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을 둘러싼 서구와 일본에서 그래픽 저널리즘이 발달하던 때, 내부사정과 관계없이 조선 정부는 외부로부터 통치자의 초상을 요구받았다. 그러한 이유로 고종의 초상은 전통적인 어진과 별개로 점차 수많은 사진ㆍ삽화ㆍ판화 등의 형태로 제작ㆍ복제ㆍ유통되었다. 조선 왕조 내내 진전에 봉안되어 아무도 볼 수 없던 왕의 초상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이미지가 되었다.
궁궐 밖으로 왕의 이미지가 유포된 조선 최초의 왕이었던 고종은 자신의 이미지에 권위를 담고자 했고, 이미지를 통해 대외적으로 국가와 스스로의 건재를 알리려 했다. 그것을 활용하고 배포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조선은 이미 보는 신문의 효용성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던 일본과 달리 효과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미지 재현의 주체가 되려 했던 고종은 결국 일본에 의해 선전용 이미지로 전락한다. 이처럼 고종의 초상은 대한제국기 전후 서구 열강과 제국 일본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벌였던 힘의 경합이, 정치뿐 아니라 시각 이미지 재현의 층위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은 이러한 맥락을 왕의 초상과 사진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의 시선을 끌어내어 읽어준다.
고종의 초상과 이미지의 정치학이라는 부제의 이 책은 기록이나 유물로 산재해 있던 고종의 이미지들을 모아 제작 경위를 밝히고, 그것을 통해 그 시대의 시각 문화의 일면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2005년 저자의 논문을 기초로 이후 다양한 곳에서 진행된 연구와 전시, 이어 저자가 2011년 일본에서 조사한 메이지 시기의 조선 관련 시각자료 등을 통해 수렴ㆍ보완하여 완성되었다. 숨겨진 왕의 초상으로부터 일본으로 이미지 권력이 넘어가기까지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시각 문화의 유입과 그것으로 인한 변화 과정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다양한 시도를 만난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기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물론 권력을 꿈꾸는 이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지 볼 수 있다. 책소개19세기 말, 조선에 사진이 들어왔다. 아무나 볼 수 없던 왕의 얼굴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이미지가 되었다
조선 시대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왕의 초상은 중요한 국가적 행사로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을 발탁해 그려지긴 했으나 어진御眞으로 불린 그 그림은 진전에 봉안되어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는 했으되 정작 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각종 의례와 공간 등을 통해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할 뿐이었다. 때문에 전통적인 어진은 왕의 초상 그 자체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제도가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것의 기능은 왕조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의미의 유포였다.
19세기 말 아시아에는 서양의 온갖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은 메이지 정부를 세우면서 그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문물의 유입은 조선으로도 이어졌다. 그 가운데 사진이 있었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일본을 방문한 1차 수신사 일행은 그곳에서 사진이라는 것과 만나게 되었다. 김기수를 비롯한 수신사 일행은 직접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일본의 근대 문물이 담긴 사진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들에게 사진은 새롭고 신기한 문물일 뿐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활용할 것인가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서구 열강은 사진을 이용해 원하는 방식으로 통치자의 이미지를 만들어왔고, 일본은 그것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화려한 통치자가 아닌 중산층의 소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근대국가의 통치자로서의 자리를 확보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이미지 재현 방식과는 달랐다. 사진 속 메이지 천황은 아시아인의 왜소한 풍채를 서구인의 것과 유사하게 만들어 서양인들에게 유포함으로써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시에 천황의 사진에 신성성을 부여함으로써 자국의 국민들을 천황의 권위에 복종하는 신민으로 만들었다.
조선의 고종은 권력의 강화를 위해 조선의 전통적인 어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조선을 둘러싼 서구 제국과 일본에서 그래픽 저널리즘이 한창 발달하고 있던 때였다. 1차 수신사 방문 이후 조선의 정부에서 이미지 복제의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이미 조선의 정부는 바깥으로부터 국가 표상으로 삼을 수 있는 통치자의 초상을 요구 받았다. 때문에 고종의 초상은 점차 전통적인 어진과 별개로 수많은 사진, 삽화, 판화 등의 형태로 제작, 복제, 유통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 왕조 내내 진전에 봉안되어 아무도 볼 수 없던 왕의 초상은 이제 누구나 볼 수 있는 이미지가 되었다.
이미지에 왕의 위엄을 담으려 했던 고종, 이미지를 만든 서양인의 눈에 조선의 왕은 어떻게 비쳤을까
1882년 조선은 서구 열강 중 최초로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중국의 속방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서 미국과 대등한 국제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 조약에 조선 정부는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양국간의 친선을 위해 미국으로 보빙사를 보낸 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고종은 1884년 드디어 서양인의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퍼시벌 로웰이었다.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촬영된 최초의 고종 사진은 이렇게 탄생했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제의적 목적이 아닌 일종의 외교적, 정치적 행위로 외국인에게 스스로의 모습을 재현하도록 한 첫 번째 사례인 셈이었다. 로웰의 사진은 최초로 조선의 왕을 촬영한 것이라는 의미 외에도 이후 외국인들이 고종을 촬영하거나 그릴 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이후 고종의 초상은 1894년 청일전쟁 무렵부터 서구의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고, 사진뿐만 아니라 안토니오 지노 쉰들러, 새비지-랜도어, 이사벨라 버드 비숍, 휴벗 보스, 조제프 드 라 네지에르 등에 의해 그림과 삽화 등 다양한 매체로 구현되었고 이렇게 제작된 조선의 왕의 이미지는 다시 또 대중매체는 물론 엽서와 기념품 등으로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카메라와 화폭 앞에 선 고종과 그것을 촬영하거나 그린 이들의 시선의 차이다. 고종은 복장은 물론 어좌와 오봉병의 배치까지 신경을 씀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거나 그리는 서양인들에게 조선의 왕으로서 자신이 갖는 다양한 위엄과 상징의 의미를 전달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들이 주로 선택한 정면상의 포즈는 이미 서구에서는 비문명의 상징이었으며 그들의 눈에 고종은 조선의 왕이기 이전에 조선인의 표준형이었다. 실제로 1899년 고종의 전신상을 그린 휴벗 보스는 자신이 그린 고종의 초상을 1902년 펴낸 『인종의 여러 유형들』에 자바, 인도, 티베트, 일본 등에서 만나고 그린 다양한 종족의 표본과 함께 수록했고, 이러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고종의 캐리커처는 고종이 의도한 위엄과 권위의 상징과는 거리가 멀었다.
19세기말,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과 조선 왕의 이미지
메이지 시대 일본 대중들에게 우키요에와 니시키에로 상징되는 다양한 이미지는 이미 익숙한 매체였다. 일본의 목판화는 그 화려함으로 인해 메이지 시대에 들어오면서 ‘보는 신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임오군란과 청일전쟁 등을 겪으며 일본에서는 이러한 니시키에를 통해 전쟁의 상황을 일본 대중들에게 전파했고, 그 가운데는 <조선평화담판도>, <조선개혁담판도>, <조선정부대개혁도> 등과 같이 조선과 조선 왕의 이미지를 그려넣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조선과 조선의 현실을 이미지를 통해 드러냈고, 그렇게 시각 매체를 통해 드러난 조선의 이미지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종은 유약하며 명성왕후는 교활하고, 조선의 정부는 종말을 앞두고 있다는 등의 문맥으로 유포된 조선과 조선 왕의 이미지는 일본 안에서만 유통되지 않았고, 서구 열강의 다양한 매체 속에 반복되어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당시 서구 여러 나라의 매체에 등장한 조선의 왕은 무능하거나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왕비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재현되었고, 이것은 조선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조선은 ‘보는 신문’의 시대가 아닌 ‘읽는 신문’의 시대였다. 1883년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등장한 뒤 여러 매체가 창간되었으나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은 1897년 서양인 선교사들이 창간한 『그리스도신문』이 최초였고, 사진 화보나 삽화가 일반 대중에게 익숙해진 것은 1920년대에 접어든 이후였다. 따라서 19세기말 조선의 민중들에게 왕의 이미지는 여전히 가까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청일전쟁기 일본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이미 침략을 정당화하는 상징물 역할을 했으나 조선에서 고종은 여전히 일반 대중에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1897년 『그리스도신문』은 고종의 허락을 받고 정기구독자들을 대상으로 고종의 초상을 배포하겠다는 광고를 냈다. 이는 비록 고종이 직접 자신의 이미지를 제작하고 유포한 것은 아니었으나 고종이 그것의 유포를 허락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도구로 이미지를 활용한 초기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이미 ‘보는 신문’의 효용성을 알았던 일본과 이제 막 ‘읽는 신문’의 시대를 열었던 조선에서 이미지를 다루는 출발선은 이렇게 달랐던 것이다.
이미지에 권위를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고종, 이미지로 일본의 표상을 만들어낸 메이지 정부의 신하들
고종은 여러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조선 왕조에서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전통적 방법인 어진의 제작은 물론 수많은 서양인들 앞에도 자주 나섰다. 아관파천 이후에는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널리 알리기 위해 상복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서기도 했고, 조선 왕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복장과 배경에도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이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이후에는 달라진 복식을 갖춰 입고 세자와 함께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고종은 사진과 그림 안에서 정면상과 왕의 상징물을 통해 전통적 황제상을 더욱 강화했다. 전통적인 상징들을 화면 안으로 끌어들여 강력해진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이미지의 재현을 통해 조선 왕실의 건재함과 스스로의 권위를 알리려는 고종의 뜻과 달리 그의 이미지는 앞서 말한 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면상은 서양인들에게 비문명의 상징이었고, 고종은 일본에서 출발한 조선에 대한 이미지로 인해 이미 스러져 가는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무능하거나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유포되었다.
이에 비해 메이지 천황은 사진 촬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1873년에 제작된 메이지 천황의 사진은 젊은 청년의 모습이긴 했으나 몸은 왜소하고 자세 역시 썩 좋지 않았다. 서구 열강에 일본의 상징으로 내세우기에 이 사진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메이지 정부의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인 화가의 몸에 메이지 천황의 얼굴을 그려 합성한 뒤 새로운 메이지 천황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들이 채택한 것은 4분의 3면상인 서양의 전통적 초상화의 구도였다. 이렇게 완성한 ‘서양인의 신체를 가진 천황’은 문명화된 일본의 표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명, 남성성, 근대국가의 상징으로 이상화되었다. 천황의 초상을 국민의 숭배물로 만든 것은 천황 자신이 아닌 메이지 정부였다.
권력을 위해 이미지는 어떻게 활용되는가, 그 제작과 배치, 배포의 방식으로 살펴보는 이미지의 도구화
고종은 궁궐 밖으로 왕의 이미지가 유포된 조선 최초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권위를 담고자 했으며 그것을 통해 대외적으로 자신의 국가와 스스로의 건재함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고종의 이런 노력은 서구 열강과 제국 일본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벌였던 힘의 경합에 의해 효과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그것을 활용하고 배포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노력은 노력으로만 그칠 뿐이었다.
일본은 이미 서구의 시각 매체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소박한 이미지를 연출해 국민들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유포했다면 일본은 천황의 사진을 제작하되 그것을 한정된 대상에게만 배포함으로써 권위와 신성성의 표상으로 활용했다. 일본에서 천황의 사진을 관공립 교육기관에 배포한 것은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1889년부터이다. 절대권력으로서의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국가에 걸맞는 신민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국에 걸쳐 천황의 지배를 가시화해야 했고, 교육기관이나 행정 조직 그리고 군대 조직이 전국에 걸쳐 배포되어 있으므로 이곳에 천황의 사진을 건다는 것은 전국을 지배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미지의 재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라카미 덴신, 이와타 가나에 등 일본인 사진사들은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촬영했고, 일본은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다양한 방식으로 배포함으로써 조선과의 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후 일본은 일본 내에서 메이지 천황의 사진을 배포한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했다. 즉, 조선 황제의 초상 사진은 조선의 방식이 아닌 일본의 체제 속에 편입되어 각 지역의 관청과 학교에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배포되었고, 일본이 주도하는 정치적 공간 속에서 그들에 의해 재현되고 유포되었다. 고종은 이미지 재현의 주체가 되려 했으나 일본에 의해 선전용 이미지로 전락했다.
또하나 눈여겨 볼 것은 대중매체 속에서의 이미지 배치 방식이다. 한국강제병합 이전 제작된 기념물에 일본의 천황과 조선의 황제는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강제병합 이후 조선의 황제는 일본의 천황 사진 아래, 훨씬 작은 크기와 장식으로 배치되었고, 사진과 함께 배치된 명칭도 이왕, 이태왕 등으로 격하되었다. 나아가 각 관공서와 학교에는 천황 부부의 사진이 걸리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매체에는 천황과 조선의 왕 대신 천황 부부의 사진이 나란히 등장했다.
왕의 얼굴이 진전을 나오기 시작할 무렵 재현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 주목을 받았던 이미지는점차 단순히 재현의 방식을 넘어 권력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권력자의 내면에 내재화된 듯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넘어 오늘날까지도 권력을 가진 이들은 물론 권력을 꿈꾸는 이들이 스스로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어떤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단순히 새로운 시각 문화의 유입과 그것으로 인한 변화 과정을 넘어 이미지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다양한 시도를 살피는 것 또한 이 책의 의미이기도 하다.
지은이 | 권행가
미술사학자.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박사후기 과정을 밟았으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한국근현대미술사 관련 강의를 지속적으로 해왔다.
박사학위 논문인 「고종황제의 초상: 근대적 시각매체의 유입과 어진의 변용」 외에 「일제 시대 우편엽서에 나타난 기생 이미지」, 「명성황후와 국모의 표상」, 「1930년대 고서화전람회와 경성의 미술시장」, 「근대적 시각체제의 형성과정: 청일전쟁기 재한 일본인 사진사의 사진활동을 중심으로」 등 우리 근대의 다양한 시각문화에 관한 논문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의 연구는 ‘근대, 미술, 여성, 시각문화’라는 서로 다른 범주의 경계를 넘나듦과 동시에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상호 연관성에 주목함으로써 ‘근대’라는 시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그동안 그가 공저자로 참여해온 『한국근대미술과 시각문화』,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시대의 눈』, 『경계의 여성들: 한국근대여성사』 등은 이런 그의 관심사와 족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들어가며
Ⅰ. 숨겨진 왕의 초상
조선의 어진 l 어진에서 왕의 초상으로
Ⅱ. 상징에서 재현으로
국가의 표상이 된 왕의 초상 l 조선의 왕, 카메라 앞에 서다
Ⅲ. 조선 왕의 초상, 대중에게 유포되다
니시키에 속 조선의 왕과 왕비 l 충정과 애국의 상징
Ⅳ. 황제가 된 고종, 이미지를 정치에 활용하다
어진 전통을 되살리다 l 황제의 초상, 종족의 초상
Ⅴ. 일본으로 넘어간 이미지 권력
순종의 즉위, 어진 전통의 축소 l 일본으로 넘어간 황실 이미지 주도권 l 일본식 어진영 체제로 들어간 순종의 초상
마치며
주 l 참고문헌 l 그림목록 l 찾아보기 l 감사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