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겸 사진비평가와 시인 겸 항해사인 저자들이 사진으로 하는 삶과 인문학 놀이이다. 인도사를 전공하는 저자의 남다른 눈으로 5년여 동안 담은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의 사진 중 말하기와 말 나누기에 좋을 사진을 골라 서로 다른 시각을 보이며, 함께 대화하길 권한다.
책소개
최희철 시인은 배 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녹색과 잡종의 세상을 지향하는 베르그송주의 생生 철학가다. 평소에 그를 접할 때마다 그가 가진 생각을 많은 독자와 널리 공유하고 싶었다. …… 사진가는 이런 생각을 갖고 찍었는데, 철학하는 시인은 저런 생각으로 보았구나, 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의 놀이를 하면서 사는 것이 곧 사진으로 인문학을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사진가와 시인이 하는 사진으로 하는 삶과 인문학 놀이에 독자들도 주저 없이 끼어들어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 봤으면 한다.
- 이광수(사진가, 인문학자)
사진 속엔 수많은 시선이 교차한다. 비록 사진 속에 담기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진의 외부, 그러니까 인화지 바깥에도 사건의 시선들은 이어진다. 사진 이미지는 외부가 내부로 드리워진 잔상殘像이다. 온갖 기억이 뒤엉킨 냄새 같은 것, 하여 사진에서는 이미지뿐 아니라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광수의 사진들 역시 그랬다. 이미지 속에 접혀 있던 온갖 냄새들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 말이다. 그 냄새들은 사진이 온전히 빛과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렇다면 사진은 온갖 것들이 무한히 접혀 있는 ‘모나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나로 하여금 여러 글을 쓰게 했다.
- 최희철(시인)
사진, 시처럼 철학처럼 읽다! 사진으로 하는 인문학놀이, 사유놀이
현대의 대표적인 대중예술인 사진은 인문학의 향연을 펼치기 좋은 매체다. 사진만큼 시간, 존재, 재현 등에 관한 다양한 시선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과 맥락을 포함하는 매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공저자인 이광수 교수는 전작 《사진 인문학》에서 사진을 인문학의 보고寶庫라 했다.
이광수 교수는 사진으로 인문학적 사색의 향연을 펼칠 뿐 아니라, 그 ‘생각’을 다른 이와 ‘같이’ 나누어보고자 했다. 누구나 사진을 찍지만, 사진에 대해서 말하는 이는 드물다. 사진에 관해서는 “좋은 사진”과 “나쁜 사진”이라 말하면 끝일까? 사진에 담긴 생각을 제대로 말했다고,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광수 교수는 자신이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수년 동안 직접 찍은 사진들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벗이며 후배인 “철학하는 시인” 최희철과 사유의 길에 나섰다.
이 책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는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함께한 사유의 놀이, 인문학의 향연이다. 사유의 주고받음을 통해, 멈추어 서지 않은 채 지속하는 것, 즉 삶의 의미를 곱씹고자 했다. 사진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를 추구하는 예술이다. 모사가 아닌 재현의 예술이다. 시간과 우연, 존재와 비존재, 세속과 성스러움에 대해 사유하기 좋은 인문학의 보고인 것이다.
창조적 종합을 향한 사진과 시의 패킹 작용 그리고 인문학적 삶
최희철 시인은 두 저자의 만남을 일종의 패킹 작용이라고 비유하였다. 이광수 교수는 인도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최희철 시인은 배 타는 일(항해사)과 닭치는 일로 생계를 꾸렸던, 철학하는 시인이다. 스스로도 사유의 경계 지음이 없었던 이들인데, 두 저자의 만남은 더더욱 무경계의 사유를 보여준다. 텅 빈 경계가 충만할 수 있는 지점이다. 패킹 작용이란 관管과 관 사이에서 자신도 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일종의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이라 할 것이다.
모든 게 그렇듯 혼자서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없다. 가령 탁자 위의 패킹은 ‘패킹 작용’을 하지 않는다. 패킹은 관管과 관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조여지며 변형될 때, 말 그대로 ‘packing’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킹은 ‘애무술愛撫術’과 관련되어 있다. 타자他者를 뜨겁게 달구는 것 말이다. 하지만 애무술엔 ‘정통正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이어야 한다. (최희철, 나가는 글)
서로 다른 사람이 대상을 바라볼 때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대상에게 부여되는 의미가 그것을 대하는 주체의 인식 정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진 찍는 기술이 전문가 수준에까지 미치지 못해, 찍는 사진마다 얼추 비슷하게 나타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 대상을 대하는 인식조차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이광수 교수가, “그냥, 편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자. 이 장면을 대할 때, 난 이렇게 보았다, 이 사진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라는 것을 서로 이야기해 보자”고 제안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이광수 교수가 말하는 인문학적 삶이다.
멈추어 서지 않은 채 지속되는 것, 사진가와 시인은 삶 속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사진은 이광수 교수가 5년여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찍은 것들이다. 이광수 교수는 ‘좋은 사진’만을 고르지 않았다. 사진이 말하기 방식의 하나이듯, 말하기/말 나누기에 좋을 사진들을 골랐다. 이광수 사진가의 사진에는 (최희철 시인의 표현대로) “수많은 시선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진은 시선들이 목소리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접선 장소’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진의 속에 담기지 않더라도 사진의 외부에도 시선들은 이어지고 있었고, 보고 있는 사진 이미지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가 내부로 드리워진 잔상과도 같았다.
최희철 시인은 사진가의 사진들 속에서 이미지뿐 아니라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냄새들은 사진이 온전히 빛과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그렇다면 사진은 온갖 것들이 무한히 접혀 있는 ‘모나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나드Monad는 라이프니츠에 의해 “무엇이 실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활용된 개념이다. 그러고 보면, 사진 예술에서 모나드는 의미 있는 개념이다.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사물의 ‘세계 속의 또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사진은 본질의 속성을 재현한다. 원본을 모사할 수 없기에, 원본 같은 사본이 대신하여 본질을 드러낸다.
이광수 사진가는 작품에 〈작업 노트〉를 달 듯, 작품에 대한 (자신의) 주석을 달았다. 사진 작품의 의미를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사진에 담긴 생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진으로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저자가 추구하는 ‘사진으로 철학하기’의 주제이다. 여기에, 교차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패킹 작용이 덧붙여졌다. 작품마다 〈작업 노트〉를 개별적으로 달 수 있겠지만, 교차된 시선으로 서로 주고받음을 통해, 작품의 의미는 다시 해석되고 풍성해졌다.
모나드에 존재를 물었더니……
사진 한 장을 같이 들여다보며 사진가와 시인이 나눈 대화의 첫 화두는 그저 세상살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었다. 하기에는 쉬운 말이지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특히, 차이 나는 시선을 가지고 있는 두 세계관이 부딪힐 때에, 타자는 하나이지 않고, 무한히 탈주하기 때문이다.
사진가는 그저 셔터를 눌렀을 뿐이다. 누르고 나서 즉흥적인 감정이 떠올라 때론 불편해지며 때론 슬퍼하며 때론 탄식을 하였다. 사진이 우연한, 순간의 모나드를 포착하였다.
시인은 그저 생각을 풀어 보려고 했다. 사진가의 사진 속에 수많은 시선이 교차하고 있음을 읽었다. 사진이, 시선들이 목소리를 은밀하게 드러내는 접선 장소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보고 있는 사진 이미지는 내부가 아니라, 외부가 내부로 드리워진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진 이미지 역시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어떤 패킹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사진은 온갖 것들이 무한히 접혀 있는 ‘모나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사진가의 사진 속에서, 이미지 속에 접혀 있던 온갖 냄새들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그 냄새들은 사진이 온전히 빛과 관련된 시각적 이미지만을 다루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대화의 첫 번째 주제로 사진가와 시인은 존재에 대한 의문을 삼았다. 사진으로 포착하는 모나드의 순간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순간 사진가의 카메라에, 시인의 눈에 포착되는 그 실체는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의문으로 삼았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의문은 끝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저 제 자리에 그대로 있어 무심히 흘러갈 뿐인 그것을 존재한다는 틀에 가두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 순간을 보고자 한 노력을 담았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눈의 해부학적 구조가 밝혀진 19세기 이전까지 눈에서 광선이 나가 사물을 인지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외부의 빛을 받아들여 망막 안에서 뒤집어진 채 보이고, 그것을 두뇌가 인지한다는 것을 ‘발견’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본다는 행위는 삶의 조건이기도 했다. 보고 싶은 것을 보지 않을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조선시대 화가 최북崔北은 자신의 눈을 찔렀다. 최북에게 본다는 것은 자존 위에 서는 것이었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눈으로 담을 수 없는, 뒤집어진 채 인간의 망막을 스쳐지나가는 순간을 “잡는다.” 인간의 시선이 미처 거두지 못한 찰나를 잡는다. 카메라는 시선의 한계를 해방시킨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존은 카메라를 통해 시선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인간이 허투루 놓쳐버린 순간을 잡아내 정지시키는 카메라는 결국 사진가의 손을 거쳐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버렸다.시인은 사진 속에서 삶의 수많은 순간 중 하나를 발견한다. 시인에게, 여럿 중에서 하나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찾는 사진은 ‘고대적 방식’을 닮았다. 카메라는 근대의 발명품임에도 고대적 사유를 하는 기계장치인 것이다. 허나 존재의 순간을 잡는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 시간을 잡지는 못한다. 카메라가 잡는 것은 흐름일 수 없다. 삶의 미세함, 삶의 최소 단위에 멈춘다. 그 삶의 모나드에서 카메라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시인은 카메라 너머를 짐작해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은 무수한 점들의 변화로 이어진다. 이것을 분자적으로 잡아내고 해석하는 것이 사진가의 일이다. 편견은 시선이 현상을 가둘 때 발생한다. 눈을 뜨고 망막을 거쳐 홍채로 빛이 들어오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편견을 먼저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본다는 것은 판단한다는 것이다. 사진가의 카메라가 해방시키는 것은 그 판단이다. 카메라는 삶의 순간을 지극히 미세한 단위로 쪼개고 갈라 한 순간을 포착한다. 어떠한 편견이나 판단도 없는 사진 속에서 시인은 비로소 해방을 맞이한다.
사진가와 시인의 두 번째 이야기는 카메라의 해방성이다. 카메라는 인간이 무심코 흘려보내는 순간을 가두지만 동시에 근대적 해방의 도구이다. 그것은 시선의 한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판단의 한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 삶의 무수히 작은 순간, 삶의 모나드 안에서 시선과 편견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가두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가와 시인은 인간의 기억과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카메라의 역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속의 성스러움
산다는 것은 중독이다. 그 고단함에 대한 중독이다. 고단함에 고단함을 더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삶의 무게를 온통 짊어진 발끝에, 힘없이 치켜세운 눈빛에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중독을 드러낸다. 살아 있기에 우리는 삶에 중독된다.
삶을 이루는 수많은 단편 속에서 사진가가 발견한 것은 삶 그 자체다. 삶은 거부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산다는 것 앞에선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판단마저 무의미하다. 존재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었다. 사진가의 카메라에 담긴 세상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어디에도 죽은 것은 없다. 나무, 바위, 구름, 먼지 모두 살아 있다. 삶의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것은 동시에 지속된다. 멈추어 서지 않은 채 지속되는 것, 사진가는 지난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 영원을 발견한다.
시인은 현실감을 잃은 세상을 바라본다. 거대한 코끼리 같은 산도 한참을 쳐다보면 현실감을 잃는다. 익숙해지는 것이다. 눈으로 바라볼 뿐 존재론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나뉘어 버린다. 그렇게 의미는 상실되고, 세상은 이미지로 소비될 뿐이다. 그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카메라였다면, 거기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삶의 민낯이었다. 그 민낯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감격, 공포, 고통, 환희 모두 사람이 삶에 덧씌운 감정이다. 그것들은 모두 해석된 것이다.
붓다는 삶은 고통이라고 했지만 시인은 삶은 고통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삶에 대한 착각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일상이 ‘삶에 대한 착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이 고통이다. 하여 모든 고통은 ‘삶의 착각’과 관련되어 있고, 그 모든 것은 다시 삶으로 수렴된다. 살면서 우리는 고통을 잠시 잊은 채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정치를 한다. 피와 눈물도 흘린다. 시인의 눈에, 이 모든 것들은 더럽지만 또한 숭고하다. 고통마저 잠식해 버릴 정도로 숭고하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사진가와 시인은 찰나 속에 숨어 있는 삶의 단편을 손에 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쪼개고 쪼개고 쪼갠 뒤 남는 것을 파악한다. 그 극미의 삶 속에서, 순간의 모나드에서 사진가와 시인이 발견한 것은 숭고함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인 동시에 모든 고통을 잠식하는 곳이 바로 삶이다.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현상 사이에서 사람들은 순간순간 늘 변화한다. 그 변화는 멈추게 하거나 멈출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이다. 어쩌면 삶이란 죽음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숭고한 과정이리라.
지은이 |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역사학자(인도사)이자 사진비평가이다. 시민운동가로서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만원의 연대’ 운영위원장을 맡았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정의당 등 진보 정당 당원으로 활동해 왔다. 인도 근대사 연구 중 사진도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본격적으로 사진 이론을 공부하여 사진 비평의 길로 들어섰다. 저술로는 인도사에 관한 것으로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지은 책이 있고, 『침묵의 이면에 감추어진 역사』, 『성스러운 암소 신화』 등의 옮긴 책이 있다. 사진에 관한 책으로 『사진 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등의 지은 책과 『사진으로 제국 찍기』의 옮긴 책이 있다.
지은이 | 최희철
시인이고 항해사다. 배 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녹색과 잡종의 세상을 지향하는 베르그송주의 생(生)철학가이다. 1961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 어업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부터 약 7년간 원양어선 및 상선 항해사로 근무한 바 있다. 1982년 향파문학상, 2005년 인터넷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13년 부산일보 해양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 시집 『영화처럼』을 발간하였으며 현재는 문학동인 ‘잡어’에서 활동 중이다.
목차
들어가는 말 산다는 것, 본다는 것(이광수)
제1부 모나드, 존재를 묻다
1 세계 속의 또 다른 세계
2 타자는 무한하다
3 나는 누구의 존재를 본 것일까?
4 우연한, 순간의 모나드
5 텅 빈 경계의 충만
6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
7 남성성의 착각
8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9 무상하게 흘러갈 뿐
10 그저 세상살이가 있다
11 서식하며 살아가기
12 타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13 어떻게 본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14 차이일 뿐, 비정상이 아니다
15 차이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생명의 역사다
제2부 시선에 갇힌 것은 무엇인가
1 탈주-기계로서의 사진
2 속도-기계로서의 카메라
3 갇혀 있는 것들에 대한 사유
4 가까이 보면 꽃의 우주
5 일상 속 천상의 소리
6 끝없이 살아 숨 쉬는 사건이 있을 뿐
7 섹스를 욕하면 성스러운가!
8 누가 판단하는가의 문제
9 되기의 존재론
10 꺾기
11 물처럼 감싸 안는 몸
12 시간을 기억하다
13 우리는 모든 걸 기억하는 존재이기에
14 정신이든 몸이든
15 경배, 욕(慾)의 세계
제3부 세속의 성스러움
1 발에서 꽃이 피는 그 욕망을 보라
2 가보지 않은 곳의 불안
3 여성의 죄인가, 남성의 광기인가
4 천국은 얼마일까?
5 찰나에 피는 꽃
6 무엇이 성스러움을 지탱하는가
7 현실 속의 이데아
8 어떻게 현재를 살 것인가
9 고매한 자들의 창녀 짓
10 숭고와 고통의 삶
11 태어남, 죽음이 시작하는 곳
12 기호의 이미지
13 특이성이 모여 우주가 되고
14 고갈되는 세계
15 아버지와 아들
나가는 말 입문적 삶과 패킹 작용(최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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