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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 : 전시가 이즘ism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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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구기호609/전641ㅎ;2019
  • 저자명전영백 지음
  • 출판사한길사
  • 출판년도2019년 2월
  • ISBN9788935670475
  • 가격32,000원

상세정보

미술사의 여러 사조를 언급하며 ‘이들의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졌고,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배후에는 누가 어떤 역할로 활동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책이다. 새로운 사조가 형성된 결정적 순간에는 특별한 첫 전시가 있었음을 강조하며, 이들 전시사를 통해 20세기 미술을 소개한다. 야수주의ㆍ입체주의부터 포스트모던 아트로 전개되는 내용은, 당시 예술가ㆍ미술사가 아트딜러의 신화적 유산뿐 아니라 실패와 실수까지 인간사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수사가 지나쳐 주관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한편, 건조한 역사의 기록으로만 쓰이지 않기를 바랐다. 끝으로 20세기를 정리하며 ‘오늘날 미술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이즘’은 없다’고 선언한다.

책소개


전시, 현대미술의 방아쇠가 되다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은 현대미술의 중요한 분기마다 결정적 역할을 한 전시들을 소개한다. 이때 단순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소개하는 수준을 넘어 그 사건의 주인공들이 빠져든 고뇌, 맞닥뜨린 사건, 성공과 실패, 전후 맥락과 미술사적 영향력을 고루 다룬다.


① 야수주의, 입체주의

처음으로 현대미술이 등장하는 무대는 프랑스 파리였다. 당시 파리는 여러모로 미술의 중심이라 할 만했다. 18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서구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회로 군림한 관전살롱이 열리고 있었고 미술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관심도 굉장했다. 왕립 관전 살롱은 8주간 5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였다.

비록 주류는 아니었지만 이런 기름진 토양에 현대미술도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현대미술이 단번에 호응을 끌어낸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관객이 현대미술의 서막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현대미술 작가들은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전시회를 개최하고 작품을 소개했다. 대표적으로 야수주의의 《살롱 도톤》과 입체주의(Cubism)의 《앙데팡당》이다. 특히 야수주의는 사조의 이름 자체를 전시에서 얻었다. 1905년의 제3회 《살롱 도톤》에서 그들의 작품을 처음 본 평론가들이 “야수들”이라고 평가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 등의 회화는 정말 야수처럼 강렬하고 공격적인 색채와 파격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특히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 큰 화제가 되었다.


“스타인은 풍부한 형상언어가 진부한 주제를 신선하고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알아봤고, 독창적 표현방식에 감탄했다. 그녀가 문학가로서 고심하던 부분과 일정 부분 상통하는 면이 있었고, 스타인은 〈모자를 쓴 여인〉에서 가공하지 않은 강렬한 여성성의 표현에 주목했다. 이는 다른 그림들처럼 감미롭고 감상적인 처리가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_ 32쪽


야수주의가 《살롱 도톤》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체주의 역시 《앙데팡당》에서 이름을 얻었다. 1911년 열린 《앙데팡당》은 “열광적인 사건”이었다. 많은 이가 이 충격적인 전시를 보러 왔다. 당시 《앙데팡당》은 심사위원 없이 자유분방하게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래서인지 대부분 관람객이나 비평가는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도 같은 해 10월 열린 《살롱 도톤》에서 입체주의는 체계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다. 물론 《살롱 도톤》의 심사위원들도 입체주의에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정식적으로 평가받은 데 의의가 있다.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입체주의가 처음 소개된 것은 이보다 앞선 일이지만 ‘이즘’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11년의 《앙데팡당》과 《살롱 도톤》에서였다. 전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② 표현주의, 다다, 초현실주의

야수주의와 입체주의가 파리에서 현대미술의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독일에서는 표현주의가 등장했다. 다리파, 청기사파가 주축이 된 표현주의는 프랑스 현대미술에 영향받으면서도 “정신성의 깊이와 내면세계의 충동”이라는 독일적인 정체성을 점차 강하게 띠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반전의식과 패배주의 등이 결합해 신즉물주의로 이어진다.

다리파는 키르히너, 놀데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스스로 전시 장소를 모색했다. 개인화상, 후원자 등을 찾아 발품을 팔았고 1907년부터 3년간 드레스덴의 개인 갤러리들에서 전시를 열 수 있었다. 대규모 전시가 아니다 보니 아담한 공간에서 단순한 액자에 넣은 그림을 가깝게 볼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세련된 전시 스타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르주아 관람객을 대상으로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청기사파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그들의 첫 전시는 1911년 탄하우저 갤러리에서 열렸는데, 작가 14명의 작품 43점이 전시되었다. 규모가 큰 건 둘째 치고 애초에 “‘청기사파’라는 동질적 그룹의 작업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전시 동선도 복잡하게 구성해 관람객이든 평론가든 후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청기사파가 ‘이즘’으로 정립된 것은 1년 뒤인 1912년 『청기사 연감』을 출간하면서부터다. 그들은 이 책을 “‘내적 필연성’을 드러내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글’이라는 사회적 방편”으로 활용했다.

한편 스위스에서는 다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1916년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의 암울한 사회상을 반영해 기존 체제와 전통적 미학을 반대했다. ‘다다’라는 명칭 자체가 사전을 펼치고 칼을 꽂아 우연히 걸린 단어다. 정체성이 이러하다 보니 체계적인 조직을 갖춰 활동하기보다 여러 도시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시작은 스위스 취리히였고 베를린, 쾰른, 하노버, 파리를 지나 뉴욕까지 확산된다.

다다의 스타는 누가 뭐래도 뒤샹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살롱 큐비스트로 활동하던 뒤샹은 1915년 뉴욕으로 건너온 후부터 회화를 접고 레디메이드 작품에 집중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샘〉이다.

뒤샹의 〈샘〉이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력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조차 못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뒤샹은 이 작품을 ‘R.MUTT’라는 가명으로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앙데팡당》에 제출했다. 집행부는 이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작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앙데팡당》의 규칙상 반려하지 못하고 대신 칸막이벽 뒤에 숨겨놓았다. 이를 안 뒤샹이 작품을 찾아 모두가 보란 듯이 당당히 들고나왔다. 이후 스티글리츠에게 〈샘〉의 사진을 찍도록 했고, 그 사진은 『맹인』 제2호에 실렸다. 


“무트 씨의 〈샘〉은 비도덕적이 아니라 부조리하다. 욕조보다 더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철물점 쇼윈도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가구류다. 무트 씨가 샘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느냐 안 만들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그가 일상생활의 평범한 오브제를 취하여 그것의 일상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통하여 그는 그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낸 것이다.” _ 146쪽


다다만큼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이 바로 초현실주의다. 1938년 파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미술사적 의미를 획득한 초현실주의는 1942년에 뉴욕에서 열린 《금세기 미술》과 《초현실주의 제1차 서류전》에서 절정을 맞았다. 

《초현실주의 국제전》에서 단연 주목받은 것은 달리의 〈비 오는 택시〉였다. 갤러리 로비에 설치된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문을 지나 다시 밖으로 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부와 외부의 반전이라는 공간구성은 그 자체로 파격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실용적인 면이 주목받은 것도 이 전시의 특징이다. 전시에서 선보인 가구 디자인, 의복 패션 등이 상류층을 중심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파리의 《초현실주의 국제전》은 초현실주의의 독자적 미학을 넘어 미술 전반에 발상의 전환과 창작의 단초를 제시했다.”

뉴욕에서의 아방가르드 전시는 아트딜러 구겐하임의 역할이 지대했다. 구겐하임은 1942년 《금세기 미술전》을 마련할 때 건축가 키슬러를 고용하여 파격적인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키슬러는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장애물을 없애고 “인간적 견지”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했다. 작품을 절대 만져선 안 되는 전시가 아니라 건드려도 보고, 앉아서 쉬어도 보는 전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것은 구겐하임의 신념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③ 추상미술

추상미술은 모던아트의 꽃이라 불릴 만하다. 20세기 전반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이후 다양한 추상미술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1960년대 포스트모던 아트가 도래하기 전까지 활발히 현대미술을 추동했으니, 네덜란드의 데 스테일, 독일의 바우하우스, 프랑스의 앵포르멜, 미국의 뉴욕 스쿨이 대표적이다.

데 스테일은 보편성과 순수한 추상을 추구한 추상미술 운동으로 미술뿐 아니라 산업디자인과 가구, 건축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가로는 몬드리안, 반 두스뷔르흐, 리트벨트가 있는데, 이들의 첫 전시는 1923년 파리의 레포르 모데른 갤러리에서 열린 건축전이다. 미술의 중심지에서 당당히 데 스테일을 알린 이 전시에서 네덜란드는 모던 디자인과 건축이 시작된 곳으로 인정받는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에서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운영된 일종의 공동체였다. 이곳에서 선생과 학생은 장인과 견습공의 관계로 지냈다. 


“바우하우스는 순수미술의 이상과 디자인의 유용성을 총체적으로 추구했고, 이를 통해 다양한 미술 형태를 생산하고자 했다. 시대를 앞서간 이 기관은 현실과 괴리된 이전의 아카데미즘에 반대하여 실제 삶과 연관된 교육을 추구하였다.” _ 200쪽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는 1923년 열렸다. 이 전시에서 바우하우스는 이제까지의 활동을 총결산했다. 여기서 바우하우스는 ‘기술’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다. 즉 과거의 수공예에서 벗어난 기계기술을 바탕으로 예술과 기술의 통일을 선보인 것이다. 유럽 각지에서 1만 5,000명이 찾아오고 여러 매체에서 보도되었으니, 이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추상미술 작가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는 불행히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 때였다. 극도의 불안감과 죽음의 공포가 사회 곳곳에 팽배했다. 연장선에서 실존주의가 등장했으니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철학이자 운동이었다. 

앵포르멜은 예술에서의 실존주의라 할 수 있다. 유럽 문명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원시적 세계를 동경하며, 광인이나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미술 창작을 시도했다. 대표작가로는 포트리에, 뒤뷔페, 타피에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전시를 개최했다. 특히 타피에가 《또 다른 미술》을 열며 전쟁 직후 파리의 미술 경향을 규명하면서 앵포르멜 개념을 정식으로 제시했다. 그는 전시도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술은 다른 곳에서, 그 바깥에서, 우리가 다르게 지각하는 실재의 또 다른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미술은 다른 것이다. …진정한 창조자들은 발작, 마술, 무아지경 같은 예외적인 것만이 불가피한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_ 232쪽


사르트르는 타피에가 앵포르멜의 선구자로 꼽은 볼스의 작품에 대해 “세계 안의 존재의 공포를 시각화하는 실존적 행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유럽에 앵포르멜이 있었다면 미국에는 추상표현주의가 있었다. 뉴욕 스쿨이 이끈 추상표현주의의 중심에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럽의 최신 모던아트를 미국에 소개하는 동시에 미국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모던아트를 만들어나갔다. 당시 미국은 1913년에 열린 《아모리쇼》가 유럽 아방가르드를 성공적으로 소개한 뒤로, 뉴욕 현대미술관 등 대규모 미술관을 짓고 뉴딜 정책으로 예술가들을 여러 사업에 대거 동원했다. 구겐하임 같은 아트딜러도 활발히 활동했으니 가히 “미술의 새로운 르네상스”였다.

뉴욕 스쿨의 작가들은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폴록과 색면회화로 유명한 로스코, 뉴먼, 스틸 등이 있다. 그중 폴록은 제작 기법의 측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품 받침대 위에 올려놓는 간단한 행위로 상식을 뒤흔들었듯이 캔버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젤을 벗어난 캔버스는 미술작품의 축을 수직에서 수평으로 전환하고, 캔버스에 뿌려진 물감은 형태가 아니라 작가의 움직임, 즉 사건을 보여준다. 유럽의 미술 전통을 일거에 깨뜨린 폴록의 작품은 그 자체로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자신감이었다.


④ 포스트모던 아트

1960년대 초에 들어서면 유럽이든 미국이든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 사회의 리얼리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대신 대안과 개혁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도 이런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미술계의 주류를 이루던 모더니즘의 절정이었던 추상표현주의는 개인 주체의 정신과 내면으로만 침잠하는 양상을 띠었다. …더 이상 미술의 향방을 제시할 창의력이 고갈돼 있었다. 이러한 급변하는 시대상황은 그에 맞는 새로운 미술을 요구했고, 작가들은 개인보다는 사회 및 외부적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_ 303쪽

이런 이유로 등장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던 아트다. 팝아트는 포스트모던 아트의 여러 갈래 중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에서 태동한 팝아트는 미국에서 꽃피웠는데, 영국에서 열린 《이것이 내일이다》와 미국에서 열린 《새로운 리얼리스트들》이 대표적인 전시다. 다만 같은 영어권이라도 영국과 미국의 팝아트는 성격이 달랐다. 전자가 “자본주의 테크놀로지와 스펙터클을 다루면서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면 후자는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워홀이다.

워홀은 상업미술과 순수미술 사이의 경계에 있던 작가였다. 그는 “팝아트를 그저 단순히 상업적이고 가벼운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게 한다.” 실제로 재난과 죽음을 다룬 그의 연작은 어둡고 무거운 리얼리즘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극적인 개인사, 신비로운 분위기와 패션 등 포스트모던적인 수사(rhetoric)로 허상적인 이미지의 시대를 예견했다. “한마디로 표면과 깊이가 함께 가는 것이 워홀의 작업이었다.”

미국에서 팝아트가 유행하던 시기 프랑스에서는 누보 레알리즘이라는 과감한 전위미술 운동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누보 레알리즘 작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팽배한 물질문명과 소비사회를 단순히 ‘표상’(’representation)하는 데서 벗어나 이를 ‘차용’(appropriation)하고 다시 ‘제시’(presentation)하고자 했다. 굉장히 사회적 운동이었던 누보 레알리즘은 이렇게 새로운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누보 레알리즘의 주요 전시로는 클랭의 《텅 빔》과 아르망의 《가득 참》이 있다. 클랭의 전시는 제목 그대로 텅 빈 공간을 보여준다. 그의 의도는 ‘무형의 정신’(intangible spirit)으로 공간을 가득 채워 비물질적 회화를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를 상업 갤러리에서 시도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누보 레알리즘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돈을 내고 입장한 관람객들이 항의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아르망의 《가득 참》은 《텅 빔》에 대한 일종의 응답으로, 이번에는 갤러리를 온갖 쓰레기로 가득 채웠다. 


“《텅 빔》과 《가득 참》의 두 전시는 서로 반대되는 방법을 통해 같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클랭과 아르망은 …결국 당대 예술에 대한 적의를 공유했던 것이다. 클랭이 보여준 물질에 대한 거부는 아르망이 구현한 고급미술에 대한 거부와 만난 셈이다.” _ 364쪽


뉴욕에서 등장한 미니멀리즘도 포스트모던 아트의 주요한 갈래다. 저드, 모리스, 플래빈, 안드레 등이 주축이 된 미니멀리즘은 가장 이론적으로 잘 무장된 포스트모던 아트다. 몇몇 작가는 전문적으로 비평을 겸하기도 했다. 특히 저드와 모리스는 미니멀리즘 미학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할 정도였다. 

최초의 미니멀리즘 전시는 1966년 열린 《일차적 구조들》이다. 미니멀리즘 특유의 익명성, 침착함 등을 잘 보여준 이 전시는 특히 작품을 받침대 위가 아닌 벽이나 바닥에 직접 설치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시도였는데, 이로써 “고귀한 예술과 승화를 추구하는 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도전과 반항”을 드러냈다.

전시에 관한 대부분 비평은 우호적이었다. 《일차적 구조들》은 유럽에서의 68혁명과 미국에서의 반전운동 등 해방과 자유를 갈구하는 움직임과 잘 맞아떨어졌다. 이 전시에서 소개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은 무엇보다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과 변혁으로 받아들여졌다.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에서 소개하는 포스트모던 아트의 마지막 갈래는 개념미술이다. 개념미술은 “작품의 결과물보다 작가의 창조적 발상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아이디어 자체가 작품”이 된다고 본다. 


“개념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미술경향으로, 이전까지 미술의 핵심이었던 시각성에 반대하며 시각적 환영을 거부한다. 이는 미니멀리즘의 대상(object)조차 버리고 아이디어와 의미를 강조하며 미술의 본질에 대해 탐색한다.” _ 416쪽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전시로는 《1월 전》과 《태도가 형식이 될 때》가 있다. 특히 《태도가 형식이 될 때》는 “개념미술의 시작을 알리고 새 장을 연 전시”로 평가받는다. 반(反)형식,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개념미술, 대지미술 등 다양한 조류를 포괄한 이 전시는 작업의 과정과 행위, 즉 작가들의 ‘내적 태도’를 강조했다. 당연히 작품의 재료, 행위, 형태를 굉장히 폭넓게 허용했다. 심지어 참여 작가 69명 중 15명은 다른 곳에서 수행한 작업을 언급하는 정보나 문서를 전시했다.

이러한 개념미술은 포스트모던 아트의 다양한 흐름 중 한 갈래이자 ‘수뇌부’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포스트모던 아트의 주요 특성도 개념미술이 1960년대 말에 제기했던 문제의식에 기반을 둔다.


새로운 ‘이즘’은 없다

야수주의부터 개념미술까지 현대미술의 여러 전시와 사조, 작가를 소개한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은 끝에서 “오늘날 미술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이즘’은 없다”라고 선언한다. 


“1960년대 후반 후기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은 미술사는 더 이상 유사한 것끼리 범주화하고 한데 묶어 생각의 서랍에 분류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제한적 범주로 분리하는 방식의 ‘이즘’을 지양한다. 이제 ‘이즘’의 역사는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전히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최근의 유효한 ‘이즘’은 개념미술과 ‘포스트미니멀’(post-minimal) 이다.” _ 463쪽


연장선에서 이제 우리는 미술작품을 볼 때 표현에 앞서 작가의 아이디어를 먼저 헤아려 본다. 그리고 전시 기획자의 아이디어도 살펴본다. “기획자의 창의력이 얼마나 새로운 전시와 미술작품의 의의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술작품이 내게 던지는 의미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이때 의미는 ‘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사는 시대’와 연관된다. 


“미술은 우리를 보게 할 뿐 아니라 생각하게 한다. 1960년대 말 이후 미술은 아름다움보다 앎을 택했다. 미술은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넌 것이다.” _ 454쪽


오늘날 현대미술과 관련된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현대미술 전시가 심심치 않게 열리는 등 대중의 관심이 높다. 최근에도 바로 얼마 전인 4월 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마르셀 뒤샹》이 열렸다. 100여 일간의 전시 기간에 20만 명이 넘게 관람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전시로 8월 4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데이비드 호크니》가 열린다. 하지만 좀더 살펴보면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미술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다” 등의 오해와 곡해 역시 만연하다. 

그 이유는 아마 미술사 전반에 대한 맥락, 특히 현대미술의 꽃인 전시에 대해 공부해볼 기회가 없어서이지 않을까? 새로 출간된 『현대미술의 결정적 순간들』이 독자들에게 현대미술을 제대로 보는 법을 제시하는 책으로 다가갈 것을 기대한다.


지은이 | 전영백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영국 리즈대학교(Univ. of Leeds) 미술사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사학연구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2년부터 영국의 국제학술지 Journal of Visual Culture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박물관장 및 현대미술관장을 지낸 바 있고,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학부) 및 미술사학과(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코끼리의 방: 현대미술 거장들의 공간』, 『세잔의 사과: 현대 사상가들의 세잔 읽기』가 있고, 책임편집서로 『22명의 예술가, 시대와 소통하다: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자화상』 등이 있다. 번역서로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사 방법론』(공역), 『월드 스펙테이터』(공역) 등을 옮겼다. 한국연구재단 등재 논문으로 「데이빗 호크니의 ‘눈에 진실한’ 회화」, 「여행하는 작가주체와 장소성」, 「영국의 도시 공간과 현대미술」 등 18편을 썼다. 해외에서 발표된 논문으로 “Looking at Cezanne through his own eyes”, ‘Cezanne’s Portraits and Melancholia’ in Psychoanalysis and Image, “Korean Contemporary Art on British Soil in the Transnational Era” 등이 있다.



목차

책을 열며


1. 야수주의 

전통에 도전한 파격적 색채 실험

2. 입체주의 

관찰된 세계의 분석적 시각 탐구

3. 표현주의 

심리의 초상, 직접적인 감정의 투사

4. 다다 

뒤집는 생각, 일탈의 구상: 개념이 중요하다

5. 초현실주의 

현실과 꿈이 이루는 제3의 세계: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다

6. 유럽 추상미술 

묘사를 벗어난 시각의 자율성: 재현으로부터의 해방

7. 뉴욕 스쿨과 추상표현주의 

눈을 위한, 눈에 의한, 눈의 추상

8. 팝아트 

어깨에 힘을 뺀 비非권위적 미술

9. 누보 레알리즘 

환영을 벗고, 있는 그대로 접하는 현실

10. 미니멀리즘 

무관심하고 익명적인, 그래서 쿨한 미술

11. 개념미술 

아이디어가 미술이다


책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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