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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술기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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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구기호609.1105/이16ㄴ
  • 저자명이구열 지음
  • 출판사돌베개
  • 출판년도2014년 12월
  • ISBN9788971996409
  • 가격14,000원

상세정보

1959년부터 1973년까지 약 15년여 동안 신문사의 미술기자로 일한 이구열의 일종의 자전적 기록이다. 신출내기 기자 시절부터 기자 생활을 떠나 한국근대미술연구소의 문을 열 때까지의 푸른 청춘의 때는 물론, 그와 더불어 흘러간 우리 문화계와 미술계의 풍경을 한 권에 담아냈다. 이승만 동상을 둘러싸고 일어난 씁쓸한 현상부터, 대한미술협회, 현대미술가연합, 한국미술협회 등 이름을 넘나들며 미술인들이 그때 그 격동의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까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4.19위령탑 건립에 얽힌 조각가들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서술함으로써 단지 한 개인들의 인생사의 비극을 넘어 혼란기 대한민국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 무명의 존재였던 당시 우리나라 화가들이 거의 최초로 해외로 진출하면서 겪어야 했던 서글픈 해프닝과, 가난한 나라를 고국으로 둔 이들이 거기에 더해 정치적 고난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어떻게 예술적 생을 성취해 나갔는지에 관한 기록은 공식 기록에서 만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새로운 단면을 만나게 해준다. 기자로 보낸 15년, 근대미술연구자로 보낸 40여 년. 그는 여전히 현역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록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이자 우리가 그의 기록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책 소 개

“오늘날 우리 근현대 미술 연구자들이 기술하는 수많은 기록은 
기자 이구열의 ‘발품’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_김복기(아트인컬처 대표)

1959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 최초의 미술기자 이구열이 기록한 보람의 나날들, 
그와 더불어 되살아난 우리 문화예술계의 옛풍경들 

오늘날 주요 언론사에는 부서별로 기자들이 각자의 맡은 분야가 따로 있고, 나아가 전문기자의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이다. 그러나 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언론계는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기자의 필요성까지는 대부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한 미술학도가 있었다. 그는 시대의 상황과 현실의 생활고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붓을 접어야 했고, 우연한 기회로 언론사에서 일하게 되면서 붓 대신 펜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못다 이룬 미술가의 꿈 대신 미술전문기자가 되겠노라 다짐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나의 미술기자 시절-한국 최초의 미술기자 이구열의 취재 노트』는 1959년부터 1973년까지 약 15년여 동안 신문사의 미술기자로 일한 이구열의 일종의 자전적 기록이다. 
1932년생으로 팔순을 훌쩍 넘긴 저자 이구열은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그러니까 칠순을 앞둔 어느날 문득,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시간이자 더할 수 없는 열정으로 일했던 기자 시절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펜 대신 컴퓨터 자판을 새로 익히면서 한 글자 한 글자 독수리 타법으로 지난 시절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 속에 아주 오래전, 신출내기 기자 시절부터 기자 생활을 떠나 한국근대미술연구소의 문을 열 때까지의 푸른 청춘의 때는 물론이요, 그와 더불어 흘러간 우리 문화계와 미술계의 풍경을 더불어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언론계에 입문을 했고, 어떤 마음으로 기자직에 임했는지에 관해 담담한 톤으로 지난 시절을 회상한다. 그러나 그가 보낸 시절은 개인의 시절임과 동시에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기에 그가 남긴 기록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당연히 그의 개인사에 멈추지 않는다. 4*19와 5*16을 거치며 온나라가 격동의 시절을 보낼 무렵, 그는 막 신문사에 입사한 신출내기 기자로서 미술전시회를 열심히 취재하며 시절의 파고를 함께 넘는 미술계의 현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때문에 그의 기록에는 이승만 동상을 둘러싸고 일어난 씁쓸한 현상부터, 대한미술협회*현대미술가연합*한국미술협회 등 이름을 넘나들며 미술인들이 그때 그 격동의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까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4*19위령탑 건립에 얽힌 조각가들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서술함으로써 단지 한 개인들의 인생사의 비극을 넘어 혼란기 대한민국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예술인들의 최대 영예로 인정 받는 ‘국전’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저절로 일어난다. 
아울러 국제적으로 무명의 존재였던 당시 우리나라 화가들이 거의 최초로 해외로 진출하면서 겪어야 했던 서글픈 해프닝과, 가난한 나라를 고국으로 둔 이들이 거기에 더해 정치적 고난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어떻게 예술적 생을 성취해 나갔는지에 관한 기록은 공식 기록에서 만날 수 없는 예술가들의 새로운 단면을 만나게 해준다. 이러한 기록의 행간 속에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된 김흥수, 김환기, 박서보, 이응노, 백남준, 윤이상 그리고 박수근 등의 한때를 만나는 것도 의미 있다. 

기자로, 기록자로, 연구자로 
한국미술사의 한 시대를 맡았던 기자 이구열

신문 지면에 이구열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59년 신조형파 제3회전에 관한 관람평이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기사 뒤에 늘 ‘거북 구(龜)’ 자를 이니셜 삼아 적어넣었고, 그로 인해 문화예술계 인사들로부터 ‘거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기자 생활을 시작하던 1959년은 공교롭게도 한국미술의 ‘현대’의 기점과 맞물려 있다. 전쟁을 치른 뒤 많은 예술가들이 전쟁의 상흔을 딛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변혁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언론계에 입문하기 훨씬 이전부터 국내외 문화계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이구열이 새로운 미술계 동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서울 시내 안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전시장을 직접 다니기 시작했고, 지면이 허락하는 한 가급적 많은 전시의 단평과 시평 보도를 게재했다. 그는 또한 꾸준히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신문과 잡지, 단행본 등을 탐독하며 국제적인 예술계의 동향을 국내 독자들에게 알리는 데도 누구보다 열의를 보였다. 지금처럼 온갖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는 미군 부대 도서실에서 흘러나온 잡다한 영문 잡지, 노변 판매장, 일본 서적 전문점 등을 다니며 그 나름의 지식을 쌓았고, 그때만 해도 독자들의 눈에 낯설었을 세계적인 ‘첨단예술’의 동향을 연재 기사로 기획, 게재하기도 했다. 
그렇게 국내외의 미술계와 문화계 전반의 현상과 사실에 깊은 관심을 가진 그가 기사를 쓰는 것에서 나아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기록’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19세기 개화기 이후 우리 나름의 근대적 미술계의 움직임 또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는 자료나 조사 기록 등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몹시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 안타까움은 푸념으로만 그치지 않고 직접 추적해보자는 의욕을 불태우게 했다. 그는 확보할 수 있는 옛 신문들의 창간호부터 열독을 해나가기 시작, 『한성순보』『동아일보』『매일신보』『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만세보』『대한민보』 등을 대부분 구해 읽었고, 그 신문 속에 등장하는 문화예술계 관련 기록들을 일일이 노트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노트는 훗날 그의 이름으로 펴낸 여러 권의 저서로 거듭났고, 이후 근대미술 연구자로서 그의 활동에 밑바탕이 되어 주었으며 나아가 우리 근현대 미술사 연구의 귀한 근간이 되어주고 있다. 
그는 기록을 정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신문기사 외에 새로운 기록을 생산하는 데도 앞장 섰다. 미술계를 위한 전문 잡지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으로 편집 계획에서부터 디자인, 교정, 제작까지 오직 혼자의 힘으로 꾸린 미니 잡지『미술』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기도 하고, 이당 김은호 선생의 일대기와 함께 우리의 근대전통화단사를 정리한 『화단일경』, 앞서 언급한 수많은 노트와 기록을 모은『한국근대미술산고』, 나혜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등은 물론 우리 문화재와 관련한 100회 연재 기사를 모아 펴낸 『한국문화재비화』(『한국문화재수난사』로 개정, 출간) 등 여러 권의 유의미한 단행본을 꾸준히 펴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신문사에 재직하면서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기획전시인 ‘한국근대미술60년전’ 등의 기획에도 관여했는데, 이 전시 이후 우리 근대미술은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 민간 화랑이 경쟁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중섭, 이인성 등의 유작전이 대대적으로 열렸다. 이 전시들에 이구열이 참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또한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한 ‘동양화6대가전’ 등의 전시를 기획, 총괄 진행하기도 했다. 기자를 그만 둔 이후에는 근대미술연구소를 직접 열고 한국 근대미술 관련 다양한 연구와 기록물 발행을 출간해왔다. 

팔순의 미술기자가 한 권의 책으로 건넨 
자신의 직업과 인생에 관한 애정의 고백이자 자부심의 토로

칠순 무렵 시작한 이 기록은 약 1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저자 이구열은 기록을 정리하며 마치 옛 시절로 돌아가 두 번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척박한 사회 현실 속에 안주하거나 한계 안으로 몸을 피하지 않았고, 항상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기자였다. 

그가 기자로 보낸 시절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곤궁했고, 정치적으로는 격변의 나날이었다.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열정과 발품이 전부였다. 그렇게 15년여를 기자로 사는 동안 미술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났고, 온갖 이야기들이 몰려들었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런 시절을 거치며 그는 꾸준히 같은 자리를 지켰고, 자신이 지켰던 ‘땅의 이야기’를 개인의 기억 속에만 보관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 기록 덕분에 우리는 미처 모르고 지나쳤을 우리 미술사의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인터넷과 컴퓨터에 온갖 ‘데이터’가 차고도 넘친다. 그러나 그런 차갑고 정확한 데이터 대신 이구열 기자는 자신이 살아온 시절과 더불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온기가 깊게 배어 있는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여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내민 이 기록은 한 사람의 직업인이 자신의 업에 대해 가졌던 애정의 고백이자 팔십의 인생을 산 한 사람이 자신의 평생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의 토로라 할 수 있다. 

그가 목격하고, 만나고 더불어 시절을 살았던 수많은 화가와 예술가들, 선배와 동료 연구자들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그는 모두 떠난 텅 빈 거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거리는 비어 있지 않고, 1975년 불혹 무렵 시작한 한국근대미술연구소는 여전히 그 문이 열려 있으며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출퇴근 버스를 타고 다니며 오래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기자로 보낸 15년, 근대미술연구자로 보낸 40여 년. 그는 여전히 현역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록이 낡은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 이유이자 우리가 그의 기록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다. 


지은이 ㅣ 이구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이자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소장. 1959년 언론계에 입문한 이래 약 15년, 1975년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연 뒤 약 40년 동안 미술계와 문화재 발굴 현장의 중요한 일들을 꾸준히 기록해온 우리 시대 ‘살아 있는 역사’의 한 사람. 

1932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1959년부터 1973년까지 민국일보사?경향신문사?서울신문사?대한일보사에서 미술기자로 일했고,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본부장, 문화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2001년 11월 1일 설립된 삼성미술관 리움의 ‘한국미술기록보존소’는 그가 기증한 약 4만여 건의 책과 자료를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불혹 不惑 무렵에 시작한 한국근대미술연구소는 팔순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그 문이 열려 있다. 

[주요 저서] 
『화단일경 ? 이당 선생의 생애와 예술』(1968, 동양출판사) 『한국근대미술산고』(1972, 을유문화사)『한국문화재비화』(1973, 한국미술출판사, 이후 『한국문화재수난사』로 개정)『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영욕의 생애』 (1974, 동화출판공사) 『근대한국미술의 전개』(1982, 열화당) 『근대한국화의 흐름』(1983, 미진사) 『근대한국미술사의 연구』(1992, 미진사) 『한국문화재수난사』(1996, 2013개정, 돌베개) 『북한미술 50년 ? 작품으로 만나는 주체미술』(2001, 돌베개)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 한국 근대미술사학의 개척자 이구열의 화단 비화』(2005, 돌베개) 『나혜석 ? 그녀, 불꽃같은 생애를 그리다』(2011, 서해문집) 

[주요 관련 발행물] 
『한국미술전집』 전15권 기획 편집 총괄(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의 근대미술』 1~5호(1975~1977, 한국근대미술연구소) ‘근대한국미술선1’ 『이중섭』(1976, 한국근대미술연구소 편, 이구열 집필, 효문사) 화집 『이당 김은호』(1978, 한국근대미술연구소 편, 국제문화사) 화집 『김흥수 화집』(1979, 국립현대미술관) 『세계의 명화』전3권 기획 편집 총괄(1978, 삼성출판사) 『한국의 근대미술 자료집』 제1집(1981, 한국근대미술연구소) 『국전30년』(1981, 한국근대미술연구소 편, 수문서관) 화집 『최영림』(1985, 한국근대미술연구소 편, 수문서관) 『한국근대회화선집』 전27권 기획 편집 총괄(1986~1990, 금성출판사) 『근대한국미술논총 ? 이구열 선생 회갑기념논문집』(1992, 학고재) 『한국근대미술사학 15집 ? 이구열 선생 한국근대미술연구소 30주년 기념논총』(2005)


목 차

*책을 펴내며|지난날 그 시절을 다시 걷는 기분으로

신문에 실린 첫 미술전 단평
『민국일보』에서 처음 미술기자가 되다 
4ㆍ19혁명과 5ㆍ16군사정변, 변화한 미술계
4ㆍ19위령탑에 얽힌 비화
이승만 동상의 수난
격동기의 미술계 한복판에서
파리에 갔던 화가들, 새 작품의 국제성
세계 첨단예술의 동향을 연재 기사로
이응노와 윤이상 그리고 백남준
미술전문기자로 이끌어 준 만남들
근대한국미술사 조사와 기록
‘국전여화’ 연재 기사
박수근의 국전 낙선, 그 고통을 지켜보다
글ㆍ그림의 여름철 기획기사, ‘관동 스케치 ’ 
혼자, 미니 잡지 『미술』 간행 
첫 저작, 이당 김은호 평전 『화단일경』 
두 번째 저작, 『한국근대미술산고』 
숙원의 국립현대미술관 발족, 첫 기획전 ‘한국근대미술60년전’ 
나의 사회적 스승, 청명 임창순 선생
오사카 만국박람회, 타이베이고궁박물원 취재
‘동양화 6대가전’ 기획, 진행
세 번째 저작, 『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다
네 번째 책, 『한국문화재비화』- 30년 전에 쓴 『한국문화재비화』의 구실
기자 생활 마감, 새로운 출발 - 나와 『대한일보』, 그날 ‘분노의 대자보’ 

덧붙이는 글
미술기자 15년, 기사 목록 나의 회고 나의 사설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추천의 글 
나의 멘토, 미술기자 이구열_김복기(아트인컬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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