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후반에 이르러 4대 강 개발사업 등 갑자기 증가한 작업량으로 한정된 전문 인력 안에서 조사 기관만 늘어나는, 수급 불균형을 이루었다. 이는 곧 발굴의 졸속과 부실로 이어져 우리 고고학의 수준 저하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구조적 현실과 문제점을 지적하며, 관련 기관과 인력의 질적 향상이란 고고학 풍토 조성을 위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우리 발굴의 역사를 돌이켜 보고 올바른 앞날을 지향하기 위한 학문적 바탕 마련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이 책을 정리했다.
연대기 형식을 취하고 1880년으로 시작, 1980년을 하한으로 했다. 이후의 폭발적으로 불어난 대규모 토목ㆍ건설 사업과 함께 증가한 발굴 건수 모두를 지면에서 다룰 수 없었던 이유다. 책은 우리 고고학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어떠한 굴곡을 거쳐 성장하고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한국 고고학의 자화상’이다. 최초의 기록은 광개토대왕비 발견이다. 당시 일본인들의 조선 침략 야욕의 정당화 명분을 찾던 것이었다 해도, 그 대상 자체의 역사적ㆍ고고학적 가치를 우선에 두어 첫 장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조사와 사업을 훑어나가는 이 광범위한 과제는 저자의 학문 여정을 바탕으로 한 오랜 저술작업과 수많은 자료가 면면이 녹아있음을 보이고 시간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책소개
처음으로 그려진 ‘한국 고고학의 자화상’
한국에서 근대적인 학문체계 안에서 본격적인 고고학이 시작된 것은 안타깝게도 19세기 말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고고학적 조사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고부터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朝鮮古蹟硏究會가 신설되기까지 모든 발굴조사는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였으며, 이러한 발굴 성과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고학자인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1880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 고고학 백 년의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았다. 우리 고고학은 지금까지 발전해 오면서 일반 역사는 물론이고, 사상사, 예술사, 문학사 등 관계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는데, 그동안 한국 고고학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 『한국 고고학 백년사』는 우리 고고학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어떠한 굴곡을 거쳐 성장했고, 또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처음으로 그려진 ‘한국 고고학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겠다.
저자는 1880년을 우리 고고학의 시점으로 보았는데, 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근대 고고학의 본격적인 태동 시기를 돌이켜 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구한말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된 식민사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그들이 자행했던 금석학적 자료를 통한 견강부회식의 접근 방식을 그 첫 반열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광개토왕비의 발견과 그에 대한 집중적 연구와 해석은 그것이 전형적인 식민정책의 합리화를 위한 수단의 첫 발걸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근대 고고학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우리 고고학의 시작을 광개토왕비의 조사에 두고, 이를 기점으로 한 ‘100년의 역사’를 연대기식으로 엮어 나가게 된 것이다.”
또한 1980년 이후에는 갑자기 늘어난 대단위 토목, 건설 사업에 따라 그에 비례해서 발굴 건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기에, 이후의 역사까지 한 권의 책에 담아내는 것은 이 책의 체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만 책 끝에 「결어에 대신하여」에서 최근의 고고학적 경향과 제언을 덧붙여 두었다. 저자는 국가 경제력의 급성장과 함께 1980년대에 이르러서 발굴의 규모도 대형화되고, 지금까지와 같은 국공립 등 각급 연구 기관과 대학 박물관의 인력만으로는 폭주하는 조사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면서, 1990년대에 들어서는 법인체의 성격을 띤 많은 연구원硏究院들이 급속한 증가를 보이며 발굴에 적극 뛰어들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2008년 후반기에 실시된 사대강四大江 사업 등, 급작스레 늘어나는 작업량을 감당하기 위한 자연적 추세라지만, 현실적으로 조사를 감당할 만한 전문 인력은 확충되지 않은 채 조사 기관만 속속 늘어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수급需給의 불균형은 발굴의 졸속과 부실을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우리 고고학의 수준 저하를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우리 고고학의 앞날을 가늠해 나갈 발굴 활동이 각지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저자는 올바른 고고학 체계의 정립을 위해서라도 각급 발굴 기관과 전문 인력의 질적 향상에 힘써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집필을 위해 10년여에 걸쳐 자료를 수집 조사하고, 문헌 기록을 연구하여 오늘의 결실을 거두었다. 한편, 분단 이후 북한의 고고학 성과에도 주목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성과를 중심으로 반영함으로써 온전한 ‘한반도 고고학 백년사’가 되도록 노력했다. 이 책에는 관련 사진 37점과 발굴 도면 108점이 수록돼 있다. 아울러 외국인들도 우리 고고학사의 흐름을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충실한 영문 머리말Foreword과 요약문A Summary을 수록하였다.
우리 고고학이 걸어온 길 - 이 책 내용의 요약
경술국치와 더불어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곧이어 총독부박물관을 설립하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고고학적 조사를 수행하였다. 이들의 발굴은 체계를 갖추었다기보다는 유물 확보가 주된 목적인 ‘보물찾기’식의 작업이었기에 유물 확보가 비교적 손쉬운 삼국시대와 낙랑의 무덤, 절터나 성터와 같은 역사시대의 유적이 발굴의 주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의 거의 모든 발굴은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중반(1931년)에는 새로 설립된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무렵에 경주와 부여, 공주 등 고도古都에 총독부박물관 산하의 분관分館을 개설하여 지역별로 수집, 발굴된 문화재의 수장收藏과 전시 기능을 담당토록 하였다.
광복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은 국립박물관으로 체제가 바뀌게 되었으나, 지방 삼관三館의 조직은 한동안 그대로 이어졌다. 광복 이듬해에 개성시립박물관이 잠시 국립박물관 분관으로 흡수 통합되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다시 지방 삼관 체제로 되돌아가 이후 1978년 광주박물관의 개관 때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국립박물관에 의한 독점적 발굴 체제가 이어지다가,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대학 박물관들도 발굴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발굴 기관이 다변화되었다.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고고인류학과가 신설되었으며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서 대학 박물관들의 발굴 참여가 더욱 활발해졌다. 이와 함께 국립박물관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었으나, 지금까지의 본관本館 일변도의 체제에서 벗어나 지방 박물관도 독자적인 발굴을 수행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문화재관리국 조사팀이 새로이 발족하면서 수시로 발굴 현장에 투입되었다. 또한 이때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국토 개발과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크고 작은 구제救濟 발굴이 활발해짐에 따라 발굴 사업의 양산화가 불가피해졌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경주 등 고도를 중심으로 한 주요 개별 유적들에 대한 대규모 발굴이 국책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지은이 | 지건길
1943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1968년 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를 시작으로 프랑스 기메Guimet 박물관, 루브르Louvre 연구소에서 연수했으며, 곧이어 국립부여박물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프랑스 렌Rennes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국립민속박물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을 거쳐 광주, 경주의 국립박물관장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했고, 이어서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동아대학교 및 대학원 초빙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무령왕릉(1971), 천마총(1973), 다호리 고분(1988-1989) 등 다수의 발굴작업에 참여했으며, 주요 저서로 『천마총』(공저, 1974), 『동·서양 거석문화의 비교연구』(불문, 1981), 『고고학과 박물관 그리고 나』(2011), 『한반도의 고인돌사회와 고분문화』(2014) 등이 있다.
목차
책머리에
Foreword
서설: 한국 고고학의 전야前夜와 태동胎動
문헌에 나타난 관련 기록과 금석학金石學의 활용
제1장 여명기黎明期 (1880-1900)
광개토왕비 현지 조사를 통해 드러난 일본의 대륙 진출 음모와 서양인들의 접근
제2장 맹아기萌芽期 (1901-1915)
지표 조사와 시굴·발굴을 통한 고고학적 식민정책의 전개
제3장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 (1916-1930)
총독부박물관 소장품 확보를 내세운 고분 발굴과 불적佛蹟 조사의 남발
제4장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2 (1931-1944)
식민정책 변화에 따른 조선고적연구회의 설립과 발굴 체제의 전환
제5장 격동기激動期 (1945-1960)
광복기와 전쟁기에 이루어진 한국 고고학의 활동과 성장을 위한 기반 구축
제6장 성장기成長期 (1961-1970)
사회적 변혁에 따른 새로운 고고학 풍토의 조성과 학문적 성장
제7장 정착기定着期 (1971-1980)
산업 발전에 따른 문화재 정책의 활성화와 국책 발굴 체제의 정착
결어에 대신하여: 최근의 고고학적 경향과 제언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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