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며 확장ㆍ변화해온 고유 특성을 들어, 여성의 자화상을 독자적 장르로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그 선상에서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약 180여 점의 작품을 불러오고, 시대별 특징을 추적해내거나 작가의 삶을 촘촘하게 들여다본다.
책소개
“이것이 나의 모습이고, 내가 믿는 바이다.”
여성 예술가는 자신의 얼굴로 무엇을 말하는가?
대상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자들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나 지위도 허락하지 않았다. 미술사의 흐름에서 여성은 창조자보다는 주로 재현의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여성 예술가들이 눈에 띄지 않던 시기에도 그들은 늘 존재했으며 여성 예술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언하고 주장했다.
1971년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은 「왜 오늘날까지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라는 글로 여성주의 미술사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로부터 27년 후, 1998년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의 존재 자체가 1970년대 이후 활발했던 여성주의 미술사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수년간 여성의 자화상 복제본을 수집해 온 프랜시스 보르젤로는 어느 날 자신의 서랍에서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 이미지를 정리하면서 시대별 특징을 발견했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지은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격변하는 사회 과정 속 여성의 위치를 생각하게끔 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의 놀라움은 점점 더 커져갔다. 많은 수의 자화상이 있다는 데 놀랐고, 그 다양성에 놀랐다. 소심함뿐 아니라 독창성에도 놀랐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화상은 내 눈으로 목격한 증거, 즉 여성의 자화상은 남성의 자화상과 다르며, 부족한 교육과 미온적인 지원을 이야기해온 전통적인 여성의 역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요청해왔다.”
초판 출간 당시 이 책의 서평을 실은 영국의 주간지 『옵서버』는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여성 미술가들이 오늘날 의도에 따라 자신의 이미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홍보 전문가만큼, 때로는 오히려 그보다 더 뛰어난 넉살을 보여준다”라며 여성 자화상의 매력을 격찬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한국어판은 2016년 영국에서 출간된 개정증보판을 번역한 것이다. 약 20년의 세월이 흐른 사이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춰 지은이는 오늘날 ‘셀카’ 시대의 여성 자화상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캔버스에 작업 중인 미술가를 보여주는 전통적인 자화상 형태부터 자전적인 요소가 담긴 오브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대에 걸친 여성의 자화상을 소개한다.
여성 미술가들이 남긴 자화상에 초점을 맞춘 지은이는 여성의 초상이 시대와 대응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한편으로 여성의 자화상을 독자적인 장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즉, 여성 미술가들이 자신의 흔적을 작품에 어떠한 방식으로 남겼고,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사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자화상에 어떻게 개입시켰는지 말이다.
여성 예술가는 항상 존재했다
프랜시스 보르젤로는 통사적으로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을 연구하며 여성의 자화상과 남성의 자화상 사이의 차이에 주목한다. 가령 조슈아 레이놀즈는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렘브란트는 티치아노의 초상화를 토대로 대가의 작품을 모방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렸다. 그에 반면 여성의 자화상은 시대적 특징과 제약이라는 한계 속에서 대중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그려져 왔다. 예컨대 16세기 여성 예술가들은 나이 든 여성을 동반한 자화상이나 음악과 관련된 주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으며, 18세기 말 이후 여성 예술가들은 이전에는 글에서만 다루어지거나 감추어졌던 임신, 출산, 성 정체성의 주제를 자화상에 도입시키는 등 시대적 제약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표현 방식과 주제를 확장해 나갔다.
남성은 대가의 작업실에서 일을 하거나 아카데미에 다니는 일련의 과정에서 기술을 익히며 유명한 걸작을 둘러보고 견문을 넓힐 수 있었지만, 여성의 경우 배움의 길이 열린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세기 후반까지 대부분의 미술학교는 여성의 입학 허가를 제한했으며, “여성이 결혼한 뒤에도 경력을 계속 이어나갈지 여부는 남편의 손에 달려 있었다.” 1880년대 파리에서 활동한 러시아 미술가 마리 바슈키르체프는 당대 여성이자 전문 미술가로 느끼는 심경을 자신의 일기에 토로하기도 했다.
“내가 열망하는 것은 혼자 돌아다니는 자유, 오고 갈 자유, 튀일리 궁전, 특히 뤽상브르 공원의 의자에 앉아 있을 자유, 아름다운 상점을 둘러볼 자유, 교회와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 밤에 오래된 길을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허락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미술가가 될 수 없는 그런 자유 말입니다. 나처럼 보호자를 대동해야 하고 루브르에 가려면 마차와 여성 동반자 또는 가족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보는 것으로부터 좋은 것을 많이 습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책은 남성이 미술계를 주도해온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화상 분야에서 뒤러나 렘브란트 같은 남성 미술가들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프랜시스 보르젤로는 여성의 자화상 일부를 구색 맞추기식으로 보여주는 것에 대항해 남성만큼이나 치열하게 고민한, 창조적 에너지를 지닌 여성 예술가가 미술계에 항상 존재했음을 여성 자화상의 역사를 통해 드러낸다. 백인 남성이 만든 서양미술사에서 누락되고 정당한 자리를 박탈당한 위대한 여성 미술가의 이름들을 소환하며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남성 중심의 반쪽짜리 미술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여성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400여 년간의 여정
지은이는 여성의 자화상을 독자적인 하나의 장르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고민하면서 자화상의 범위를 확장하고 변화시킨 것은 여성들의 자화상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고자 16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180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근거로 제시한다. 각 시대별 여성 자화상의 특징을 추출하여 거시적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각각의 작품에 집중해 다양한 여성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먼저 현존하는 최초의 여성 자화상은 13세기 조반니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성에 대하여』 속 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마르시아로 불리는 이 미술가는 그림 옆에 놓인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초상화를 그리는 자신을 묘사했다. 중세 필사본 삽화가인 클라리시아는 자신을 글자 ‘Q’의 꼬리로 표현하며 그림의 한쪽 구석에 그려 넣었다. 이들은 작품 안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작품 안에 자신의 모습을 삽입하면서 그 존재를 알렸다.
여성 미술가의 이름을 간간이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16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16세기 여성 화가들은 위엄과 자부심, 정숙함 등을 갖춘 품위 있는 여성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자화상을 그렸다. 조금이라도 단정치 못한 모습이라면 곧바로 도덕성을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가령 그림뿐 아니라 음악적 재능도 갖춘 ‘교양 있는 여성’임을 과시하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자화상이 다수 그려졌다. 소포니바 안귀솔라나 라비니아 폰타나 같은 미술가는 팔레트와 붓을 든 자신의 모습을 남겨 화가로서 자긍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당시 여성은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술가인 아버지를 둔 몇몇의 여성들만이 아버지의 화실에서 일을 도우며 그림 그리는 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여성의 자화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7세기다. 특히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극적인 분위기와 생동감으로 강렬하고 독창적인 자화상 유형을 창안했다.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은 자신을 ‘회화의 알레고리’로 등장시켜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기량을 한껏 드러낸 역작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여성성의 전통을 뚫고 나아갔다. 그밖에 플랑드르의 화가 클라라 페이터르스는 표면에 반사된 이미지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데 독보적인 솜씨를 뽐냈으며, 영국의 메리 빌은 ‘가족의 지원’을 통해 그녀가 직업 화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자화상을 통해 드러낸다.
18세기에는 교양 문화의 확산으로 아마추어 미술가들이 대거 등장하는 한편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과 앙겔리카 카우프만과 같은 미술가들이 이름을 알렸다. 비제르브룅은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발전시키며 1783년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후원을 받으며 매력적인 초상화가로 유명세를 떨쳤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제약이 있었기에 당대 미혼이었던 스타 미술가 로살바 카리에라는 남성 조수를 고용하는 것에 대한 괜한 억측을 막고자 여동생을 조수로 훈련시키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여성이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 자화상 속 실물보다 크게 묘사된 팔레트에서 당시 여성 예술가들의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다. 동물화가로 유럽과 미국에서 명성을 얻은 로자 보뇌로처럼, 이 시기의 여성 미술가는 성공을 위해 남장을 하기도 했고, 앨리스 오스틴과 프란시스 벤자민 존스턴은 사진과 같은 새로운 매체를 탐구하기도 했다.
20세기 여성 예술가들은 남성과 같은 지위를 얻기 위해 투쟁했다. 금기를 깨는 자화상 속 대담한 태도들은 그 노력을 나타낸다. 자신의 성적 취향을 매력적으로 드러내는 로메인 브룩스, 자화상에 고통의 개념을 반영한 프리다 칼로 등이 그 예이다. 지은이는 이 시기 미술사에서 남성 화가 그룹의 일원으로 여겨진 베르트 모리조나 로댕의 누드모델로 알려진 그웬 존 등의 자화상을 소개하며 주변인이었던 여성 화가를 중심으로 이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19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페미니즘의 영향이 여성의 자화상에도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살핀다. 사진 자화상을 작업한 신디 셔먼, 자신의 신체를 활용한 레베카 호른, 거구의 나체 초상화를 제작해 여성의 누드에 대한 편견을 뒤흔드는 제니 사빌 등 다양한 매체의 자화상 작업이 소개된다. 이 같은 작품은 자화상과 개념을 다루는 미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현대 자화상의 복잡한 성격을 드러내며, 앞으로의 여성 자화상 역시 흥미로운 발전을 보여줄 것을 짐작하게끔 한다.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당당하게 세상과 마주하다
서양미술사에서 19세기까지 예술의 주제로서 신화적 인물이나 역사적 영웅을 중심으로 발전한 남성의 창조성은 미술사의 중심축을 이룬다. 반면 미술을 지배하고 여성을 배제해온 남성 중심의 패러다임에 의해 ‘여성’과 관련된 것은 주로 장식적이거나 고급미술에 못 미치는 요소로 취급받고 구별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간과되어온 여성 미술가를 집중 조명한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동시에 이 책은 여성의 자화상이 시대의 요구와 개인의 욕구 사이에서 빚어진 결과임을 역설한다. 이 거대한 미술사에 담긴 다양한 여성의 자화상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또 여성이자 미술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첫 발판이 될 것이다.
지은이 | 프랜시스 보르젤로
런던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미술의 사회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누드를 벗기다』 『우리의 세계-르네상스 이후의 여성 미술가A World of Our Own: Women as Artists Since the Renaissance』 『누워 있는 누드Reclining Nude』 등이 있다.
옮긴이 | 주은정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일리야 카바코프의 설치에 나타난 제도 비판’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뒤샹 딕셔너리-예술가들의 예술가 뒤샹에 관한 208개의 단어』,『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프랜시스 베이컨과의 25년간의 인터뷰』,『다시, 그림이다-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내가, 그림이 되다-루시앙 프로이드의 초상화』 등이 있다.
목차
머리말
서론 • 자신을 보여주기
1. 16세기 • 서막
2. 17세기 • 새로운 자신감
3. 18세기 • 전문가와 아마추어
4. 19세기 • 문을 열다
5. 20세기 • 금기를 깨다
6. 미래로 • 페미니즘의 영향
결론 • 숨 고르기
주
참고문헌
미술가 소개
작품 목록
색인
감사의 말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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