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3원 3재라하여 6대 화가를 꼽는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공재 윤두서 그리고 현재 심사정이다. 심사정 국내 대표 연구자인 저자가 심사정의 자료와 기록, 그가 남긴 300여 점의 작품을 살펴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담아낸 책이다.
책 소 개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현재 심사정,
그의 예술 세계를 통해 새롭게 만나는 조선 회화사의 앞과 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는 누가 있을까. 흔히 3원3재(三園三齋)라 하여 6대 화가를 꼽는다. 3원은 단원 김홍도(壇園 金弘道),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을 말하고, 3재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그리고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을 일컫는다. 다른 이들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이들에게도 현재 심사정의 이름은 그리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선 시대를 조명하는 전시회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자주 가는 이들이라면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림만큼은 눈에 익을 것이다.
아직 이른 봄, 다리를 건너 눈도 채 녹지 않은 산속으로 매화를 찾아 떠나는 인물을 그린 「파교심매」, 심사정이 그림을 그리고 원교 이광사가 글씨를 써서 함께 만든 《현원합벽첩》玄圓合璧帖의 아름다운 화조화, 그리고 지난 6월 15일까지 서울 DDP에서 전시된 조선 최초의 산수장권山水長卷인 「촉잔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조선 시대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각별한 사랑을 받는다. 그의 그림은 아취가 느껴지는 단아한 것과 활달하고 거친 필선으로 그려진 호방한 것이 있는가 하면 한없이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작품들도 있다. 커다란 대작이 있는가 하면 손바닥만 한 작은 작품도 있어 정말 한 작가의 그림일까 싶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현재 심사정, 조선남종화의 탄생』은 심사정에 관한 국내 대표 연구자인 저자 이예성이 심사정 당시의 숱한 자료와 그에 관한 기록은 물론 그가 남긴 약 300여 점의 작품을 살펴 그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오롯이 담아낸 책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저자는 당대 다른 화가들이 남긴 작품들과 심사정의 작품들을 함께 살핌으로써 심사정이 그 당시 다른 문인화가들과는 어떻게 다른 길을 걸었는가를 생생하게 밝혔다. 또한 심사정이 중국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그것을 토대로 조선만의 특징적인 화풍을 만들어낸 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폈으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들의 작품까지 비교함으로써 심사정을 기점으로 그 앞과 옆, 그리고 후대까지의 조선 미술사의 전후를 함께 들여다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대역죄인의 자손이 되어 평생 화가로서 외롭고 고단한 생을 살다
1707년(숙종 33년), 혼인을 통해 왕실과도 연계가 있었을 만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심사정은 그러나 조부 심익창(沈益昌)이 연잉군(이후 영조)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대역죄인의 자손으로 전락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일생 불우하게 살아야 했으며 전문화가가 되어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야 할 만큼 곤궁하게 지내야 했다. 환갑이 가까운 58세 때 그를 만난 이덕무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하루 4점씩 그림을 그리며 살았고, 금강산에 한 번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여행 한 번 제대로 다녀오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인생 최대의 걸작 「촉잔도」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 그는 63세로 세상을 떠난 뒤 장사를 치를 형편도 되지 않아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는 기록을 묘지명에 남겨야 했다. 그가 평생 얼마나 그림을 열심히 그려야 했고, 얼마나 곤궁하게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집안에 닥친 불행에 좌절하지 않았다. 세상의 냉대를 뒤로 하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으며, 그림에 대한 타고난 자질을 평생 연마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을 만큼 스스로의 재능을 꽃 피웠고, 나아가 조선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자신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꾸준히 작품을 남긴 덕분에 약 300여 점의 작품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저자인 이예성은 이를 가리켜 “곤곤한 삶을 살다간 심사정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한국회화사에는 그럴 수 없는 행운”이라고 평한다.
심사정은 당시의 활동과 명성에 비하면 전하는 기록이 아주 적은 편이다. 확언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역모 죄인의 자손과 교유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렸던 탓으로 보인다. 역모 죄인의 자손과 교유하는 것만으로도 큰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당시로서는 심사정과 교유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 좋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 그의 작품에 대한 당대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역모 죄인의 자손으로서 생업으로 그림을 그려야 했던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을 통해 그는 자신의 삶과 인생을 고스란히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의 삶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그림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며 그리하여 그는 온전히 그림으로만 말하는 화가이다.
중국의 남종문인화를 토대로
우리만의 미감을 담은 ‘조선남종화’를 탄생시키다
1707년에 태어난 심사정은 숙종, 경종을 거쳐 영조 대에까지 살았는데, 이 시기는 조선이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새롭게 도약하던 시기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가 일어났던 때이다. 이러한 변화는 미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히 청과의 관계가 개선된 1700년 이후에는 회화 전반에 걸쳐 뚜렷한 변화가 일어났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아마추어 화가인 문인화가들이 각 시기마다 회화의 새로운 변화를 제시하고 이끌어 왔는데, 조선 후기 변화를 이끌었던 것도 바로 문인화가들이었고 심사정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던 화가였다.
변화를 가져온 가장 큰 요인이었던 남종화풍은 17세기부터 조금씩 전래되다가 18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수용되었으며, 그 결과 조선 후기 회화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조선 후기에 진경산수화풍 못지않은 영향을 끼친 심사정의 화풍 역시 중국의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심사정은 중국의 남종화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화풍을 수립하는 한편, 이를 전통 화풍과 접목시켜 중국의 남종화풍과는 다른 고유색을 띤 조선남종화풍을 완성시켰다. 그가 조선남종화풍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데는 명문가의 자손이지만 직업화가로 살 수밖에 없던 그의 처지 덕분이기도 하다. 당시 신분에 따른 화풍의 선호도가 분명했던 문인화가들은 남종화풍은 선호하여 자신들의 그림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였으나, 이른바 북종화풍으로 구분된, 직업화가들의 화풍이라고 여겨지던 절파화풍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신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심사정은 작품에 필요한 것이라면 절파화풍이나 기타 북종화풍으로 분류되던 기법도 주저하지 않고 사용했으며, 이를 응용하여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그를 통해 조선만의 새로운 화풍인 이른바 ‘조선남종화’가 태어난 것이다. 이는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창안해낸 것과 같은 것으로, 즉 실경산수화 분야에서는 정선이 우리의 산천을 대상으로 우리의 미감이 반영된 고유색 짙은 진경산수화풍을 만들어냈다면, 정통 산수화 분야에서는 심사정이 우리의 정서와 미감이 반영된 조선남종화풍을 만들어낸 것이다.
산수화는 물론 화조화와 도석인물화까지
모든 그림에 능했던, 나라 안 제일의 화가
어려서 겸재 정선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기도 한 심사정은 정신을 숭상한 나라 안 제일의 화가로, 유일하게 정선과 비교되고 때론 정선보다 높게 평가되었던 화가이다. 정통 산수화를 많이 그렸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화훼(花卉)와 초충(草蟲)을 비롯한 화조화로도 유명했으며, 도석인물화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강세황이 그를 가리켜 “그림에 있어서 못하는 것이 없지만 화훼와 초충을 가장 잘하였다”고 평할 만큼 심사정의 화조화는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청대의 새로운 화조화풍을 수용하여 맑은 담채를 사용한 섬세하고 아름다운 화조화를 많이 그려 조선 후기 화조화의 유행을 선도했다. 이는 조선 전기 이래로 이어지던 수묵화조화 전통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화조화를 별로 그리지 않던 직업화가들까지 적극 참여하게 되어 화조화의 일대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심사정은 도석인물화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화가이다. 18세기에는 사회적·경제적 안정과 발전에 힘입어 다양한 용도의 도석인물화가 제작되었는데, 종교화의 성격보다는 장식용이나 기복용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사정은 당시에 인기가 많았던 수노인과 박쥐, 사슴, 유해섬, 달마대사 등 복과 부귀, 장수를 상징하는 인물화를 지두화로 그리거나 독특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심사정의 인물화는 윤덕희와 더불어 직업화가들이 소홀히 했던 18세기 전반 도석인물화를 이끌었으며, 김명국의 도석인물화 전통을 김홍도에게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다.
후대에도 이어진 심사정의 예술 세계,
작품을 통해 느끼는 한국 회화사에 자리 잡은 심사정의 깊은 존재감
후대에 끼친 영향이 커서 한 화가의 양식이나 기법을 따르는 일단의 무리나 현상을 보통 ‘○○파’라고 명명하는데, 그렇다면 심사정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심사정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특히 화조화의 경우 심사정이 사용한 조선 중기 전통 양식과 청대 화조화와 화보를 통해 얻은 참신한 화조화 양식은 조선 후기 화조화의 흐름을 주도했으며, 새로운 경지의 화조화를 개척했다. 당시에 심사정을 ‘국중제일’國中第一의 화가로 평가한 것은 이러한 그의 회화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심사정파’라는 용어는 아직 학계에서 널리 사용되거나 정립된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화가들 중에는 조선 중기 절파화풍과 남종화풍 등 서로 상이한 두 가지 이상의 화풍들을 소화하여 절충적 성격의 화풍을 보이는 한 부류의 화가들이 있었고, 이러한 화풍을 처음 이룩한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심사정이었다. 심사정의 화풍은 정선 못지않게 조선 후기와 말기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은 조선적인 특색이 완연한 하나의 세계를 형성했으므로 이들을 심사정파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심사정의 화풍은 다음 세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문인화가로는 정수영, 홍의영, 박제가, 윤제홍 등에게, 직업화가로는 이인문, 김홍도, 김수규, 이방운, 원명유, 이수민, 이한철, 이유신, 김창수, 김수철 등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들을 ‘심사정파’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심사정의 화풍이 후대의 화가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각 화가의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한국회화사에 자리 잡은 심사정의 깊은 존재감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비로소 만나는 현재 심사정의 큰 자취,
선별된 도판, 생애와 작품을 함께 보는 연보, 그리고 「촉잔도」
앞서 이야기했듯 심사정의 작품은 눈에 익었을지언정 심사정이 어떤 생애를 살았고, 조선미술사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화가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심사정에 관한 책으로는 연구자들을 위한 학술서를 제외하고 일반 독자를 위한 것으로는 『현재 심사정, 조선남종화의 탄생』이 최초의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 주제이기도 한 심사정이라는 화가를 일반인들에게 좀더 가깝고 자세하게 소개하기 위하여 심사정에 관한 온갖 자료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300여 점의 작품 가운데 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수많은 그림을 책에 실었다. 또한 각 페이지마다의 세심한 도판 배치를 통해 당대, 후대의 화가들 작품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다른 화가들과의 변별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독자들은 심사정 개인의 삶만이 아닌, 우리 조선미술사에 드리워진 현재 심사정의 큰 자취를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말미에는 한 사람의 생애를 다룬 책이 그러하듯 심사정의 주요 연보가 실려 있는데, 이 책에는 심사정의 생애와 한국 미술사의 주요 사건, 그리고 여기에 연도별 심사정의 작품이 함께 배치되어 있다. 이는 기록의 부재로 인한 심사정 생애의 빈 곳을 작품이 대신 말해주는 것으로써, 그가 기록보다는 오로지 그림으로 스스로를 말하는 화가임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은 또한 독자들을 위한 각별한 선물을 담고 있다. 조선 최초의 산수장권이라 꼽히는 「촉잔도」는 가로 길이가 8미터를 넘는 대작이다. 서울 DDP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공개되어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낸 이 그림은 그러나 그동안 거의 공개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크기로 인해 제대로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 책에는 실제 사이즈의 약 1/10로 축소한 「촉잔도」를 별도로 제작하여 넣음으로써 그 그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했고, 거기에 그림에서 중요한 부분을 확대하여 다시 배치함으로써 「촉잔도」의 깊은 아름다움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특히 약 150년의 시간차를 두고, 후대에 붙은 맨 처음과 끝의 발문은 「촉잔도」를 바라보는 마음을 한결 애틋하게 한다.
지은이 ㅣ 이예성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한국미술사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심사정에 관한 국내의 대표적인 연구자로 꼽히며 여러 대학 및 문화 관련 기관 등에서 한국미술사에 관하여 강의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현재 심사정 연구』(2000),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2005, 공저), 『조선왕실의 미술문화』(2005, 공저), 『한국의 미술가』(2006, 공저) 등이 있다.
목 차
<테마한국문화사>를 펴내며
*오로지 화가였던 사람, 조선남종화를 탄생시키다 | 저자의 말
1. 외로운 삶이 이끈 화가로서의 한평생
불우했으나 뛰어난 화가로 살다 | 태어날 때 이미 죄인의 자손 | 스스로 깨쳐 그림을 그리다 | 역적의 자손이라는 멍에를 지고 | 되돌아갈 수 없는 사대부의 삶 |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리다
2. 화풍을 배우고 익혀 자신만의 것을 이루다
절파화풍과 남종화풍, 심사정 화풍의 큰 줄기가 되다 | 절파화풍, 집안에서 전해 내려온 화풍 | 어린 시절,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우다 | 중국의 화보를 통해 익힌 남종화 | 역적의 손자, 그 한계 속에서 나눈 사람들과의 교류 |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내다
3. 산수화, 심사정 그림의 진수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담아 그린 산수화 | 왕유에서 심주까지, 그림의 원류를 탐구하다 | 중국 남종화를 조선남종화로 | 금강산, 생애 최초의 여행을 화폭에 담다 | 세상의 잣대로부터 자유로워지다 | 「촉잔도」, 인생 만년의 걸작
4. 화조화,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담다
“현재는 그림에 있어서 화훼와 초충을 제일 잘하였다” | 돌과 풀, 꽃과 곤충을 맑고 담백하게 | 한폭에 어우러진 꽃과 새, 단아하게 또는 호방하게 | 사군자, 수묵으로 베풀어낸 선禪의 세상
5. 인물화의 변화를 이끌다
그를 통해 이어진 도석인물화의 맥 | 달마의 내면까지 담아낸 현재의 달마도 | 신선도에 펼쳐진 다양한 기법과 개성적인 인물들
6. 오로지 화가였던 사람
옛사람의 정신을 본받아 이룬 그만의 예술세계 | 평생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었던 사람, 그림 속에 스스로를 담다 | 지두화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다 | 화업의 인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촉잔도」
7. 국중제일國中第一 의 화가
“귀신도 감동시킬 정도의 경지” | 당대를 넘어 후대로 이어진 현재의 자취
*그림으로 절망을 견디는 한가닥 빛을 삼다| 책을 마치며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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