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의•계파•형식 등에 얽매이지 않았던 화가이자 교육자, 이동훈의 주요 작품을 선별해 엮었다. 1940-84년까지 대표작 57점을 풍경•정물 중심으로 엄선했다. ‘수도자의 엄격함과 어린아이의 단순함을 함께 지닌’ 그의 일대기는 미술사학자 김경연이, 작품론은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쓴 것을 지금의 표기법에 맞게 수정하고 오류를 바로잡아 수록했다.
책소개
“그가 남긴 예술 세계는 역사적 관점에서 재음미, 재인식의 대상이 되었다. 후인들의 이 작업은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명백한 것은 그가 한없이 사랑했던 농촌의 정경과 시골의 순박한 풍정 및 자연미 표현으로 일관한 그의 철저한 예술 궤적이 우리의 근대, 현대 서양화사(西洋畵史)의 그 경향 계보에서 가장 뚜렷한 작가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구열
화가이자 교육자인 이동훈(李東勳, 1903‒1984)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한 예술가에 대한 평가는 그가 실현한 세계를 깊게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하지만, 대부분 특정 경향에 치우쳐 다양성은 무시되고 진지하게 살펴야 하는 작가가 과소평가되곤 한다. 이동훈도 바로 그런 예술가 중 하나다. 평생 어떤 세속적 욕망도 보이지 않은 고집스런 인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일에는 무관심했고, 여전히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2012년 『이동훈 평전』을 출간해 그의 작품과 생애를 정리했던 열화당은, 이번에 그의 주요작품을 선별한 작품집을 준비했다. 1985년 그의 작품 171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고 이듬해인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주관으로 회고전 개최, 유작집 발간이 이어졌지만, 이미 30년도 더 된 일이다. 아직까지 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는 작품집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비록 소박한 규모이지만 이 책 출간이 지니는 의미를 말해 준다.
화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우직한 삶
평북 태천에서 태어난 이동훈의 삶의 여정은 이후 신의주, 경성, 대전, 서울로 이어진다. 그리고 평생 오십팔 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며 쉼 없이 그림을 그렸다. 남자라면 당연히 올라가야 한다고 여길 교장, 교감의 자리도 마다하고 평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직 작업에 몰두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런 그를 제자들은 존경의 마음으로 따랐고, ‘황소의 웃음’을 닮았다고 하여 ‘소를 닮은 화가’ ‘소처럼 걷는〔牛步〕 화가’라 부르기도 했다.(실제로 이동훈의 그림에는 소가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미술사학자 김경연은 「우보(牛步)의 화가 이동훈」에서, 누구보다도 작품과 삶이 일치했던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의 자취를 좇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마치 그의 작품에 언제나 등장하는 산처럼, 소처럼, 살구나무와 강물처럼. 꿈쩍하지 않고 다만 소박하고 따뜻하며 강했다. 이는 곧 이동훈 자신이기도 했다. 그는 수도자의 엄격함과 어린 아이의 단순함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풍경들, 소소한 사물들에 대한 애정을 그림에 대한 갈망 속에 녹여낼 수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품성이 녹아든 그림은 우리네 산과 들 그리고 바다를 성실한 사실주의와 회화적 표현성으로 담아 전면이 조화롭다. 그는 체질적으로 평화로운 향토주의 예술을 추구했고, 자신의 마음을 그 아름다움 속에 정직히 반영했다.
왜색에 물들지 않은 우리 고유의 색
이동훈 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무엇보다 ‘왜색’이 없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을 통해 서양화가 들어와 이를 받아들인 일세대 화가이지만, 오히려 어느 누구보다 한국의 토속적 풍경을 담고 있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면서도 특정 주의(主義)나 계파, 형식 등에 얽매이지 않았다. 평생을 교사로 일하며 스스로 엄격함, 성실함을 실천한 기질이 더해져 특유의 질박한 분위기를 이룬다. 그의 눈과 마음과 화필은 언제나 농촌, 목장, 계곡, 어촌 앞에서 화의(畵意)를 발휘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이 책에 실린 글 「향토미와 자연애(自然愛)의 시각」에서 “기교적인 면이 결코 두드러지지 않으면서 선과 필치와 색채 표현 및 화면 분위기가 깊고 다감하며 서정이 넘치는 내밀성, 그것이 이동훈 예술의 본질이었다”고 그의 작품을 평가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우리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그를 소중한 존재로 주목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1940년부터 1984년까지 그의 대표작 57점을 풍경과 정물 중심으로 엄선했고, 미술사학자 김경연이 쓴 작가의 일대기와, 얼마 전 타계한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생전에 쓴 작품론을 지금의 표기법에 맞게 수정하고 오류를 바로잡아 수록했다.
지은이 | 이동훈
1903년 평안북도 태천(泰川)의 유복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의주공립농업학교, 1926년 평북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서울의 보통학교로 옮겨 「서화협회전」 「조선미술전람회전」 등에 참여하며 활동했다. 1945년 봄에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내려와 대전공업학교를 거쳐 1947년부터 대전사범학교에 정착하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자연환경과 목장, 계룡산의 웅장하고 계절적인 변화의 산용(山容)이며 산록(山麓) 또는 계곡 등 자연미와 풍경미의 정감을 화폭에 담았다.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목장의 아침'으로 특선, 제2회 「국전」에서도 목장을 그린 작품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제4회 「국전」부터 추천작가로 계속 출품했고,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보였다. 1969년, 대전사범학교가 개칭된 충남고등학교에서 사십오 년간의 교직생활을 명예롭게 퇴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수도여사범대학(지금의 세종대)에서 강의했다. 1976년 「국전」에서 '어촌의 광장'으로 초대작가상을 받았고, 그 특전으로 칠십사 세의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약 삼 개월간 유럽여행을 하였다. 1984년 1월 잔설의 빙판 위에서 낙상, 5월에 팔십일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85년 유작 백칠십일 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고,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주관으로 회고전이 개최되고 유작집이 발간되었다. 2003년 대전광역시에서 이동훈미술상이 제정되었고, 이동훈기념사업회 주최, 중도일보사와 대전시립미술관 주관으로 2019년까지 17회 수상자가 시상, 전시되고 있다. 1955년 충청남도 교육공로자상, 1958년 충청남도문화상, 1963년 대한민국문화포장, 1968년 한국미술교육공로상을 수상했고, 1985년 대한민국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글 | 김경연
1965년생으로,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대전 이응노미술관에서 이응노와 한국현대미술에 대해 연구 중이다. 저서로 『이동훈 평전』 『한국추상미술의 큰 자취 화가 하인두』(공저)가 있다.
글 | 이구열
황해도 연백 출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기자이자 미술평론가이다. 1959년부터 1973년까지 여러 신문사에서 미술기자로 일했고, 1975년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열어 사십 년 동안 미술계와 문화재 발굴 현장을 꾸준히 기록했다. 주요 저서로 『한국근대미술산고』 『한국문화재비화』(개정판 『한국문화재수난사』), 『근대한국미술의 전개』 『근대한국화의 흐름』 『북한미술 50년』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나혜석』 등이 있다.
목차
우보(牛步)의 화가 이동훈 / 김경연
향토미와 자연애(自然愛)의 시각 / 이구열
작품
수록 작품 목록
이동훈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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