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사건과 상황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고희동에 대한 관심이 학문적 관심으로 연장되면서 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저자는, 집요하게 문헌과 신문ㆍ잡지 등 기록물들을 발굴ㆍ선택하고 앞뒤 정황에 맞는 합리적인 설명과 해석을 더해 이 책을 정리했다. 이어 저자는 예술가로서의 인물에 대한 미술사학적 연구는 전기와 역사서를 직조하는 행위여야 한다는 믿음을 실천하고자 노력했으며, 그로 인하여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라는 제한적인 평가를 벗어난 평전을 읽어볼 수 있다. ‘최초의 서양화가’인데 어째서 몇 점 그리지 않은 채 동양화로 돌아섰는지, 서화협회를 창설하여 활발한 미술 활동을 해나간 화가가 정치인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게 되었는지 등의 이야기를 당시의 기록과 더불어 상황과 원인의 관계를 밝히고 공과를 함께 보여준다.
이 책은 역사가옥박물관 고희동 가옥을 운영 중인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과 화백의 외손 최일성 선생의 후원으로 춘곡 고희동 50주기를 맞아 기획되었다.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전시에 이어 그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서적의 필요성이 대두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치열하게 집필한 저자 덕에 고희동의 가계로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시간순으로 그 시대를 함께 한 인물들까지 흔치 않은 자료를 망라하여 우리 근대화단을 편하게 훑어볼 수 있다.
책소개
“이런 일 봤나! 스케취 괴짝을 메고 나가서 뭘 좀 그려볼라니까
담배장사니 엿장사니 놀려댄단 말이야. 그뿐인가.
달기똥을 칠하느니 고약(膏藥)을 바르느니 하고 조롱들을 하는데
어째꺼나 그때 사회는 양화(洋畵)에 대해서 하등의 향응(響應)이 없었어.
그래 그림 그릴 재미도 안 나고 해서 놀았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서양화를 그렸을 때, 이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화구(畫具)가 든 상자를 보고 “그거 엿판 아니오? 엿 좀 주시오.”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고,
캔버스를 들여다보면서 “무슨 연유로 닭똥을 바르고 계시오?” 하고 천진하게 묻는 사람이
옆에 서 있는 듯 생생합니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고희동은 서양화를 도입한 최초의 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춘곡 고희동, 격변기 근대 화단, 한 미술가의 초상
구한말 외세의 침탈로 국운이 기울더니만 마침내 일본에 병탄이 되어 나라를 잃습니다. 이런 격변기에 일본으로 서양 그림 공부를 떠나 서양화를 최초로 도입한 ‘최초의 양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춘곡 고희동입니다. 이 책은 구한말 중인 계급이었던 고희동의 가계(家系)와 고희동 유년의 교육 과정, 대한제국의 관리로 일본으로 서양화를 배우러 유학을 떠난 과정과 그림 수업, 귀국 이후 격변기 근대 화단에서의 활동, 서화협회 창설과 ≪서화협회전≫ 운영, 광복과 6•25 한국전쟁의 혼란 속의 미술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창설, 예술원 창립 등을 미술사 관점에서 최초로 연구하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희동의 출생과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사를 사회적 활동과 교유, 특히 미술계에서의 활동과 교유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가계(家系)와 한성법어학교 수학 시절, 일본 유학에서의 그림 수업 등이 집중적으로 연구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격변기 근대 화단, 온몸으로 역사의 격랑을 헤쳐 나갔던 한 미술인의 초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비파동 고씨 집과 부친 고영철의 영향
고희동은 1886년 음력 3월 11일(양력 4월 13일) 고영철의 4남 중 3남으로 비파동(지금의 관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희동의 집안은 잡과(雜科) 합격의 역관(譯官) 출신자들이 즐비한 이름난 중인 집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부친 고영철은 당대의 문화예술인, 개화사상가들과 교유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중국에 영선사 학도로 다녀왔으며, 대한제국이 미국과 수교한 후에는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을 다녀온 엘리트였습니다. 고영철은 중인 특유의 현실 감각과 역관 직을 통해 습득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들 고희동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고희동의 호 춘곡(春谷)도 부친 고영철이 지어 준 것입니다. 부친 고영철은 육교시사(六橋詩社)의 일원으로 교유를 나눴는데, 이들은 대개가 역관과 의관 집안 출신의 개화사상가들이었습니다. 부친의 이러한 교유는 고희동이 미술가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고희동은 육교시사에 참여한 이들의 자제와 교류를 지속하게 됩니다. 특히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吳世昌(1864~1953)과의 교유가 그렇습니다.
관립 한성법어학교 입학과 미술 입문
고희동은 레미옹(Leopold Remion)이라는 프랑스인을 만나 서양화를 알게 되었고 ,결국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되어 화가의 길을 걸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외세가 밀려들던 시절 외국어 습득은 출세의 지름길이었을 겁니다. 역관 출신의 부친 고영철 역시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겁니다. 부친 고영철은 아들을 보통 소학교로 보내지 않고,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 중의 하나였던 프랑스, 즉 불어를 배우는 관립 한성법어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고희동은 1899년(14세)에 입학해 불어를 배웠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이수합니다. 고희동은 이 학교의 미술 교사로 알려졌던 레미옹이 교장 마르텔(Emile Martel)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보았다고 하고, 바로 이 결정적 순간이 미술가의 길을 걷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관립 한성법어학교의 설립과 운영, 고희동의 수업 내용, 특히 고희동이 미술 수업을 받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림 그리는 관리 고희동, 동경으로 그림 연구 출장
고희동은 1904년 12월 광학국 주사로 관리 생활을 시작합니다. 대한제국 내각 고문이었던 드레와쥬(Conseilles Deleoigue)의 추천에 의해서였습니다. 고희동은 유창한 불어 실력으로 통역과 행정 업무에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1907년 행정 조직 개편으로 고희동은 도화서가 속해 있던 장례원 예식관으로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1908년에는 사립 장훈학교 야학속성과에서 일어를 배우는데, 1909년 2월 15일에 “미술 연구를 위하여 일본국 동경에 출장을 명”하는 궁내부의 칙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고희동은 이미 고종의 얼굴을 그린 어용화사인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 문하에서 서화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가입학’ 형식으로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고희동은 “미술을 연구하는 길은 조금도 모르고 아무런한 초등의 준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석고상을 놓고 화가(畵架)에 목탄지를 낀 까루동을 버티어 놓고 죽죽 썩썩들 그리는데 보기도 처음이요 말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고 수업 첫날을 회고합니다. (111페이지) 고희동은 1915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합니다.
최초의 서양화가였지만 전통 서화가로 신미술 운동 펼쳐
1915년 졸업 무렵 고희동은 서양화 자화상 3점을 남깁니다. 졸업 작품인 「정자관을 쓴 자화상」을 비롯해 「부채를 든 자화상」,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입니다. 그런데 ‘서양화가의 효시’ 고희동은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양화에 서양화를 도입하는 신미술 운동을 펼칩니다. 고희동은 전통과 새로움을 겸비하여 양 영역을 넘나드는 인물, 동양화와 서양화의 양 영역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를 받게 됩니다. 전통 회화와 서양화를 ‘수학受學’하였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런 기대를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1918년 6월 서화협회를 창설에 기여하고, 1936년 ≪서화협회전≫이 끝날 때까지 이를 운영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고희동은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출품하였으며, 동아일보 미술 기자로 창간 작업에 참여하고, 삽화를 그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부친 고영철이 육교시사에서 교유를 나눴던 것처럼 고희동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각종 시사詩社와 시회詩會에 참여하였고, 휘호회에도 빠지지 않았으며, 각종 문화계 사교 모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1920년대 중반 고희동의 교유는 서화첩(書畵帖)을 남긴 ‘한동아집(漢?雅集)’과 ‘산벽시사(珊壁詩社)’로 대변됩니다.
광복 후 미술계와 정치계에서 두각
일제 말기의 친일 논란에서 비켜선 고희동은 광복과 더불어 《해방기념미술전》을 개최하며 미술계의 중심에 섭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일의 서화협회 총무였었다는 직함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고희동은 미술인들의 대표성을 띠는 존재로서 동양화와 서양화 양측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로 평가를 받습니다. 고희동은 언변이나 논리력 그리고 좌중을 휘어잡는 능력이 정치가들 못지않을 정도로 탁월했다고 하는데, 마침내 정치계에 발을 담그고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46년 2월에 귀국한 이승만이 의장, 부의장이 김규식(金奎植), 총리에 김구, 비서국장에 윤치영 그리고 고희동이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사무국장에 선임된 것입니다. 고희동이 민주의원 최고 수뇌부의 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희동은 조선미술협회의 회장 자격으로, 또 미술가들의 대표격으로 문화인들과 정치인들이 함께 구성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발기인이 됩니다. 고희동은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많은 정치적 집회나 행사에서 사회자로 활약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의 비극, 동료 미술인을 부역자로 심의
6•25 한국전쟁 당시, 3개월간의 인민군 치하에서 신음하던 서울이 9월 28일 수복되자, 서울에서는 사적으로 부역자에 대한 보복적 살상과 재산을 빼앗는 일이 비등했습니다. 고희동은 문화인총연합회 이른바 문총의 회장으로 문화인들의 부역자 심사의 주체가 됩니다. 문총에서 원칙을 정한 후에 미술인 부역자 심의위원회를 열었고, 이들 부역자 심의위원회는 서울에 잔류하여 동맹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미술인을 임의로 정한 원칙에 따라 A, B, C로 부역 정도를 구분해 경찰의 조사위원회에 회부하였습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대다수의 미술가들은 반강제적으로 또는 살기 위해서 미술 동맹에 속하게 되었고 김일성 초상화와 포스터, 전단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부역에 나섰다는 혐의를 받은 이들 대부분은 부녀자였거나 부역을 벗어날 힘이 없는 민초들이었습니다. 대부분 힘 있는 이들은 부역에서 벗어나 있었고 심지어 자신의 부역을 감추기 위해 부역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어씌우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결국 부역자라는 낙인은 권력 관계에서 약자의 낙인에 불과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발적인 부역자들은 대개 인민군과 함께 이때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고희동 역시 전쟁으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둘째 손자가 인민군에 끌려가서 죽었고, 미술인 중에서도 “김일성 동무가 남한 사람을 다 용서해도 미술가 가운데 고희동과 장발 두 사람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지시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고희동과 서화협회를 함께했던 김진우는 부역자로 몰려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옥살이를 했던 그 형무소에서입니다. 고희동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다시 무장합니다. 국방부 종군화가단 창설을 주도합니다.
국전을 주도하며, 예술원 창립, 정치가로 변신
전쟁이 끝나고 국전 시대가 열리자 고희동은 미술계의 권력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일제에 친일했던 미술인들을 배격하고, 사회주의적 성향의 미술인들이 모두 북으로 넘어간 자리를 민족 예술이, 반공주의 예술이 차지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고희동이 있었습니다. 1954년 3월 ‘학예술원 선거령’에 따라 선거가 치러져, 고희동은 종신회원이 됩니다. 미술 분과 회원으로는 장발, 이상범, 손재형, 김환기, 윤효중, 배렴이 선출됩니다. 고희동은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서 이승만 정권과의 원만한 협조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독재의 한계를 일찍이 간파하고는 1957년 민주당 창당에 관여하고 고문으로 선임됩니다. 고희동은 조병옥趙炳玉(1894~1960) 박사의 정치 평론집인 『민주주의와 나』 장정을 맡게 되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의 반영이었습니다. 1960년 4월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고희동은 민주당 후보로 선거에 나가 8월에 참의원에 당선됩니다. 문화인이었던 화가가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5•16 군사 쿠데타와 방송계 진출 좌절, 다시 미술인으로
고희동은 참의원에 당선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1월 28일 하나의 허가증을 손에 쥐었습니다. 바로 ‘민간 라디오 방송 허가증’이었습니다. 이 방송 허가증은 지금의 MBC 문화방송의 토대가 됩니다. 고희동이 사위의 말을 듣고 장면 총리에게 청탁을 하여 미리 받아 놓았다고 합니다. 마침 김지태 부산 MBC 대표가 서울에서 방송국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허가를 받지 못하자 고희동을 설득하고, 고희동은 서울 MBC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김지태의 자본과 고희동의 허가권이 합쳐져서 개국한 방송국이 지금의 MBC 문화방송이 됩니다. 고희동은 정치인이자 최초의 민간 방송국 회장으로 변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로 좌초됩니다. 더구나 방송국의 모든 지분이 5•16장학회에 강제 헌납됩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문화방송국은 현재의 정수장학회 소유 지분이 됩니다. 고희동은 다시 화가로 돌아가게 됩니다. 고희동은 대한제국의 관리로 시작하여 화가의 길을 걸었으며, 말년에 정치인, 방송인으로 변신을 꾀했지만 좌초했고, 마침내는 다시 화가로 돌아가 1965년 10월 굴곡진 생을 마감합니다.
춘곡 50주기, 흉상 제막, 특별전 개최, 출간 기념 강연회 열려
지난 10월 22일 오후 5시 ‘고희동 가옥’에서 춘곡 50주기 행사가 유가족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여해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 ≪한국 근대화단의 선봉≫ 전시 오프닝과 관련 연구 도서인 『춘곡 고희동-격변기 근대 화단, 한 미술가의 초상』(조은정 지음), 고희동의 외손인 소설가 최일옥 선생이 쓰신 『춘곡 고희동 평전-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의 헌정도 있었습니다. 조각가 정현 선생(홍익대)이 제작한 ‘고희동 흉상’ 제막식도 있었습니다. 이날 행사와 전시가 열린 고희동 가옥은 춘곡 고희동 선생이 손수 설계하고 몸소 지어서 41년 동안 거주했던 곳으로, 문화유산 보전 단체인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이 훼손 위기에 처했던 가옥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보전하고 전시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전시는 10월 22일부터 12월 27일까지 열리며, 두 차례의 강연회도 있습니다.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년 서울에서 역관 고영철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춘곡(春谷)이다. 관립 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웠고, 1904년 12월에 광학국 주사가 되어 대한제국의 관리가 되었다. 1907년부터 도화서 마지막 화사인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 문하에 나아가 그림을 배웠고, 1909년 2월에 그림 연구 목적으로 동경으로 출장을 갔다. 그해 9월에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선과로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하였다. 「부채를 든 자화상」 등 3점의 서양화를 확인할 수 있는데,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동양화가로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총무, 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오세창, 이기, 최남선, 박한영, 이도영 등과 산벽시사 (珊碧詩社), 한동아집(漢洞雅集) 등의 활동을 하였고, 동양화의 개량화 등 신미술 운동을 주도하였다. 광복 후 대한미술협회, 문화예술인총연합회 등을 이끌었으며, 초대 예술원장,《대한민국미술전람회》심사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0년 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1년 문화방송국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10월 22일 향년 80세로 별세하였으며 장례는 예총장으로 치러졌다.
지은이 | 조은정
1962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시 기획, 출판 기획을 하며 경력을 쌓았으며, ‘조각평론상’과 ‘석남을 기리는 미술이론가상’을 수상하였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국제미디어아트시티, 창원조각비엔날레 등의 운영 위원과 모란미술관 자문 위원을 역임하였고 소마미술관 운영 위원,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이사, 국제미술평론가협회 회원, 한국인물미술사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권력과 미술』, 『한국조각미의 발견』, 『조각감상법』 등 대표적인 저서 외에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 『한국의 미를 말하다』, 『조각가 김세중』, 『김복진의 예술세계』, 『한국현대미술 새로 보기』 등 공저와 「《서화협회전》 운영에 대한 연구」, 「우리에게 프리다 칼로가 의미하는 것」, 「6.25 전쟁기 미술인 조직에 대한 연구」, 「한국전쟁기 북한 미술인의 전쟁 수행 역할에 대한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미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사 속에서의 권력 구조와 미술의 관계를 규명하는 데 관심이 있으며, 역사적인 장소와 미술관, 미술 제도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목차
추천사 │ 김홍남
저자 서문 │ 조은정
1. 비파동 고씨 집
2. 관립 한성법어학교
3. 그림 그리는 관리
4. 동경 유학
5. 최초의 서양화가
6. 원서동 새집
7. 서화협회 시대
8. 마지막 서양화
9. 잔인한 시간
10. 권력의 규칙
작가 연보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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