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곡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였으며, 일제 강점기였던 1918년 서화협회를 만들어 미술전람회인 서화협회전을 시작했다. 여기서 나온 서화협회보는 최초의 미술잡지로, 그는 우리나라 미술잡지역사에서 첫 편집자라고도 할 수 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미술협회 초대회장으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를 열었으며 대한민국예술원장, 민주당 참의원 등을 지냈다.
평전은 5부로 나뉘었는데, 1부에서는 그의 일본 유학 시절과 우리나라 학교의 일반 수업 외 첫 특별 활동 미술실로 기록되는 도화 교실 이야기. 간송 전형필과의 만남과 서화협회ㆍ협회전ㆍ협회보에 관한 내용 등 그 자체로 근현대미술의 역사인 고희동의 일생을 보여주며, 2부에서는 1949년 '민간 친선사절단'으로 미국 방문을 세세히 기록한 여행기 '미주별견기'를 풀어 적었다. 3-5부에서는 문화재이며 전시공간으로 재탄생한 고희동 가옥과 회고하는 글, 연보와 참고자료를 담았다.
이 책은 1965년 향년 80세를 일기로 작고한 춘곡 고희동 사후 50주기를 추모하며 외손녀이자 소설가ㆍ미술 전시 기획자인 저자가 썼다. 저자는 소설로 적을까도 고민했지만, 객관성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에, 1년여간 수집한 관련 논문ㆍ평론ㆍ기사 등을 기본으로 한 평전으로 엮고자 했다. 행적마다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는 그를, 저자는 단순히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만으로 기억하기엔 아쉬운 한국미술계의 터를 다진 미술행정가였다고 강조하며 이 책을 통해 그를 연구하는 후학과 재평가하는 글들이 많아지길 고대한다.
책소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의 사후 50주기를 맞아 그의 외손녀 소설가 최일옥이 외조부의 평전(評傳)을 엮었다.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그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양화를 도입한 분이며, 일제 강점기인 1918년 서화협회를 창설하고, 우리 작가들을 위한 최초의 미술전람회인 《서화협회전》을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서둘러 《선전》을 개최하여 《협전》을 압박했다. 그러나 춘곡은 총독부의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협전》을 19회나 이어갔다. 광복 후에는 이를 발전시켜 대한미술협회를 만들고, 《국전》으로 발전시키며 화가들의 지평을 넓혀갔다. 또한 예술원 종신(終身) 회원으로 초대 예술원장(藝術院長)을 지냈으며, 사후(死後)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예술원 장(藝術院 葬)을 치르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며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행정가이다.
춘곡을 외조부로 둔 작가 최일옥은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한 권을 쓰리라 시도했다. 그러나 소설가는 허구(虛構)의 주인공을 창조하고, 그 주변 인물들로 이야기를 엮어간다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작가 최일옥은 핏줄로 이어진 선대(先代) 어른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엮을 때에는 그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적잖이 어렵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소설에는 일단 스토리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태어나 조선의 멸망을 몸소 겪고, 20세기 중반에 돌아가신 그분의 인생 역정을 사실에 근거하여 들려줄 윗대의 어른이 단 한 분도 살아계시지 않고, 최일옥이 기억하는 모든 일들이 6.25 이후이고 보면 더더욱 그 분을 객관적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자손 하나 있으면서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다면 그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의지로 논문 및 평론과 옛날 신문 기사 등, 도서관을 뒤지어 수많은 자료를 찾아 평전(評傳)으로 엮었다. 최일옥은 돌아가시던 날의 일이며, 문화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집결하여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예술원 장(藝術院 葬)을 치르던 일을 기억한다. 흐느끼듯 읽어가던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조사(弔詞),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시(弔詩)를 읽어가던 시인 모윤숙 여사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춘곡은 1949년 문화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미국을 방문한 여행기를 6회에 걸쳐 잡지 『신천지』에 「미주별견기(美洲瞥見記)」를 연재했다. 춘곡의 아버지 고영철(高永喆)이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에 1883년 우리나라의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종사관(從事官) 서광범(徐光範), 삼당상(三堂上)과 함께 영어 통역관으로 미국을 방문한지 67년 만에 춘곡이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다. 최일옥은 춘곡이 당시 재미동포와의 만찬에서 아버지 고영철을 생각하며 한 말 “자승어부(子勝於父)면 기부희지(其父喜之)라, 즉 자식이 아버지를 능가하면 그 아버지는 응당 지하에서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상기하며 할아버지의 평전을 쓰는 시간은 자손(子孫)된 도리가 무엇인지 새삼 깨닫는 숙연한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최일옥은 할아버지의 명복을 빌며 머리 숙여 이 책을 세상에 내어 놓으며 감출 수 없는 욕심 하나를 다음과 같이 조심스레 피력한다.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만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춘곡이 우리나라 화단을 위해 일구어 놓은 업적은 지대하다. 역사라는 디딤돌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는 현재도 미래도 공고할 수가 없다. 춘곡을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하는 후학(後學)이 더욱 많아져 그를 올바로 평가하는 논문과 글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누군가 춘곡, 고희동을 일러 “살아서는 고전(古典), 죽어서는 역사(歷史)”라 말했다. 작가 최일옥의 바람처럼 이 평전이 ‘고전이며 역사’였던 한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과 그를 올바로 평가하는 논문과 글들이 많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은이 | 최일옥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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