 문제는, 교육계는 물론 산업 현장에서까지 테트로도톡신에 마비된 것처럼 디자인의 숨통이 끊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다는 것이다.”
_이수진, '테트로도톡신에 취한 디자인' 중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디자이너들은 눈에 띄게 성장이 축소된 한국 디자인계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배한다면, 디자인의 아이덴티티 또한 새롭게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달리 보면 이는 디자인에는 특정한 정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처 없는 발길,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여정에는 더더욱 인도자가 필요한 법이다. 끊임없는 변화와 터닝 포인트에서 가까스로 무게 중심을 잡으며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하고, 한시도 성찰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늘 인간의 곁에서 함께 변해가야 하는 디자인의 숙명이다.
“그렇지만 이 치명적인 독에는 ‘호르메시스 효과’로 볼 만한 의외의 효능도 있다. 실험 결과 테트로도톡신이 모르핀의 약 3,000배에 달하는 진통 효과를 지닌 것으로 밝혀져 말기암 환자의 진통제로 개발되는 중이다. 어떤 분야에서건 발전은 늘 상승곡선만 그리지 않는다. 정체기와 하락기를 겪으며 이를 발판 삼아 재도약하면서 이전을 넘어서게 마련이다. 우리의 디자인 교육은 짧은 기간 동안 양적 팽창을 해왔다. 정체기라 할 수 있는 지금은 질적 성장을 위해 도약할 시기다. 디자인 교육의 본질을 찾은 것을 성장이라 표현하는 것이 아이러니컬하지만, 작금의 상황들이 언젠가 호르메시스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 믿는다.”
_이수진, '테트로도톡신에 취한 디자인' 중에서
이제 디자인은 전문가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상적 언어가 되어‘모든 사람은 디자이너’라는 말이 실감 나는 세상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디자인은 독인가, 약인가?』가 가장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디자인 스스로 힘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생력이 있다면 디자인을 방패 삼아 벌이는 이런저런 일들에 이용되는 들러리가 아니라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디자인의 이름을 걸고 하는 모든 일에서 디자인의 본질을 살리는 길이다. 특히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완전한 체질 개선이다. 체질을 개선하지 않고 응급 처치로 목숨만 살려놓으면 언제 또 외부에서 들어오는 독에 마비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디자인이 외부에서 받은 영향 때문에 주위에 해를 끼치는 독이 될지, 이 상황을 타개하고 본연의 위치를 되찾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약이 될지는 디자인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비판과 진단, 그리고 비전과 제안
『디자인은 독인가, 약인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선 상처투성이가 된 디자인이 독에 마비된 상태일 수도 있다는 ‘비판과 진단’을, 후반부에선 현재의 위기가 디자인을 살리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비전과 제안’을 담았다.
비판과 진단
먼저, 이수진은 ‘테트로도톡신에 취한 디자인’을 통해 일부 디자인 교육계의 안일함을 독에 마비되어 죽어가는 걸 뻔히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비유하며 지적하고 있다. 권명광은 ‘가장 현대적이면서, 산업적이고 예술적인 동시에 사회 현상이자 문화 현상인 디자인’에서 요즘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디자인 용어의 난무를 지적하고, 문화와 더불어 발전하기 위해 디자인계가 취해야 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박현택은 ‘별일 없길 바라며’에서 끝없이 팽창하는 현대인의 욕심에 경고를 보내며, 디자인이 욕망의 대상으로만 복무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과 삶을 위한 것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남희는 ‘디자인과 후마니타스’에서 공예의 장인 정신을 통해 대량의 디자인 발아에 대해 인간적 관점의 회고를 이야기하고 있다. 방경란은 ‘진정, 다 빈치를 꿈꾸는가?’에서 우리 교육과정이 입으로 부르짖는 것만큼 창의적인 인간을 길러낼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쉽고 재미있는 교육이 답이라고 말한다. ‘디자이너는 어떤 성찰을 해야 하지?’에서 문찬은 제자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해 디자인전공 학생이라면 누구나 하게 마련인 고민에 대한 답과 앞으로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비전과 제안
박완선은 ‘디자인! 답을 구해보자’에서 현시대의 디자인을 깊이 보고, 달리 보고, 다시 보기를 통해 디자인의 근본이 되는 정신을 구하고자 한다. 유부미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디자인’에서 시간을 담은 디자인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천천히 자연스럽게 세월과 사람과 함께 변화하는 디자인을 예찬한다. 권혜숙은 ‘나를 아는 것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에서 디자인의 서양식 교육과 동양식 교육을 비교하고 미래에 맞는 새로운 디자인 교육법을 현재의 나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김현선은 ‘산업단지 안전 시스템,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가?’를 통해 산업단지 안전 시스템에는 사용자, 즉 근로자 입장에서 식별이 쉽고 인지하기 용이한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김현석은 ‘디자인, 디자이너, 헤리티지’에서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 커지는 이 시점에 제대로 된 우리 디자인 역사의 집필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장동련은 ‘디자인의 변천, 위기, 그리고 기회’에서 위기에 처한 디자인의 현주소를 말하며 동시에 이를 헤쳐 나갈 방법으로 리더십과 창의성을 들고 있다. 원명진은 ‘당신은 대체로 영웅적인가, 악당적인가?’에서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 V]와 드라마 [여왕의 교실]을 분석, 그 안에서 악당의 불온한 태도에 감춰진 ‘자신만의 콘셉트’를 이끌어내며, 선과 악, 영웅과 악당을 대하는 기존의 이분법적 시각을 신선하게 뒤집고 있다. 그러면서 당신의 삶은 어떤 콘셉트를 갖고 있냐고 묻는다.
디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어도 누구나 한마디쯤은 할 수 있는 시대다. 다행히 디자이너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운 디자인을 하기 위해 항상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직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지은이 ㅣ 리코드
디자인계의 현실을 비평·자성하고, 이를 토대로 앞으로 우리나라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리코드는 디자인 학계와 업계에서 오랫동안 실전 경험을 쌓아온 연구위원 권명광, 목진요, 박완선, 방경란, 이수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위원들 모두 우리나라 디자인이 국가와 문화 발전의 동력으로 되살아나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고 있으며, 디자인 비평 및 컨설팅, 교육, 출판, 조사·연구 등의 사업을 통해 한국 디자인의 질적 성장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자 한다. 엮은 책으로 『디자인은 죽었다』(2012)가 있다.
목 차
디자인의 죽음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텐가?
디자인은 독인가? 비판과 진단
테트로도톡신에 취한 디자인 | 이수진
가장 현대적이면서, 산업적이고 예술적인 동시에
사회 현상이자 문화 현상인 디자인 | 권명광
별일 없길 바라며 | 박현택
디자인과 후마니타스 | 박남희
진정, 다 빈치를 꿈꾸는가? | 방경란
디자이너는 어떤 성찰을 해야 하지? | 문 찬
디자인은 약인가? 비전과 제안
디자인! 답을 구해보자 | 박완선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디자인 | 유부미
나를 아는 것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 권혜숙
산업단지 안전 시스템,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가? | 김현선
디자인, 디자이너, 헤리티지 |김현석
디자인의 변천, 위기, 그리고 기회 | 장동련
당신은 대체로 영웅적인가, 악당적인가? | 원명진
필진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