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유럽과 미국의 예술•초현실주의•젠더 이슈에 집중해온 저자가, 전쟁 시대에 싹튼 초현실주의 안에서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 프레임을 벗기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 예술가를 조명한다. 한 명의 예술가로서 개인적•직업적으로 더 성숙하고자 했던 그들의 싸움과, 서로의 지지자가 되어 예술성을 발전시킨 과정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책소개
남자들의 뮤즈가 아닌, 이제는 역사가 된 여성 예술가
“낯선 이름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들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뮤즈에서 예술가로』는 제1,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격랑의 시대에 싹튼 초현실주의, 그 안에서 오직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로서만 존재하기를 강요받던 여성들이 개인적, 직업적으로 더 성숙하기 위해 어떻게 고투했고, 서로의 지지자로서 예술성을 발전시킨 과정을 깊이 있게 연구한 휘트니 채드윅의 역작이다.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풍부한 도판과 함께 새롭게 조명되었다.
혼돈의 시대, 상실과 감정의 붕괴 속에서 투쟁한 여성 초현실주의자들
20세기 유럽과 미국의 미술을 연구함과 동시에 여성 예술가를 탐구해온 휘트니 채드윅은 1982년 화가이자 초현실주의의 역사를 몸소 살아낸 전설적 인물인 롤런드 펜로즈의 초대를 받아 그가 오랜 세월 소유하고 있는 팔리 농장을 찾아간다. 펜로즈는 시인 발랑틴 부예, 사진작가 리 밀러의 남편이자 후원자였고, 파블로 피카소, 알베르토 자코메티, 막스 에른스트 같은 거장들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채드윅이 초현실주의 역사에서 소홀히 취급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하자 펜로즈는 친절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자들에 대한 글은 쓰지 않는 편이 좋을 거요.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었소.”
당시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은 젊고 순수해서 초현실주의의 양분이 되는 무의식의 영역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팜므-앙팡(아이 같은 여자)이라는 이미지를 고안해냈다. 화가이자 시인인 알리스 라옹 팔렌(화가 볼프강 팔렌의 아내)은 루이스 캐럴의 소설 속 앨리스 같은 존재였고, 레오노라 캐링턴(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아내)은 ‘바람의 신부’였으며, 발랑틴(화가 롤런드 펜로즈의 아내)은 ‘가스코뉴에서 온 뮤즈’였다. 또 자클린 랑바 브르통(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아내)은 ‘지독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연인이었다. 이 여자들은 ‘예술가가 아닌 남자들의 뮤즈’였기에 그들의 연인이자 남편, 동료들이 천상의 왕국에서 추앙받는 동안 초현실주의가 등장한 지 수십 년이 지난 20세기 후반에도 저 아래 지옥에서 헤매고 있었다.
채드윅은 차츰 초현실주의 서클에 속했던 여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전쟁과 혼돈의 시대를 살았으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여자들, 어려웠던 시절에 남성 파트너 없이 여성 친구들에 의지해 살아간 여자들. 프랑스가 무너지고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당하고 런던에 수천 개의 포탄이 떨어지던 참혹한 재앙 한복판에서 이 여자들이 지속한 삶을 추적했다. 그들이 남긴 편지와 증언, 저술, 인터뷰를 통해 여러 삶의 조각들을 하나의 퍼즐로 맞추었고 마침내 유명한 남자의 뮤즈가 아닌, 독자 영역을 개척한 예술가이자 꿋꿋이 자기 삶을 꾸려나간 당당한 인간, 그리고 파시즘의 시대 야만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전사로 자리매김한 여자들의 초상을 그려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였고, 서로의 버팀목이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시인이자 콜라주 화가 ‘발랑틴 부에 펜로즈’, 시인 겸 화가 ‘알리스 라옹 팔렌’, 영국의 화가이자 작가 ‘레오노라 캐링턴’, 아르헨티나 출신의 화가 겸 디자이너 ‘레오노르 피니’,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화가이자 시인 ‘자클린 랑바 브르통’, 프랑스 사진작가 ‘클로드 카엉’과 삽화가 ‘쉬잔 말레르브’, 그리고 미국의 사진작가 ‘리 밀러’.
그동안 주로 이들 앞에는 유명 남성 예술가들의 ‘아내’ 혹은 ‘연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지만, 그러한 수식어를 지우고 이들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발전시킨 예술적 성과를 언급하면, 이들 여성들은 오롯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로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의 시대를 건너 훗날 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올리게 된 데에는 시절을 견딘 강인함과 서로의 예술적 가능성을 알아보고, 지지한 데에서 비롯한다.
시인 발랑틴과 알리스는 함께 인도를 여행하며 영적 신비주의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고, 레오노라와 레오노르는 전쟁 한복판에서 간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지옥 같은 날들을 버텨냈다. 남자의 뮤즈라는 역할과 예술가라는 야망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자클린 역시 프리다 칼로를 만나 영감을 주고받으며 홀로 설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클로드와 쉬잔은 독일군에 맞서 직접 레지스탕스 투쟁을 수행했고, 리 밀러 역시 종군 사진작가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이 여자들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여자들끼리 우정과 사랑, 위로와 공감을 나누며 새 길을 찾았다. 당시에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홀로 선 여성 예술가라는 롤모델이 없었기에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롤모델이자 동지, 스승이 되어주어야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1983년, 남성 초현실주의자들이 여성을 뮤즈로 보는 관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레오노라는 명료한 어조로 퉁명스럽게 답했다.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내겐 다른 누군가의 뮤즈가 될 시간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반항하고 예술가가 되는 법을 배우느라 바빴거든요.”
전쟁의 나날, 그 속에서 싹튼 초현실주의
이 책의 무대인 20세기는 전쟁의 시대이자 혁명의 시대였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간 이성이 어둠을 밝혀 삶을 낙원으로 인도하리라는 의기양양한 선언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과학기술의 산물인 전투기, 탱크, 기관총 그리고 독가스가 수천만 명의 인명을 앗아가고 문명의 기반을 죄다 파괴하고 만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화가 트리스탄 차라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다다이즘' 운동을 선언한다. 이들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이성을 부정하고 우연성, 자발성, 즉흥성을 숭배했고 기존 부르주아 문화를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의 후계자로, 인간의 어떤 능력보다 상상력을 우위에 두고 정신의 해방을 추구했으며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의 숨은 진실을 드러내려 했다. ‘사랑과 해방의 운동’을 제시하며 초현실주의를 창시한 앙드레 브르통을 주축으로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이브 탕기, 롤런드 펜로즈와 같은 남성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초현실주의를 문학과 예술에 한정하지 않고, 윤리·종교·정치면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대한 수정을 가하는 하나의 ‘이즘’으로 추구한다. 초현실주의는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막을 내리면서 짧은 기간 예술사에 영향을 미쳤으나, 훗날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 등의 바탕이 되었다.
참혹한 전쟁의 시기를 함께 건너온 여자들은 신산하기 짝이 없는 삶을 버티면서 끝내 살아남아 각자의 방식으로 초현실주의 서클의 일원으로서 반인륜적 전쟁의 잔혹함을 기록하고, 투쟁하며 예술가이기를 선언했다. 또한 초현실주의에 가담한 여자들은 예술 세계에만 머물기를 거부하고, 기존 체제의 파괴에 몰두한 다다이즘과 달리 초현실주의자들은 새로운 가치와 희망을 제시하려 했기에 사회혁명과 반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제는 역사가 된 여자들
초현실주의, 동성 간의 우정과 제2차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많은 여자들의 삶과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 알리스와 발랑틴, 프리다와 자클린, 레오노라와 레오노르, 클로드와 쉬잔, 그리고 리에게 초현실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달랐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는 공히 뮤즈의 역할과 예술가의 삶, 이 두 가지 삶의 맥락을 규정했다. 초현실주의는 ‘자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예술가로서, 작가로서 우뚝 서고 더 넓은 세상에서 자기 작품을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지적, 정치적, 예술적 환경을 제공했다. 이 여자들 가운데 일부는 남성 예술가들의 삶에서 뮤즈의 역할을 받아들였으나, 뮤즈의 삶이 예술가의 삶을 능가한다고 믿은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한 여자들을 예술가로,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준 사람들로 기억한다.
전쟁을 관통해 살아남은 이들에게 포성은 멎었다 해도 삶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전쟁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정신적 충격이 사라지지 않아 방황했고 친구들은 죽었으며 삶의 터전이 바뀌었고 수십 년을 함께한 배우자와 이별했고 전쟁 전과 전쟁 중이던 시절과는 다른 새로운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럼에도 마침내, 유명한 남자의 뮤즈가 아닌 독자적인 여성 예술가로 자리매김 되었으니 고통스런 삶에서 나름의 보상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이후의 여자들은 이들을 롤모델로 삼아 나아갈 수 있었을 테니 이들 선구자들은 한 가닥 위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 휘트니 채드윅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명예교수로서 20세기 유럽 및 미국의 예술, 초현실주의, 젠더 이슈에 대해 폭넓게 저술해왔다. 초현실주의의 여성들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인 『여성 예술가들과 초현실주의 운동Women Artists and the Surrealist Movement』과 전 세계 미술사 수업에서 필독서로 읽히는 『여성, 미술, 사회』의 저자이며, 실라 힉스Sheila Hicks, 모나 하툼Mona Hatoum, 위프레도 람Wifredo Lam, 날리니 말라니Nalini Malani,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 리 밀러Lee Miller의 전시 카탈로그에도 참여했다.
옮긴이 | 박다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관찰의 인문학』『죽은 숙녀들의 사회』『여자다운 게 어딨어』『원더우먼 허스토리』『불안에 대하여』 등이 있다.
목차
여는 글
1장 욕망의 연금술 -발랑틴 펜로즈와 알리스 라옹 팔렌, 인도 1937년
2장 두 명의 레오노르 -레오노라 캐링턴과 레오노르 피니, 생마르탱다르데슈 1938~41년
3장 “나의 두 눈으로 그대에게 편지를 쓰리” -프리다 칼로와 자클린 랑바 브르통, 멕시코와 파리 1938~45년
4장 이름 없는 병사들 -클로드 카엉, 쉬잔 말레르브, 자클린 랑바 브르통, 1938~45년 저지섬
5장 끝없는 전쟁들 -리 밀러와 발랑틴 펜로즈, 1940~78년
맺는 글
감사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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