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2014년까지 연속간행물과 전시 서문으로 실렸던 저자의 글들은 이렇게나뉘었다. ‘경제의 미술들’, ‘미술의 경제들’,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정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다분히 미술과는 멀어 보이지만 기어코 같이 이야기될 수 밖에 없는 미술의 정치와 경제를 읽어볼 수 있다.
책소개
예술은 경제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
제1부 <경제의 미술들>에서는 ‘아름다운’ 그 시각적 욕망과 그에 수반하는 경제에 주목한다. 선진 경제에서 욕구는 사회생활 수준에 따라 매우 상대적이지만 욕구가 다양한 가치와 담론을 반영한다면 미래의 미학으로서 ‘복지미학’을 그려보는 것 또한 확장하는 컨템퍼러리 아트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서술한다. 새로운 것, 다양성에 대한 열망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만 새로운 시선의 필요성을 제시하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층위에서 정치는 경제를 규정하고 새로운 정치권력은 망각의 유혹에 쉽게 사로잡힌다. 지금의 구조를 지탱하는 정치·경제의 연계성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경제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 문화는 경제적 상품인가. 문화 부가가치는 경제의 핵심인가. 시장경제는 현대미술의 성장을 격려하는가 혹은 방해하는가. 시장의 수요와 공급 법칙은 크리에이티비티의 발현에 긍적적일까 부정적일까.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기 위하여 공자와 플라톤이 구상한 국가와 정치에서 미학이 놓이던 자리가 지금은 시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미술과 경제에 대한 새로운 구성 주체가 절실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미학화 혹은 예술적 변용으로서 창조경제에 대한 감상적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기보다는 시장 시스템을 포함한 경제에 대한 문명적 영향력에 대하여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동시대 미술이 경제를 창조적으로 다시 말해서 상상력을 통해 살펴보는 의미일 것이다. 혹은 예술로서 현대미술에 대한 검토 뿐 아니라 ‘창조경제’를 논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미학도시, 다양한 삶의 경제를 미술의 경제로 살려내려는 새로운 ‘살림살이’
제2부 <미술의 경제들>에서는 국립‘근대미술관’의 설립 근거를 제시하며 국립기관으로서 미술관은 현재 유통되고 있는 현상에 대한 매력보다는 역사성에 더욱 관심과 주목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누구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시대미술로서 현대미술에 대한 관심은 아주 강력하다. 거의 대중문화 혹은 연예산업과 비슷하다. 마치 모든 미술에 대한 기준이 된 듯이 보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연구와 참여는 국립기관으로서 미술관이 담당하기보다는 다른 방식을 통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미술관은 박물관의 꽃이다. 미술의 집은 미술관이다. 그런데 박물관으로서 미술관은 수집, 보존, 분류, 그리고 그에 따른 연구와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까닭에 근대미술에 대한 미술관이 타당하며 동시대적인 현대미술에 대해서도 별도의 ‘유통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적 모더니티에 따르는 근대미술의 길은 자율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역사성을 배재해서도 안 된다. 이를 무시할 경우 전시기획은 자칫 다른 방식의 검열일 수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미술관은 미술의 집이다. 이에 전시기획은 그 집의 중요한 살림/살이로 자리한다. 우리 미술의 살림/살이를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하면서 자율성을 강변하는 것은 글로벌도 아니고 동시대적이지도 않다.
저자는 그 다양한 양태 속에서 작동하는 경제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일방적이고 단독적인 경제 체제는 있을 수 없다. 미술의 경제도 경제의 한 형태이다. 특이한 상품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연결망이 미술의 경제이다. 다원적이고 다면적인 모색은 다양한 삶의 경제를 미술의 경제로 살려내려는 새로운 ‘살림살이’의 방식으로 채택될 수 있다. 이에 기반한 미학 도시는 우리 삶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에이전트는 자연과 디자인 그리고 현대미술이라고 여겨진다. 문화는 도시를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거기가 우리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가로질러 가는 곳이고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터인 것이다.
문화의 차원과 미적 차원 그리고 미술의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제3부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에서는 미술은 정치적일 수 있는가. 혹은 미술은 정치를 사유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미술은 정치와 가변성에서 동일하지만 권력에서 언론과는 다른 계층에 속한다. 특히 대중매체로서 언론은 자체 이중적인 속성을 갖는다. 행복에 대한 갈망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없는 미학은 위험에 빠진다. 권력으로서 미술은 모든 사회활동과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미술비평은 과학인척 하지 말고 일종의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 과학적 분석 방법보다는 글쓰기를 중시하는 미술비평의 임무는 문화적 타자의 사유체계와 삶의 방식을 자신이 속한 문화체제 내에서 이해 가능하도록 번역해내야 한다. 읽히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시대성과 영원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지금 읽히지 않는 것이 영원히 잠드는 것은 아니다. 수면의 글은 다시 깨어나면 말을 한다. 글쓰기로서 미술비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쓰기가 필요한 것이다. 글로벌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현대미술의 영역을 항상 염두에 두고 거기에 대응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 중요성이 요청된다. 익숙한 현재의 현대미술과 낯선 전통적 현대미술 사이에서 비평은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다. 휴지(休止)는 준비이자 분석이다. 몸을 굽히고 신발 끈을 조이고는 뚜벅뚜벅 그 숲으로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감상적이면 안 되나
제4부 <정치적이고 형이상학적인>에서는 전시의 경제와 읽기의 변론, 미술의 미래 그 정치적 실현성을 기술한다. 미술은 이 땅에서 심각하고 진지한 사유의 대상이었던 적이 별로 없다.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은 현재 일종의 패션, 트렌드 그리고 문화적/실제적 자산으로 여겨진다. 대중문화이면서 새로운 경제의 방식이다. 여기에는 예술로서 미술은 없다. 현대미술은 미술로서 정치와 경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된 것에 환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 참된 정치는 없으며 현실은 그 그림자가 아니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하나의 사건으로서 그것들과 등급을 같이 한다.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재)구성하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작업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중이다. 저자는 그 모색을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재)구성하기에서 출발해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미술비평의 대상 혹은 목적이 전시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떻게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겨우 익힌 실력으로 세상을 보면 그렇게 보여준 사람들에 의하여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읽기와 보기의 스며들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사유를 증진시킨다. 세상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고 감사할 수 있다. 일종의 세계관이며 동시에 세계감이다.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감각이다. 이러한 태도는 전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물론 그 세계는 구성되어지고 구축되는 사건이지만 나름의 실체임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우연’ 또한 전시를 이루는 성질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현대미술에서 전시가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까닭이다.
미술의 욕망을 창조하는 평론가의 발견
철학적 사유와 다의적 고찰로 예술을 항해하는 미술비평의 혁명
“사고(思考) 없는 말들은 사고(事故)를 내기 마련이다. 반면에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그냥 자기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들은 ‘전체주의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읽기이다.”- 본문 중에서
지은이 | 김병수
그는 ‘서가(書架)의 아내’다. 켜켜이 견고한 구조로 장서를 돌보거나 남다른 직관력으로 미지의 동경과 색의 자유를 기술한다. 미의 언어가 사라지거나 미학의 도시가 실재하기까지 그 페이지는 쉼이 없다. 자본의 세태가 뒤바뀌고 경제와 기술이 혼용과 도약을 반복하는 도시에서, 예술과 철학은 때로는 은둔하거나 은밀한 욕망으로 그를 사로잡았다. 실존에서 시작된 어디인가의 물음, 왜 그것은 없지 않고 있는가, 시시각각 사라지거나 만들어지는 시공의 이름들. 그 지배적 불안정함은 예술의 스펙트럼을 생성하며 단호한 언어로 재탄생한다. 그가 축조한 비평의 건축은 주의 깊다. 가벼이 넘기지 않는 페이지에 낯선 아름다움과 용해된 상상을 집적한다. 아주 오래전 시를 노래하던 소년은 미술의 몸짓을 헤아린다. 맹목적 욕망이 수줍게 감춰지면 침묵을 읽은 타자가 낮잠을 깨운다. 그 빛이 어디선가 당신을 부를 때, 다채로운 사유가 비평에 결합하는, 매개의 세계, 환희 그 순간, 저자는 예술의 집을 짓는다.
김병수는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진학하여 석사를 거쳐 박사를 수료했다. 철학에서 비롯하여 미학, 형이상학, 문화인류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각적 시선을 기반으로 1991년 동양그룹이 운영하던 서남미술관 큐레이터로 공채 선발되어 미술계에 입문, 1997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신인미술평론상>에 당선되며 비평의 싹을 틔운다. 그의 관심분야는 미술, 영화, 문학, 경제, 정치, 건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풍부한 미학적 관점과 예술적 발상을 정립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2012년 17회 <월간미술대상(학술·평론)> 대상을 수상하며 그 사유의 집약이 높이 평가됐다. 그의 20여 년 동안 지속된 미술평론가로서의 본유적 실천은 미술비평의 학제적 연구에 현재까지 기여하고 있다. 저자는 홍익대, 목원대대학원, 안동대, 동국대, 경희대, 수원대대학원, 대구가톨릭대대학원, 경기대 미술디자인대학원 등에서 미학과 미술사학 그리고 현대예술론 등을 강의했으며, 현재 목원대대학원 기독교미술과에서 강의 중이다. 다수의 전시기획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했고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국제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기획위원, 『미술과비평』 편집주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심의위원, 미술문화학회 총무이사, 『미술·문화·이론』 편집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평론집『하이퍼리얼』, 『트랜스리얼』이 있으며 그 외에 『열린 미학의 지평』, 『한국현대미술가 100인』, 『21세기 한국의 작가 21인』, 『공공미술, 마을이 미술이다』(이상 공저) 등 다수의 평론을 발표했다.
목차
화보
서문
1. 경제의 미술들
'복지미학'은 가능한가
경제는 창조적일 수 있는가
미술과 경제
현대미술의 미학적 에토스
현대미술: 경제신학 vs. 경제인류학 사이에서
'창조경제'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히스테리와 환각적인 하이퍼리얼
2. 미술의 경제들
국립 '근대미술'관이 필요하다!
미술의 살림/살이로서 전시기획
미술사학: 시공간적 모더니티의 경제
미술의 경제와 미술품 감정
회화의 근대 경제: 오일 페인팅의 기초 존재론
예술과 자연: 끝나지 않은 오디세이
우리는 경제를 다르게 사유할 수 있을까
설치미술이 공공미술이 되었을 때
3.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겸손이 보여주는 아름다움들
글쓰기로서 미술비평
한국현대미술은 가능한가
숯, 시간의 계열을 가로지르다
어디나 혹은 아무데도
미술은 전시가 필요한가
4. 정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리모트컨트롤을 누가 쥐고 있나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재)구성하기
수화미학이란 무엇인가
전시의 경제: 정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우리는 감상적이면 안 되나
읽기의 혁명, 혁명의 읽기
비평은 가공무역인가
미술의 미래: 한국미술의 제너레이션 갭
본문 원전
FAMILY SITE
copyright © 2012 KIM DALJIN ART RESEARCH AND CONSULTING. All Rights reserved
이 페이지는 서울아트가이드에서 제공됩니다. This page provided by Seoul Art Guide.
다음 브라우져 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This page optimized for these browsers. over IE 8, Chrome, FireFox,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