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이라는 주제에 집중했다. ‘혁신의 역사’로도 치환될 수 있는 미술사를 가로지르며 혁신의 비밀을 파헤치고, 경제와 산업 분야의 혁신을 통찰하여 오늘날의 풍요•편리•안전 등이 그 결실임을 역설한다. 미술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부단히 판단 중지를 행하여 마주한 혁신의 사례들은, ‘혁신에서 길을 찾다’, ‘혁신의 동력’, ‘혁신을 이룬 미술가’로 나누어 정리됐다.
책소개
해묵은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온 미술
그 혁신의 역사를 탐구한다!
미술의 혁신을 넘어 일상의 혁명으로
고급한 미술 지식을 맛깔나게 풀어놓으며 풍요로운 지적 만찬을 선사해온 미술평론가 이주헌이 새 책을 펴냈다. 이번에 그가 천착한 주제는 ‘혁신’이다. 이주헌은 미술사의 시공간을 능란하게 가로지르며 혁신의 비밀을 파헤칠 뿐 아니라 경제와 산업 분야의 혁신을 통찰하여 오늘날의 풍요와 편리, 안전 등이 혁신의 결실임을 역설하고 있다. 현대인이 하루종일 손에서 놓지 않는 스마트폰의 경우에도 ‘혁신’이 초점이 된 지 오래고, 심지어 정부 운영과 예술 창작에서도 혁신은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우리가 혁신, 하면 떠올리게 되는 조지프 슘페터는 혁신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끄는 힘이라고 보았다. 이때 주인공은 물론 자본가이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다. 까마득한 석기시대, 엄혹한 환경에서 생존이 제일가는 목표이던 시대에도 인류는 동굴 벽에 놀랄 만큼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이처럼 인류 문명이 태동하기 전에 이미 꽃을 피웠을 정도로 미술은 원초적인 활동이며 혁신의 DNA가 내장되어 있다. 사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미술사 자체가 혁신의 역사이며 (자본주의의 주인공이 자본가이듯) 이 역사의 주인공은 위대한 미술가들이었다. 슘페터가 ‘창조적 파괴’를 내세웠듯이 미술가들도 기존 이념과 체제에 길들지 않고 파괴와 창조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다. 이들은 미술의 천재일 뿐 아니라 혁신의 천재였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르네상스, 이후 근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업적을 남긴 미술가들의 혁신의 비결은 무엇일까?
★ 패턴을 찾아라
조형예술에서 패턴은 숨은 질서를 암시한다. 우주의 빗장을 풀고 비밀의 장막을 들추어내면 나타나는 비결 같은 느낌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조각과 그림에서는 정형화한 패턴으로 이미지를 통제하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패턴을 이용해 조형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큰 돌을 쪼아 사람의 형상을 제작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직육면체의 기둥 네 면에 똑같은 크기의 ‘그리드’, 곧 모눈을 그린다. 이 종이의 해당 면에 사람의 모습을 동일 비율로 그린 후에 네 방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나가면 서로 만나는 부분에서 계획했던 형상이 드러난다. 이러한 혁신적인 방식은 이집트 미술의 드높은 성취를 견인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에도 전파되어 서양 조각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턴이 곧 답이라는 사실은 오늘날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특히 중요성이 부각된 역학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국 의사 존 스노는 콜레라가 발생했을 때 환자들의 집을 지도에 표시했다. 그러자 특정 지역에 환자가 몰리는 도형적 패턴이 나타났고 해당 지역에서 펌프로 물을 길어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콜레라가 발병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처럼 역학은 패턴의 중요성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학문이라 할 수 있다.
★ 비판적으로 사고하라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실제 사람의 형상을 재현한 것 같은 사실적인 표현에 성공했다. 다른 고대 문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완벽한 사실주의 미학은 그리스인 특유의 비판적 사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판적 사고에서 유래한 혁신은 휴머니즘에 기반을 두었다. 바로 인간의 관심사와 능력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비판적 사고와 더불어 세속적인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혁신적 사고로 눈앞의 현상을 부단히 검증하고 보수적이고 인습적인 전통을 타파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표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논리적으로 수긍이 되면 표현을 즉각 수정하는 태도가 자리잡게 된다. ‘비판―수정―비판―수정’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표현은 점점 더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 순혈이 아닌 혼혈이 길이다
“지금껏 BTS는 무라카미 하루키, 어슐러 르 귄, 오웰, 헤세 그리고 니체를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해왔다.” 영국의 『가디언』은 BTS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렇듯 크게 번창하고 국경을 넘어 보편화되는 문화는 강력한 혼융의 요소가 있다. 이종교배 없이는 문화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고 전 지구적으로 퍼져나가 번창하기도 어렵다.
기독교 미술을 보자. 유대 전통에서는 무엇보다 우상숭배를 거부해서 이미지가 자리잡을 여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특히 유대인이 아닌) 개종한 기독교도들은 토착적인 조형 전통을 기독교 안으로 가져와 그리스와 로마, 이집트 등지의 미술 전통이 자연스레 녹아들게 되었다. 긴 머리에 수염이 난 전형적인 예수의 이미지는 전혀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물고기나 닻 같은 픽토그램으로 표현되었던 예수가 점차 수염이 없는 젊은 철학자의 모습으로 그려진 때는 2세기 말이다. 이후 신성을 나타내는 후광이 첨가되고, 긴 머리에 수염을 기른 이미지가 절대적인 표준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놀랍게도 이교의 신인 제우스와 아폴론 도상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제우스에게서 긴 머리와 수염을, 아폴론에게서 매끈한 얼굴과 몸매를 가져와 합성한 것이다. 혼융과 이종교배를 통한 혁신의 사례는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바로 퓨전사극, 퓨전요리, 퓨전국악 등이다.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우리 어린이 놀이를 서바이벌 영화에 접목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혼융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 관점을 바꾸라, 새 세계가 열린다
갑작스러운 사회변화는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사물과 현상을 보는 생각과 태도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미술에서 이러한 전환을 이룬 일대 사건은 바로 원근법의 창안이다. 르네상스시대에 투시원근법이 창안됨으로써 화가들은 비로소 2차원 평면에 3차원 공간을 사실적으로 구현하게 되었다. 이전의 화가들은 실제 공간의 질서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중요한 대상을 크게, 화면 중앙에 배치하고, 그렇지 않은 대상은 작게, 화면 주변부에 배치했다. 물리적 사실보다 수직적 사회 질서와 이에 고정된 사람들의 관념을 기준 삼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시원근법이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나온 이유가 있다. 서양에서 개인에 대한 관념과 개인주의가 일찍 꽃피었기 때문이다. 개인을 사회의 맥락에서 분리해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않으면 원근법이 나올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미술사의 대변혁을 일으킨 원근법이 오늘날에는 더이상 절대 규범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수백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근법, 아니 회화와 예술 자체에 대한 관념이 바뀌었고, 이에 따라 예술가들도 관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 의미를 부여하라
어떤 비즈니스든 그저 이윤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 더 큰 차원의 의미를 끌어내지 않으면 경제적 가치 창출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혁신이 없으면 성장할 수 없고, 혁신이란 근원적인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문화 혁신의 대명사인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술가와 학자를 배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에는 신성모독과 같은 죄로 다뤘던 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가문이 어떻게 서양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변혁을 이루어냈을까? 단순한 경제활동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들의 사업을 문화적 의미를 창출하는 장대한 프로젝트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이름만 뺀 나머지 모든 면에서 왕”이었으나 정통성이 없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는 무엇보다 피렌체 여론의 지지가 간절했다. 그래서 메디치가 사람들은 대를 이어 피렌체의 문화적 번영과 시민 생활의 풍요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었다. 성당과 수도원, 도서관과 대학을 짓고 자선기금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미켈란젤로,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의 막강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런 활동은 피렌체가 로마공화정의 계승자로서 ‘새로운 로마’라고 자부하던 시민들에게 큰 자부심과 긍지를 안겨주었다. 한마디로 시민의 삶에 ‘아름다운 의미’를 더해준 것이다. 이처럼 의미를 중시하고 의미를 창출하는 행위는 혁신에 불을 지필 뿐 아니라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는 창조의 에너지가 된다.
★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라
동양의 산수화와 달리 서양의 유화는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할 수 있다. 수정과 개선, 바로 여기서 혁신이 나온다. 혁신은 한걸음에 달성되기보다 부단한 수정과 개선을 거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골더와 텔리스가 500개 브랜드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신제품으로 시장을 창조한 기업은 47퍼센트, 곧 절반 가까이 실패한 반면, 바로 뒤이어 시장에 들어가 제품을 개선한 기업은 오로지 8퍼센트만 실패했다. “서둘러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남의 아이디어를 개선하는 게 훨씬 쉽기 때문”이다. 페이스북과 구글도 늦게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이런 전략으로 성공했다. ‘맨 처음 나온 것’이 가장 오래가는 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오래간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밑그림을 잡고 채색을 시도하는 초반에는 실수나 문제가 발생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계속 고쳐가며 그릴 수 있다면 결점이 개선되어 완성도가 크게 높아질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과정을 거쳐 서양미술사의 위대한 걸작들이 탄생했다. 미국 화가 윌럼 더 쿠닝은 “유화가 창안된 이유는 바로 (사람의) 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독특한 양감과 질감, 빛깔을 지닌 사람의 살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전의 재료들은 한계가 많았다. 특유의 촉감까지 환기시키며 생생히 묘사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붓질을 반복해 다층적인 표현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고, 바로 그런 표현에 최적화된 그림으로서 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개선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혁신 경쟁의 승자가 되게 마련이다.
★ 다양성은 혁신의 아버지
다양성은 혁신을 낳는다. 구성원의 ‘색깔’이 다양할수록 공동체는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낸다. 다양성의 확대는 미술사에서도 빈번히 혁신을 초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황금시대’를 구가한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이다. 이 시기에 유명한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 판 레인을 비롯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초상화의 거장 프란스 할스 같은 대가들이 쏟아져나왔고, 서양 회화의 주요 장르가 되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이 본격적으로 분화,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에 기반이 된 것이 네덜란드의 민족적·종교적·문화적 다양성이었다.
16세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천명했다. 그러자 스페인이 장악한 네덜란드 남부(플랑드르) 지역 사람들뿐 아니라 유대인을 비롯해 프랑스의 위그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로운 북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650년 통계에 따르면 암스테르담 인구 가운데 3분이 1이 외국계이거나 그 후손들이었다. 네덜란드는 자유와 관용의 기초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 가치를 수용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관념과 가치를 선도한 경제 강국, 시민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장르의 회화들이 뿌리내린 문화 강국이 되었다.
★ 관찰하고 관찰하고 또 관찰하라
관찰하라. 진득하게 지켜볼수록 관찰자는 고유한 편견과 경험에 따라 남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창조와 혁신을 이루는 것이다. 비타민 C나 (흔히 찍찍이라고 부르는) 벨크로 테이프의 발견도 끈질긴 관찰의 소산이다. 사물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미술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무수히 많이,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만년을 기록한 영상 중에는 모네가 지베르니 정원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있다. 러닝 타임 1분 15초 동안 모네는 무려 스물세 차례나 연못 쪽을 바라보았다. 모네는 그토록 집요한 관찰자였고, 그런 관찰 능력으로 근대미술의 거장으로 우뚝 섰다.
진정한 관찰은 단순히 사물의 외양을 파악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물의 질서를 꿰뚫어보고 오리지널한 시각으로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모네는 ‘루앙 대성당’ 연작을 30여 점 그렸는데, 동일한 성당을 비추는 빛은 새벽, 아침, 한낮, 오후, 해 질 무렵, 안개 끼었을 때, 비가 올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순간순간 다 다르다. 모네는 성당에 어린 다양한 빛을 하나하나 세심히 관찰해 표현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 시리즈의 진정한 주제가 성당이 아니라 빛임을 보여주었다.
★ 무의식이 창조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화가들은 창작 활동을 하면서 ‘머리’가 생각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곧잘 좌절한다. 일상에서는 그리도 유용한 머리가 창조 과정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아예 이성이나 의식의 체계로부터 일탈해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대표적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을 들 수 있다. 이성의 통제 없이, 또 미학적・윤리적인 선입관 없이 무의식의 힘을 최대한 활용한 표현법이다. 화가는 잠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심지어 약까지 먹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 나중에 의식이 온전히 돌아왔을 때는 자신이 보아도 낯설고 새로운 그림이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바다 위 공중에 커다란 바위가 떠 있거나(「피레네의 성」), 해변에 상체는 물고기인데 하체는 여인인 존재가 누워 있는(「집단적 창안」) 마그리트의 그림과, 시계들이 흐물흐물하게 축 늘어져 있고(「기억의 지속」) 여인의 몸이 사람의 얼굴이 되기도 하는(「겁탈」) 달리의 그림이 그렇다. 달리는 낮잠을 자다 갑자기 깨어나 연필을 들고는 꿈에 보인 이미지들을 재빨리 스케치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독특한 세계를 창조했다. 창의력 컨설턴트 마이클 미칼코는 달리의 이 아이디어 창출법에 감명을 받아 사업가들에게 이 기법을 그대로 활용해보라고 권했다.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도중에 산책을 하거나 낮잠을 자는 식으로 주의를 돌려 무의식이 개입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이 문제와 관련된 사고의 ‘인큐베이팅’을 시작해 의식보다 더 양호하게 문제의 복잡성과 장단점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 단순화하라
“버튼을 제거하여 장치를 단순화했고, 기능을 줄여 소프트웨어를 단순화했으며, 옵션을 없애 인터페이스를 단순화했다.” 애플사의 창립자인 스티브 잡스 이야기다. 잡스는 자신이 원하는 단순화의 목표가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경영 컨설턴트 코치와 록우드는 비즈니스 분야에서 “거의 모든 위대한 성공 신화는 단순화의 신화”라고 단언한다. 일례로 포드는 기존 제품을 재설계해 표준 모델 하나만을 만듦으로써 자동차의 가격을 매우 저렴하게 ‘단순화’했다. 이로 인해 “1920년 포드사의 자동차 판매량은 1905년과 1906년에 비해 무려 781배나 증가했다”.
미술은 단순화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것을 일깨워주는 예술이다. 특히 추상미술은 지극한 단순성을 추구하는 예술이다. 20세기 추상화의 선구자 몬드리안의 나무 그림들에서 이를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저녁, 붉은 나무」(1909)를 보면 나무의 형태가 꽤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회색 나무」(1911)에 이르면 훨씬 단순화된 표현이 나타나고, 「꽃 피는 사과나무」(1912)에서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추상화된 형태를 보게 된다. 몬드리안은 대상을 지속적으로 단순화함으로써 세계의 가장 근원적인 형상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추상미술의 탄생과 전개는 산업화를 통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인류가 마침내 ‘버림의 미학’에 의지해 ‘다다익선’이 아니라 ‘소소익선(少少益善)’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확산시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추상미술은 우리에게 불필요한 삶의 무게를 덜라는 신호를 보내주는 현대의 나침반 같은 예술이라 하겠다.
한계를 축복으로 바꾸는 혁신의 힘
모든 혁신가에게 ‘한계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혁신은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빚어낸 아름다운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었다면 혁신도 없었을 터이다. 생각해보자. 저 먼 선사시대의 인류는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한계 속에서 살았기에 혁신은 곧 생존술이었다. 혁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 곤경에 처하고 한계에 부딪칠수록 혁신에 매달렸다.
미술 또한 재료와 기술, 방법의 혁신을 통해 부단히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해왔다. 석기시대를 거치면서 석조(石彫)를 발달시켰고,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브론즈 조각을 발달시켰다. 숯을 만드는 기술은 먹을 만드는 기술로 나아갔고, 튼튼한 돛을 만드는 기술은 유화를 위한 캔버스를 낳았다. 종이의 발명은 수성 회화 및 판화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의 발달은 이와 연관된 미술의 혁신을 낳았으며 이는 시대정신과 맞물려 다채로운 양식과 조형어법이 파생되었다.
미술가들은 매일 무수히 한계에 부딪히고 매일 부단히 판단 중지를 행한다. 그리고 순수한 눈으로 깊이 들여다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몇 시간 동안 그림을 하나도 그리지 않고 바라보기만 한 적도 많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패턴을 찾고, 양식과 기법을 창안하고,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다. 이로써 새로운 혁신이 초래되고 창조가 이뤄진다. 작품 감상을 통해 혁신의 다양한 표정을 집중적으로 조망하게 하는 미술은 혁신의 영감을 끝없이 공급해주는 창의(創意)의 샘물이다.
지은이 | 이주헌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이후 『한겨레』 문화부 미술 담당 기자를 거쳐 학고재 갤러리와 서울미술관 관장을 지냈다.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이야기꾼으로 활동하면서 미술로 삶과 세상을 보고, 독자들이 좀더 쉽고 폭넓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꾸준히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 특히 삼성경제연구소(SERI)를 위시한 여러 기관과 기업에서 기업인을 대상으로 미술에 리더십을 접목한 강의를 해왔다.
지은 책으로 『신화의 미술관』(전 2권),『지식의 미술관』 『역사의 미술관』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리더의 명화 수업』 『그리다, 너를』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1・2』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현대미술의 심장 뉴욕 미술』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이 있다. EBS에서 「이주헌의 미술 기행」 「청소년 미술 감상」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목차
책머리에_혁신의 죽마고우 미술
1부 혁신에서 길을 찾다
혁신은 현상에 숨은 패턴을 찾는 데서 비롯된다_고대 이집트 미술과 패턴
비판적 사고야말로 창조적인 문제 해결 능력의 원천이다_고대 그리스 미술과 비판적 사고
‘순혈’이 아니라 ‘혼혈’이 혁신을 가져온다_중세 기독교 미술과 ‘이종교배’
관점을 바꾸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_원근법과 관점의 변화
예술가와 장인들보다 목판화의 잠재력을 더 잘 알아본 수도원_목판화와 가치 혁신
의미를 만드는 것이 혁신의 첫걸음이다_메디치 가문과 의미 창조
혁신은 끝까지 붙잡고 늘어진 사람들이 이루어온 것이다_유화와 덧칠 문화
2부 혁신의 동력
현장에 답이 있다_바로크 미술과 현장성
다양성이 관건이다_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와 다양성
열정이 없는 혁신은 없다_낭만주의와 열정
혁신가는 본질적으로 관찰자다_인상주의와 관찰
무의식은 창조적인 해법을 제시한다_초현실주의와 무의식
단순화는 의미의 핵심을 꿰뚫는 것이다_추상미술과 단순화
나를 창조자로 만들어주는 미술 감상_슬로 아트
3부 혁신을 이룬 미술가
신의 시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시점으로 그리다_조토와 휴머니즘
상황에 종속되지 않고 상황을 리드한 혁신가_틴토레토와 ‘공짜 마케팅’
‘CEO형 크리에이터’의 정수를 보여준 선구자_루벤스와 ‘아틀리에 경영’
한계와 제약을 기회로 바꾼 ‘미술 대중화’의 기수_호가스와 블루오션 전략
‘낡은 형식’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다_클림트와 에로티시즘
형태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해방 전사’_마티스와 컬러
‘상업주의’로 순수미술의 폐쇄성을 깬 파괴자_앤디 워홀과 팝컬처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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