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의 예술가로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나혜석을, 할 수 있는 만큼 파헤치고 소설 속 소설이라는 틀을 빌려 6년간 써내려간 책이다. 관련 자료를 뒤져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한국전쟁 전까지의 사회상을 깔아두고, 그녀의 정신을 지키도록 노력하며 화가로서의 열정과 사랑ㆍ결혼 등을 엮어냈다.
책소개
제 삶은 실패했지만 정신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나혜석, 운명의 캉캉》은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2012년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프린세스 바리》, 《목공소녀》, 《연애독본》 등의 작품을 발표해온 작가 박정윤이 6년 동안 처절하게 써내려간 나혜석 일대기다. 감성적 문체와 예민한 문제의식으로 밑바닥 삶을 촘촘하게 복원하고 사회의 여러 문제를 민감하게 읽어낸다는 평가를 받아온 박정윤은 이 책에서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의 비극적 운명에 눈길을 던진다.
작가는 나혜석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의 사회상도 세밀하게 담아낸다. 현모양처만을 여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로 휘두르던 당시, 작가가 그린 나혜석의 비극적 운명은 절절하다.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해가는 여러 인물들의 결말은 애잔하다.
분명치 않은 희망을 부여잡기보다 내던져버린 나혜석, 단단한 적의를 품고서라도 살고자 한 나혜석은 찬바람이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거리에서 외친다.
저는 길거리에서 찢겨 죽는 한이 있어도 틀린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여성들마저도 저를 외면하고 거울 앞에서 정신을 치장하며 웃고 있을 때, 억세고 줄기찬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제 삶은 실패했지만 정신은 실패하지 않았고, 저는 실천했습니다. 네, 삶은 실패했지만 정신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연민으로, 애증으로, 슬픔으로 써내려간 나혜석의 비극적 운명
어릴 적 언니들 책장에 꽂혀 있던 나혜석에 관한 얇은 책 하나. 작가는 그 속에 담긴 그녀의 자유로운 삶과 비극적인 운명에 덜컥, 발목 잡힌다. 처음에는 비극적인 삶에 연민으로 끌렸단다. 중간에는 미움과 애증으로 마음이 끓어올랐단다. 마지막에는 슬픔이 지속되었단다. 오랫동안 슬픔으로 남은 나혜석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파헤쳤단다. 그 후에야 비로소 슬픔이 평온한 저녁처럼 단정해졌단다.
작가는 나혜석의 비극적 운명에 다른 인물들의 운명을 겹쳐놓는다. 어릴 적부터 나혜석과 여러 날들을 함께하며 그녀의 운명에 깊숙한 흔적을 남긴 엘리제 마담, 나혜석의 죽음을 믿지 못해 그녀의 마지막을 파헤치는 엘리제 마담의 딸 윤초이, 아버지 독고휘열과 나혜석의 인연 때문에 그녀의 삶을 소설로 그리는 독고완, 뜻하지 않게 독고완과 윤초이의 원고를 습득하면서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나혜석의 인연을 알아가게 되는 ‘나’. 작가는 소설 속 소설이라는 틀을 빌려 이들의 운명을 씨줄날줄로 조밀하게 엮으며 파국의 길을 걸어가는 나혜석을 되살린다.
나혜석에게 이끌리는 운명들
지방대 국문과 졸업, 초등학생 상대로 글짓기 학원에서 1년 강사 생활, 그것이 이력의 전부인 ‘나’에게 어느 날 찾아온 나혜석 원고. 나혜석 때문에 집안이 몰락했다는, 명동 최고의 양장점이 변두리 동네 양장점으로 전락한 게 나혜석 때문이라는 아버지에게, 그리고 운명을 믿지 않는 내게, 나혜석은 어찌해볼 수 없을 정도로 삶에 깊이 개입된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 독고완과 윤초이가 찾아 나선 나혜석의 넋은 그렇게 회오리처럼 휘감겨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행려行旅 사망, 본적: 미상, 주소: 미상, 성별: 여, 성명: 나혜석, 연령: 53세…….’ 독고완은 나혜석의 사망을 확인하기 위해 찾은 안양보육원에서 같은 목적으로 온 윤초이와 만난다. 독고완은 어머니를 곁에 두고도 평생 첫사랑 나혜석을 잊지 못한 채 번민하는 아버지 독고휘열 때문에, 윤초이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엘리제 마담의 벗이었던 이모 나혜석의 죽음에 대한 불신 때문에 직접 그녀의 죽음에 담긴 사정을 찾아 나선 길이었다. 이들은 서로에게 나혜석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함께 작업하기로 한다.
나혜석, 운명의 캉캉을 추다
“파리에서의 스캔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예술과 자유가 풍만했던 파리에서 최린과의 연애, 난 나혜석 인생 최대의 스캔들을 중점적으로 쓸 예정이오. 나혜석, 운명의 캉캉. 캉캉은 불란서어로 스캔들이라 하더군.”
독고완은 자신이 쓰고 있던 나혜석 관련 글을 ‘운명의 캉캉’이라 이름 붙인다. 작가는 독고완의 손을 빌려 나혜석의 도쿄 유학 시절, 최승구와의 가슴 아픈 사랑, 김우영과의 만남과 결혼을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최린과의 관계 때문에 맞는 파국,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회와 미술계에서 배척당하는 와중에도 화가로서의 열정과 선각자로서의 실천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의 지난했던 삶도 꼼꼼하게 그려낸다. 이혼 후 〈이혼고백서〉를 쓰게 된 계기와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 소송, 사생활 노출증이라는 비난에도 옳은 길이라 믿고 꿋꿋하게 밀고 나갔던 나혜석의 의지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나혜석의 죽음, 왜? 어떤 이유로?
나혜석의 삶을 찬찬히 훑던 독고완은 그녀의 죽음 뒤에 누군가 있음을 직감한다. 바로 엘리제 마담이다. 엘리제 마담이 나혜석과 어린 시설부터 인연이 있음을 윤초이에게 확인한 독고완은 마담의 뒤를 조사한다.
“…… 마담은 나혜석과 같은 날, 같은 번지로 출생신고가 되어 있더군요.”
“꽤 열심히 뒤적거린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요?”
“함께 자랐다면 어느 순간, 질투를 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원래 여자들의 질투가 무서운 결과를 만들기도 하거든요.”
자신이 나혜석의 이복자매가 아닌 고아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싹틔운 애증, 자신을 희화화한 혜석의 소설을 읽고 키운 분노, 사랑하는 이가 자신이 아닌 혜석에게 마음이 있음을 확인한 후 느낀 절망은 엘리제 마담을 극으로 몰아간다. 온 조선 사회의 외면과 조롱에 힘겨워하던 혜석은 벗이라 여긴 엘리제 마담의 만행을 목도하고 결국 차가운 겨울 거리에서 쓸쓸하게 죽어간다.
“여자도 사람이외다!”, 나혜석의 외침을 되살린 이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근대적 여성운동가’이며 ‘독립운동가’이자 ‘탁월한 문필가’. 이름에 따라붙는 수많은 수식어만큼이나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열일곱의 나이에 오른 도쿄 유학길, 유부남 최승구와의 첫사랑, 한번 결혼했다가 상처한 김우영과의 결혼, 자식까지 둔 상태로 나선 세계여행길, 최린과의 깊은 관계. ‘불륜녀’라는 지탄에 ‘이혼녀’라는 딱지까지 덮어쓴 나혜석은 그 와중에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부르짖는다.
‘인형을 원하는 조선 남성들’을 향한 그녀의 외침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남편 김우영을 위시한 남성들의 이기주의를 담은 〈이혼고백서〉 발표, 그리고 불륜 상대인 최린에의 위자료 청구 소송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모양처만을 여성의 참다운 삶인 양 여기던 당시 사회에서 이를 두고 볼 리 만무. 나혜석의 이 같은 외침은 무시당하고 외면 받고 조롱당한다. 차가운 거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맞은 최후는 그 결과였다.
“제 삶은 실패했지만 정신은 실패하지 않았고, 저는 실천했습니다.” 분명, 나혜석의 정신은 실패하지 않았다. 나혜석의 부르짖음 덕분에 인형만을 원하는 남성들의 시선은 제법 사그라졌다. 하지만 아직 요원하다. 작가가 나혜석의 삶을 되살린 이유다.
지은이 | 박정윤
1971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바다의 벽〉이, 2005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길은 생선 내장처럼 구불거린다〉가 당선되었다. 2012년 장편소설 《프린세스 바리》로 제2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창작집 《목공소녀》(2015)와 경장편소설 《연애독본》(2015)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인형의 가
단지 아름다움에 미혹되었을 때
여성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슬픈 서사가 있었다
돌고 돌아와 다시 만나지는
슬픔의 캉캉
에필로그
작가의 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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