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통해 부인 시게코 여사와 『나의 사랑 백남준』을 저술했던 저자가, 백남준의 일대기를 적었다. 백남준의 자취를 따라 현장을 찾고, 생의 장면들과 작품을 엮어 풀었다. 저자의 답사와 주요 사건 등을 담백하게 써 내려간 글은, ‘끊임없이 창조하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는 20세기의 다빈치’였던 그를 형용해주듯이 읽힌다.
책소개
코즈모폴리턴으로 살다 간 백남준,
한곳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를 살았던 백남준은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한곳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유목민과도 같은 삶을 꿈꾸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그는 한국, 일본, 독일, 미국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살았다. 덕분에 그가 남긴 삶의 흔적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윤택한 생활을 누리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을 배운 것은 물론 현대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같은 음악가들을 접하며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경기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좌우 세력 간 폭력 사건에 휘말리면서 떠밀리듯 한국을 떠나야 했다. 홍콩에서 유학하다가 잠시 귀국한 그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가족들과 일본의 고베로 건너갔다가 가마쿠라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곳에서 백남준은 선 사상과 조우하며 동양사상을 자신의 예술적 뿌리로 삼아 후일 유럽 사회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주효했다고 평가받는 〈TV 정원〉과 같은 대표작들을 만들어낸다. 1956년 도쿄대학에 진학해 현대음악과 철학을 천착하던 그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다. 독일에서 백남준은 플럭서스(기존의 예술과 문화를 거부하는 실험적인 미술 운동)의 중심에 서서 기존의 예술 언어와 가치관을 뒤흔드는 작품들을 선보이며 유럽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린다. 또한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조지 머추너스와 같은 전위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당시 백남준은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를 자처하며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하나〉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와 같은 파격적이고도 난해한 공연들을 선보인다.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기괴한 소음을 들려주는 식의 퍼포먼스가 이어졌는데, 언론에서는 ‘이런 것이 무슨 예술이냐’ ‘정신병자들이 병원에서 탈출했다’와 같은 악평을 쏟아냈다. 과격한 해프너로 유럽 예술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백남준은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지를 찾아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더욱더 실험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 당시 그는 문학과 미술에서 성性이 중요한 모티브로 쓰이는 반면 음악에서는 금기시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샬럿 무어먼과 함께 반라의 퍼포먼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공연한다. 두 사람은 공연 도중 외설죄로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이 다음 날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성적 금기에 대한 도발을 넘어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으로 비화한다. 법원이 두 사람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는 예술에 표현의 자유를 가져다준 기념비적 존재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비디오아트에서 위성아트 그리고 레이저아트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20세기의 다빈치
백남준은 난해하고 파괴적인 퍼포먼스만을 선보이는 단순한 괴짜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평생을 예술에 헌신하고 삶의 마지막까지 예술혼을 불살라가며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을 만큼 백남준의 관심사는 오로지 예술에 있었다. 그는 자연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고, 과학과 종교, 동양과 서양의 문화 등 이질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융합하는 데도 거침없었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낯선 분야라 할지라도 서슴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이처럼 경계를 짓지 않으며 자유로이 사고한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다. 늘 새로운 예술을 꿈꾸었던 백남준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매체로 눈을 돌렸고,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한 브라운관을 캔버스 삼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치며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해체한다. 1963년 독일의 부퍼탈에서 열린 첫 번째 전시회에서 비디오와 텔레비전을 활용한 작품을 본격적으로 선보이며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 당시 그가 선보인 작품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상식과 통념을 뒤집어놓을 뿐 아니라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돕는다.
백남준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고 새로운 프로젝트 구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는 똑같거나 비슷한 형식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대신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것인가를 늘 궁리하며 살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혔던 창조력으로 무장한 백남준은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없던 예술이 출현하도록 터를 닦았다. 비디오아트가 그랬고 그 뒤를 이은 위성아트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만들어낸 레이저아트도 새로운 예술을 향한 위대한 도전이었다.
- 〈에필로그〉 중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예술로 소통하며 평화를 꿈꾼 예술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 체제로 이어진 20세기를 경험한 백남준은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사회의 추악한 일면을 목도하며 예술가로서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가치를 모색한다. 소통의 부재가 비극을 몰고 왔다고 생각한 그는 쌍방향 소통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견인할 수 있으며,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미디어가 소통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 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작품들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바이 바이 키플링〉 그리고 〈세계와 손잡고〉 같은 위성아트다. 그에게 인공위성은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기에 작품을 위한 오브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이 세 작품을 일컬어 ‘위성 3부작 시리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위성아트들은 언어가 달라도 예술로 인류가 하나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세계와 손잡고〉 에는 소련의 음악가 세르게이 큐료힌과 그의 밴드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는데, 냉전 체제가 무너지기도 전에 이념을 초월한 공연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백남준의 작품들은 국가주의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비추어볼 때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진다. 더불어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바꾸어놓은 당시 20세기 시대상과 함께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동시에 일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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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남정호
중앙일보 부국장·국제선임기자. 뉴욕 특파원 시절, 유엔 본부 담당 기자로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활약을 가장 가까이에서 밀착 취재했다. 이 책은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밟으며 반기문의 치열한 고민과 카리스마, 인간적인 흡인력을 가감 없이 기록한 산물이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경대학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국제관계학 석사를 취득했으며 박사 과정 중 귀국해 언론계에 투신했다. 1988년 신문사에 입사해 사회부, 정치부, 국제부 등을 망라한 뒤 비서팀장을 거쳐 현재 국제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28년간 취재 일선을 떠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직접 발굴한 기사로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며 현장감 있는 필력을 유지하고 있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으며, 한국 언론계에서는 드물게 뉴욕, 런던, 브뤼셀 등 3개 지역 특파원으로 활약해 국제 정세의 흐름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국제통으로 인정받는다. 전 세계 60여 개국을 오가며 글로벌 이슈를 취재했으며,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 만모한 싱 인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 말레이시아 총리 등 전·현직 정상급 인사들을 인터뷰했다. 특히 본질과 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한 심층적 기사를 편안한 서술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2007년에는 ‘유엔기자협회UNCA’ 부회장에 당선되어, 아시아 국가 소속 언론인으로는 유일하게 회장단으로 활동했다. 한국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1993년 한국기자협회상을 수상했다.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WC의 ‘제퍼슨 펠로Jefferson Fellow’로 선발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백남준의 미망인 구보타 시게코를 심층 인터뷰해 출간한 《나의 사랑, 백남준》이 있다.
목차
PROLOGUE 21세기는 1984년 1월 1일부터 시작된다
01 나의 환희는 거칠 것 없어라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다
종로의 아이
유년의 기억에서 영감을 얻다
똑똑하고 병약했던 부잣집 도련님
마르크스와 쇤베르크에 빠져들다
02 일본에서의 운명적인 만남
고국을 그리워하다
〈TV 부처〉, 동서양이 하나 되다
도쿄대에서 마주친 인물들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
평생의 후원자, 와타리 시즈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 아베 슈야
03 세상에 없던 새로운 예술을 꿈꾸다
유쾌한 괴짜들의 향연
나의 시대는 케이지를 만나기 전과 그 후로 나뉜다
예술계에 새롭게 떠오른 앙팡테리블
영원한 친구 보이스를 만나다
비디오아트의 탄생
04 끝나지 않은 백남준의 예술
뉴욕에 입성하다
성적 해방을 부르짖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예술적 동지에서 인생의 반려자로
신시내티의 스튜디오에서 불거진 위작 논란
정보화 시대의 묵시록, 〈전자 초고속도로〉
위성을 이용한 우주 오페라
야곱의 사다리에 오른 백남준
EPILOGUE 20세기의 다빈치
백남준 예술의 키워드
백남준 생애의 결정적 장면
주석 및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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