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색채로 개념들을 찧고 빻았던’ 당대 최고의 화가이며 사상가였던 고야를 소개한다. 저자는 그의 2천여 점에 달하는 판화ㆍ데생 등의 회화 작품과 글, 그리고 몇몇 행동에 드러난 그의 사상에 집중했다. 고야의 삶과 주요 작품의 분석보다는, 회화적 혁명의 의미와 계몽주의 사상에 그가 가져온 변화를 이야기한다.
책소개
계몽주의의 빛과 그늘을 탐색한 ‘사상가’ 고야
이성으로 폭력을 통제할 수 있을까? 무력으로 선(善)을 강요할 수 있는가?
프랑스 혁명의 결과 유럽 전역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스페인에서는 1808년에서 1813년까지 나라를 점령했던 나폴레옹 군이 통치의 수단으로 계몽주의를 이용했다. 프랑스 점령군과 스페인 민중의 극렬한 대치 속에 살인과 강간, 고문과 광기가 양 진영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계몽주의 사상을 지지하던 스페인의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모순에 빠져 괴로워했다.
이러한 혼란을 탁월하게 증언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마드리드의 계몽주의자들과 교류한 화가 고야였다. 고야는 계몽주의가 그늘 속에 모호하게 내버려 둔 모든 것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1793년부터 1828년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계속된 탐색을 통해 그는 의지와 이성만큼이나 인간의 삶을 조종하여 폭력과 광기에 이르게 하는 어두운 힘을 발견했다.
고야가 밝혀 보이는 것들은 우리 시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세계의 새로운 무질서를 염려하는 냉철한 관찰자 츠베탕 토도로프는 이 책에서 천재 예술가 고야의 강력한 ‘사상’을 조명한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함께 42점의 흑백 도판과 24점의 컬러 도판을 실었다.
▶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는 올해 2월 타계한 세계적 석학 츠베탕 토도로프의 역저로,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중점적으로 조명하였다. 익히 알려진 초상화나 종교화를 그린 궁정화가로서의 모습보다는, 나폴레옹 침략과 스페인 독립전쟁 시기 계몽주의 사상의 빛과 그늘을 수많은 데생을 통해 고발한 증언자이자 철학자로서의 고야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고야는 자신의 내적 필요에 따라 그리고 자기가 보는 그대로를 표현한 예술가였으며, 인간의 이성 이면에 도사린 폭력성과 광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고 깊게 성찰한 사상가였다. 이 책은 고야의 삶의 궤적과 더불어 이 특별한 화가가 이루어낸 예술적 혁신을 살펴보고, 계몽주의를 중심으로 인간 정신의 적나라한 모순을 파헤치고 있다.
고야, 우리 자신의 악마들을 불러내다
18세기 말, 고야의 조국 스페인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프랑스 혁명 직후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계몽주의는 스페인의 지배층과 엘리트들 사이에서 큰 공명을 일으켰고, 이 “깨인 자(계몽된 자)”들과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대립은 점점 더 심화되었다. 이 무렵 고야는 큰 병을 앓고 난 후 청각을 상실했으며, 알바 공작부인과의 연애에서 실연을 맛보았다. 그 결과 그는 커다란 예술적 변화를 겪게 되는데, 객관적 세계 속에 주관적 시선을 끌어들임과 동시에 자신만의 상상을 탐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상상의 세계는 마녀와 주술사, 유령, 악마 그리고 때로는 가면과 캐리커처로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그는 위험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온다는 것을, 가장 큰 수수께끼는 우리 각자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악마들을 불러내고자 하였다. 계몽주의자들은 마녀를 믿는 민중의 미신과 반계몽주의를 타도하고자 하였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야의 계획은 계몽주의자들을 만난다. 그는 인간 정신 속에 살고 있는 환상들을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내기를 원했으며, “이성의 빛의 부족으로 어둡고 혼탁해지거나 과도한 정념으로 손상된 인간 정신 속에서만 존재해 왔던 형태와 태도들을 눈에 보이게” 가시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시에 고야는 미신과 환상, 정념이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며 계몽주의의 진척이 인간을 모든 정념에서 해방시켰다고 주장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상상적인 것은 실제적인 것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실제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었다.
『변덕들』
1799년 출간된 판화집 『변덕들』은 이러한 고야의 예술관을 잘 드러내주는 80점의 판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판화들은 주제 면에서 크게 사회적 풍자, 성적인 우스개와 남녀 관계, 미신과 마녀 및 유령을 다루었다. 이 작품들은 당대의 세태를 풍자함과 동시에, 작가뿐 아니라 관람자들의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였다. 무질서와 혼란, 사육제로 가득 찬 이 판화집은 오늘날 통용되는 해석처럼 단순히 계몽주의자들의 강령과 일치하는 미신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 작품들에서는 그러한 비판과 인간 내면에 숨겨진 수수께끼를 드러내는 요소들이 매순간 서로 침투한다. 고야의 구상은 미신과 환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제어하는 것이었다. 고야는 건강과 병, 이성과 광기, 낮과 밤, 빛과 어둠처럼 명확한 대립을 이루는 범주들의 상호 침투와 불가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변덕들』에서는 철저한 이원성이 감지된다. 고야에게 이성과 비이성은 인간의 특성이며 똑같은 지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계몽주의의 이상에 공감하였으되, 자신의 ‘깨인’ 친구들과 달리 계몽주의가 공포와 야만으로 치달을 수 있음 또한 예감하였다.
『전쟁의 참화들』 그리고 계몽주의
복잡한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 스페인은 1808년부터 1813년까지 나폴레옹 군의 지배를 받는다. 점령자들이 내세운 사상적 무기는 바로 계몽주의였다. 이 ‘빛’의 사상으로 무장한 최초의 근대적 군대인 나폴레옹 군은 역시 최초의 조직적 저항군인 게릴라, 스페인 민중의 극렬한 무장 반격에 맞닥뜨린다. 시간이 갈수록 양쪽의 폭력은 극심해졌고, 한쪽에서 공격이 있을 때마다 보복과 더 잔혹한 공격이 이어졌다. 판화집 『전쟁의 참화들』에는 이 전쟁에 대한 고야의 중요한 예술적 반응이 담겨 있다. 아마도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고야는 전쟁의 모든 화려한 위용과 매력을 벗겨냈다. 고야의 전쟁 그림은 영웅적 장면이 아닌 추잡한 학살을 담아낸다. 최소한의 미화 시도도 없으며, 토막 난 몸과 겁탈당한 여자들, 목매달린 사람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고야는 계몽주의를 전파하고 독립을 위해 싸우며 신을 섬긴다는 고상한 계획들이 가져온 황폐한 결과를 그렸다. 그리고 선의 유혹이 악의 유혹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여기서 19세기 식민지 정복의 특징적인 도식을 다시 보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과 유럽 문명은 다른 나라를 점령하기 위한 구실 또는 변명으로 사용됨으로써 신뢰를 잃었고, 그 이후 식민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해 자행되는 정책적 위장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야는 ‘평화의 참화’라 불릴 만한 참혹한 사회적 현상들을 데생 연작으로 그려낸다. 여기에는 가톨릭교회와 종교 재판이 시민 사회에 휘두른 횡포 그리고 반대 진영을 택했던 모든 이들에게 가해진 박해, 고문, 사형 등이 포함된다.
고야의 유산: 이중의 삶, 이중의 작품세계
『변덕들』에서 출발하여 생을 다할 때까지 30년간 고야는 이중생활을 영위하는데, 이것은 매우 새롭고 특별한 창작의 방식이었다. 그는 삶의 한 부분, 즉 대중의 눈에 비치는 동안에는 당대의 사회 규칙을 따르고 왕실과 교유했다. 그리고 다른 부분, 곧 자신만의 사적인 세계에서는 마음껏 상상력을 펼쳤고, 이는 그로 하여금 전에 한 번도 탐험해 보지 않은 길로 인도했다. 이러한 내적 균열로 인해 그는 뚜렷이 구별되는 두 부류의 작품을 창작하는데, 하나는 전통에 부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적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전자가 ‘낮의’ 작품이라면, 후자는 ‘밤의’ 작품이다. 고야 이전과 이후 그 어떤 예술가도 이처럼 공식적인 창작과 은밀한 창작이라는 완전히 분리된 두 종류의 창작 활동을 지속적으로 한 경우는 없었다. 고야의 작품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 양과 질에서 압도적인 것은 바로 비밀스러운 ‘밤의’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의 주를 이루는 것은 데생과 판화였고, 고야는 많은 수의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창작하여 내밀히 간직했다.
고야의 작업은 뒤따르는 두 세기 동안 시각 예술 내에서 일어날 수많은 발전의 싹을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관성이란 결코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외부의 대상과 맺는 관계를 의미했다. 고야의 세계는 자의적인 것의 지배나 소통의 완전한 거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보편적인 인류 공동체에게 호소할 수 있는 방식을 간직했다.(그 공동체가 설령 후대에 속한다 할지라도.) 고야의 그림들이 오늘날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가 최근 지구 상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메아리를 그의 그림들에서 찾아내는 것은, 바로 그가 인간의 행동과 태도와 몸짓을 이해하고 가장 진실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온 힘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고야가 열망하는 진실은 눈에 보이는 형태들의 진실이 아니라 열망, 사랑, 폭력, 전쟁, 광기의 진실이었다.
지은이 | 츠베탕 토도로프 (Tzvetan Todorov)
불가리아 태생의 프랑스 역사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문학 평론가이다. 소피아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롤랑 바르트의 영향으로 구조주의 문학 평론을 시작했다. 이후 문학과 언어학뿐 아니라 철학, 역사학, 사상사 등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와 저술 활동을 왕성히 펼치며 세계적 지성으로 평가받았다. 휴머니즘에 뿌리를 두고 식민주의와 나치의 홀로코스트 문제를 연구하며 서구의 제국주의적 역사 인식을 비판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연구원장으로 재직했고,『환상문학 입문』(1970),『개인 예찬. 르네상스 플랑드르 회화론』(1970),『계몽주의 정신』(2000) 등 30여 권의 책을 썼다. 2017년 2월 타계했다.
옮긴이 | 류재화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트라스부르 2대학과 파리 3대학에서 공부했다.『클레브 공작부인』,『세상의 모든 아침』,『고슴도치의 우아함』같은 소설을 비롯해 여러 에세이와 인문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목차
1. 고야, 사상가
2. 고야, 입문하다
3. 예술 이론
4. 병과 그 영향
5. 치료와 재발, 그리고 알바 공작부인
6. 가면, 캐리커처 그리고 마녀
7. ‘변덕들’의 해석
8.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9. 나폴레옹의 침략
10. 전쟁의 참화들
11. 살인, 강간, 산적, 군인
12. 평화의 참화들
13. 희망을 갖다, 경계심을 품다
14. 두 가지 길
15. 두 번째 병, 검은 그림, 광기
16. 새로운 출발
17. 고야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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