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화사를 인류학자 알프레드 젤의 에이전시 이론으로 뜯어봤다. 연구자들은 예술을 생산하고 유통하게 하는 주체를 찾아, 예술의 사회성•정치성•후원•소비 등 작품 밖의 면면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이들은 물질지표의 에이전시 연구 '매체', 조선 왕권을 둘러싼 에이전시 발현 '왕권', 특정 이미지가 에이전시를 행사한 '이미지', 세 가지로 갈무리됐다.
책소개
예술작품 너머의 주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에이전시’를 통해 본 한국 회화사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바라보는 풍경이 다르듯이, 『예술의 주체』도 다른 곳에 서서 ‘한국 회화사’라는 풍경을 다르게 보여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영국의 인류학자 알프레드 젤(Alfred Gell, 1945~97)의 이론이다.
일찍이 젤은 예술이라는 매체 혹은 물성이 가지는 시각적 매력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천착한 바 있다. 젤의 이론은 사후에 출판된 『예술과 에이전시: 인류학적 이론(Art and Agency: an Anthropological Theory)』(1988)을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그는 예술작품 너머에 있는 예술의 사회성이나 예술을 둘러싼 정치성, 예술가를 지지하는 후원자와 소비자 등의 요소에 주목했다. 젤은 이들 요소야말로 예술작품을 제작하고 기능하도록 하는 사회적 관계망으로 보았다.
사회적 관계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을 제작하고 감상하고 사용하는 과정에 일종의 ‘힘’이 있다고 상정하고, 이 ‘힘’을 ‘에이전시(agency, 행위자성 혹은 행위력)’로, 에이전시를 발휘하는 주체를 ‘에이전트(agent, 행위자 혹은 동작주)’라고 정의했다. 에이전시를 발휘하는 주체로서 에이전트를 찾고 에이전시를 표현하는 관계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지표(index)’, ‘예술가(artist)’, ‘원형(prototype)’, ‘수령자(recipient)’라는 네 가지 요소 간의 인과관계에 주목했다.
『예술의 주체』는 ‘동아시아 회화사 연구’ 시리즈의 두 번째 결실이다. 한국 회화사의 ‘만들어진 전통’ 다시 보기를 시도한 첫 책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고연희 엮음, 고연희·이경화·유재빈·김소연·김지혜·김수진·서윤정 지음)은 신윤복의 「미인도」 같은 명화와 겸재 정선, 표암 강세황, 호생관 최북,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 같은 대가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집중하며 한국 회화사 논의에 굵은 획을 그었다. 이번 책은 9인의 연구자가 한국 회화사를 ‘매체’, ‘왕권’, ‘이미지’라는 세 가지 주체로 나누어, 젤의 에이전시 이론을 적용한 득의의 결과물이다. 먼저 매체라는 주체는 물질지표에 대한 에이전시 연구로, 매체적 물질이 연구 대상이다. 둘째, 왕권이라는 주체는 조선의 왕권을 둘러싼 힘을 발현하는 에이전시가 연구 대상이다. 셋째, 이미지라는 주체는 특정 이미지가 형성되면서 에이전시가 행사한 경우가 연구 대상이다.
시축에 붙여진 ‘조연’로서의 「몽유도원도」
젤의 이론으로 조선시대 전기의 걸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보면, 안견(安堅, ?~?)의 「몽유도원도」는 예술작품으로서의 평가가 아닌 시축(詩軸)을 제작하는 데 기여한 측면에 시선이 가닿는다. 다시 말해, 시축이라는 매체가 그것을 계획하고 기여하고 향유한 사람들에게 끼친 에이전시 측면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몽유도원도」는 『몽유도원도시축』의 중심에서 비켜서서 시축의 격조를 도와주는 보조장치로 전이한다. 그동안 “시축 속 시문의 위상보다 그림의 위상을 더욱 높았다고 보았던 관점은, 순수예술품의 가치를 높이 보고자 하는 근현대기의 선입견(先入見)”(45쪽)이었음이 동시에 드러난다. 시축을 구성하는 시문들 중에 「몽유도원도」를 칭송한 부분은 매우 적고 칭송에도 인색하다. 이는 당시 선비들의 안중에 「몽유도원도」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주제의 제목도 「그들의 시축(詩軸)을 위하여 붙여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지은이는 “조선 전기의 ‘시축’ 문화의 이해 속에서 「몽유도원도」가 포함된 『몽유도원도시축』의 제작과정을 논하고 이를 통하여 「몽유도원도」의 속성을 파악”(23쪽)하고자 한다.
시축은 조선 전기 왕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사들의 시가 적혀 있는 두루마리, 즉 시권(詩卷)에 축(軸)이 장식된 물건이다. 보통 시축은 계획하는 사람과 여러 사람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조선조 세종 연간에 「몽유도원도」라는 그림 뒤에 하필이면 시축이라는 두루마리라는 매체를 선택하여 그림이 아닌 시와 글로서 안평대군의 꿈과 사람됨을 칭송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백과사전을 예로 들면 시대에 따라 매체가 종이책으로, 시디(CD)로, 지금은 웹으로 이동해 갔듯이, 두루마리는 당대인이 선호한 매체에 불과할 뿐이었다. 여기서 지은이 고연희는 “시대마다 선호하는 매체가 있으니 그 매체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통로”라고 귀띔한다.
“세종조 왕실에서 시축 제작에 적극적이었던 안평대군은 자신의 행위와 인격을 미화하는 주제의 시축을 만들기 위해 ‘몽유도원도시축’을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시축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념할 만한 사건으로 문인의 공감을 이끌어내 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안평대군은 스스로 ‘꿈(夢)’을 꾸어 ‘도원(桃源)’을 다녀왔다는 행위를 기념비적 사건으로 제시했다.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행위인 ‘꿈’,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공간 ‘도원’의 두 가지 주제를 조합하여 내세운 주제다. 이는 당시 문인의 관심을 이끌고 그들의 넉넉한 호평을 받아내기에 적절하고 효과적인 주제였고, 안평대군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이 시축의 권축에 놓을 자신의 글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에서, 1447년 음력 4월 20일에 꿈을 꾸었고, 안견에게 그림을 명(命)하여 꿈을 꾼 지 사흘 후에(夢後三日)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그림이 완성된 후 곧 자신의 「몽유도원기」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다음에 안평대군은 무엇을 했을까? 안평대군은 박팽년을 찾아서 「서(序)」를 부탁했다.”(39쪽)
시축이라는 무생명체가 의지를 가진 존재로 어떤 ‘힘’을 발휘한다는 현실적 모순은, 젤의 이론처럼 누군가의 소망과 의도가 특정 매체에 반영되면 그 매체의 에이전시가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고연희는 시축의 에이전시 속에서 「몽유도원도」가 피동적으로 제작되고 감상되는 양상을 다루고 있는데, 이 방법론을 통해 조선시대 예술문화가 어떻게 제작·유통되고 감상되는지의 과정을 짚고 있다.
안료인 ‘청록’으로 본 청록산수화의 비의
동아시아 회화 안료의 하나인 청록(靑綠)을 대상화한 지은이는 청록이라는 색채가 지닌 속성이 발휘하는 에이전시에 주목한다. 「청록(靑綠): 도가의 선약, 선계의 표상―조선 중기 청록산수화의 제작에 대한 소고」는 청록의 색채와 안료가 선계(仙界)를 상징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그 연결고리가 이어진 내력에 대해 살펴보고, 그것이 미술작품의 제작과 관련된 사회적 관계망에서 능동적 행위력(agency)을 발휘했음을 이야기한다.
수묵화가 발달했던 조선 중기의 화단은 절파 화풍의 산수인물화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수묵과 대비되는 채색화가 유행한 배경으로, 지은이는 조선 중기를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청록의 행위력이 돋보였던 시기로 지목한다. 실제로 화단에서는 수준 높은 청록산수화가 다수 그려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신선들의 잔치인 요지연도(瑤池宴圖)와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 양식의 계회도 병풍이 유행하기도 했다. 또한 청록산수화의 안료를 이루는 남동광·공작석이 도가의 단약에 들어가는 약재이기도 하며, 청록의 색감이 선계의 표상이 된 사회적 관계를 분석한다. 즉 청록의 색채가 도가의 선약이자 선계의 표상임을 문화사적 맥락에서 다루고 있다
“사상과 문학에서 도교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확대된 것을 청록산수화와 바로 연결짓기는 어렵지만 청록 색조로 상징되는 선계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학 부문에서 선경을 묘사한 수사 (修辭) 중에는 유독 ‘벽(碧)’·‘취(翠)’·‘창(蒼)’·‘청(靑)’·‘녹(綠)’의 색채어가 적극 사용된 점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신선이 사는 도관(道觀)을 벽동 (碧洞)이라 했고, 선계의 복숭아를 ‘벽도(碧桃)’, 그 꽃을 ‘벽도화(碧桃花)’라고 했다. 신선은 ‘녹발옹(綠髮翁)’, 선동(仙童)은 ‘청동(靑童)’, 신선이나 도사가 타고 다니는 소는 ‘청우(靑牛)’라 일컬었다./ 예를 들어 문신 정온(鄭蘊, 1569~1641)의 시문 중에 한무제의 고사를 주제로 지은 부(賦) 「자리를 펴놓고 신선을 기다리다(設坐候仙官)」에서는 곤륜산을 ‘비취색(翡翠色)’으로 묘사했고, ‘벽옥’·‘청하’ 등의 시어를 사용했다.”(73~74쪽)
일제강점기 고미술을 재현한 유리건판 사진
지은이들의 시선은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 사진에도 미친다.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은 어떻게 고미술을 재현했을까?」는 일제강점기 지식을 생산하는 데 매개 역할을 한 유리건판 사진의 에이전시를 다룬다. 일제강점기 고적(古蹟)조사를 할 당시 유리건판 사진은 유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하고 조사하는 수단이자, 그 결과물을 체계화하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했다. 여기서 사진은 행위력, 즉 에이전시가 된다. 20세기 초 유리건판 사진은 실증주의적 객관성을 추구하던 역사주의의 지식정보 수단이라는 시대적 매체로 등장하였으며, 유리건판은 당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7~1935)로 대표되는 일본의 식민지 유물조사의 수단이 되었고, 이후 미술사 담론과 제도를 구성하는 물질적 매개가 되었다. 또한 고구려 벽화가 근현대의 연구자와 예술가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굴곡진 역사에 대하여 촉탁 연구자, 모사도, 촬영자라는 세 축이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연결망이 이어진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총독부 관할하에 전 국토를 망라하는 고적조사가 본격화되었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경주의 천마총까지 한반도의 고대사를 구성하는 유물과 미술품이 일본을 경유한 서구의 학문체계 속에서 발굴・조사・평가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의 고미술과 고건축이 최초로 카메라 앞에 노출되어 기록된 순간이기도 했다. 1941~45년까지 총독부박물관 주임(관장)을 역임한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教一, 1907~2011)는 식민지에서의 발굴조사가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그저 “필드가 한국이었을 뿐”인 일반적인 조사 활동으로 회고한다. 그러나 연구자에게 있어 학문의 중립성 여부를 떠나, 제도와 정책의 실행권을 제국이 가진 이상, 식민지는 제국을 위한 실습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 근접국인 조선이 가진 장점은 다양했다. 사람의 이동이 어렵지 않았고, 각종 조사 도구 및 카메라와 유리건판을 비롯한 사진 기자재, 그리고 결과물로서의 이미지의 이동(모사본, 스케치, 사진 등) 또한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87쪽)
조선의 왕권과 태조어진, 그리고 병풍을 둘러싼 에이전시
조선의 창업군주 이성계. 그의 잠저(潛邸) 시절부터 군주로서의 태조, 왕위에서 물러나 함흥본궁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의 굴곡진 삶을 회화, 사적, 각종 유물에 에이전시로 발현되는 양상을 다룬 글도 있다. 「왕의 이름으로―이성계(1335~1408)의 삶과 자취를 따라 본 관련 유물과 예술」은 역사, 회화, 도자, 공예 등의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어진 이성계와 관련한 유적과 예술품을 이성계의 행위자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여기에서 시각적 지표로서 이성계는 인간-행위자가 되고, 이성계와 관련한 어진, 역사, 회화 등의 지표는 물건-행위자가 된다.
”어진이 훼손되거나 소실되었을 때, 어진을 다른 곳으로 이송할 때에는 실제 국왕이 상을 당한 것처럼 애통해하거나, 실제로 이별하는 것과 같은 슬픔을 의례로 표현하기도 했다. 인조 9년(1631) 집경전 화재로 태조어진이 진전과 함께 불타 사라지자 조정에서는 이를 매우 중대한 손실로 여기고 인조를 비롯하여 자전, 내전 빈궁 모두 3일 동안 소복을 입고 지냈으며, 숭전전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했다.”(125쪽)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은 한양을 비롯해 전국 5곳, 즉 영흥의 준원전, 개성의 목청전, 전주의 경기전, 경주의 집경전, 평양의 영숭전에 모셨기 때문에 한반도 전역으로 이동했다. 이른바 태조어진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40여 차례나 움직였다. 목적은 초상화의 보존이었다. 여기에서 태조는 원형(prototype), 어진은 지표(index), 국왕은 제작자(artist), 어진을 접하는 모든 이는 수용자(recipient)가 된다.「움직이는 어진-태조어진(太祖御眞)의 이동과 그 효과」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이성계의 태조어진은 자체로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 수단이었고, 양란 전후 어진을 이동하는 의례를 통해 세자 승계에 활용하는 등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목적도 있었다. 반면 어진행차가 지체되면 왕권이 흔들리기도 했으며, 어진이 소실되면 어진에 대고 3일 동안 소복을 입고 곡(哭)을 했으며 어진을 이송하는 담당 관리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병풍도 에이전시의 관점으로 보면 의미심장해진다. 「병풍 속의 병풍-왕실 구성원의 지위·서열·책무를 위한 표상」이 그것. 조선 왕실에서는 경사에는 으레 연향((宴享)을 베풀었고 행사장에는 병풍을 둘렀다. 왕실 연향은 기록화 형식으로 그려진 계병(稧屛, 契屛·禊屛,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꾸민 병풍), 즉 행사장을 의장하는 장병(裝屛, 粧屛)과 그 내용을 기록한 의궤를 통해 서도 알 수 있다. 연향에 놓인 병풍의 위치에 따라 왕실 구성원의 존재와 위상이 다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왕실 연향을 받는 이와 바치는 이의 상대적 위치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병풍에는 왕실 여성만을 위한 것과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위한 것 등이 있는데, 여기서 병풍이 원형(prototype)으로 기능하고, 행사의 주인공은 수령자(recipient)가 된다.
‘와전’이라는 매개물의 힘과 에도시대 조선통신사의 행위력
고대 건축재료인 와당(瓦當)과 와전(瓦塼)은 가옥의 외부를 장식하던 기능적인 용도에서 그 후 평면적인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는 ‘와전임모도’와 ‘와전탁본도’로 재현되었다. 와전은 기와와 전돌을 말하는데, 문자가 새겨진 와전은 수천 년 전 도공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후, 그것을 모사하고 금석학적인 해석이 덧붙여졌다. 여기서 서예가이기도 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존재를 간과할 수는 없다. 오세창은 1920년대 초부터 와전임모도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화면에 여유가 있고 구획이 분명해 배열이 반듯한 점이 특징적이다. 그는 단지 와전이라는 형상을 임모하고 탁본하는 데 머물지 않고, 와전과 와전문의 연원을 밝혀냄은 물론 그림 속에서 이미지와 글씨체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감상물로서, 조형미를 갖춘 예술품 와전임모도를 그려냈다.「와전을 그리다―와당과 전돌은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가」의 내용이다.
“주로 진한 와당과 전문(塼文), 금문(金文)을 한 화면에 구성하여 6폭 내지 12폭까지의 병풍을 꾸몄는데, 각 화면은 상단-중단-하단의 3단 구성, 혹은 상단-하단의 2단 구성을 보인다. 이 경우 와당은 화면 상단이나 중단에 배치하고, 하단에는 종정의 명문을 배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윤곽선이 두드러지는 원형 와당이 시각적으로 부각되기 마련이므로 화면의 무게중심을 안정적으로 구성한 때문일 것이다.”(247쪽)
다음은 「연출된 권력, 각인된 이미지―에도시대(江戶時代) 조선통신사 이미지의 형성과 위력」편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 일본의 권력자 막부 쇼군에게 외교사절인 통신사를 보냈다. 조선통신사의 행렬 장면은 도쿠가와막부에서는 권력 과시의 수단으로, 일반인에게서 이국인 행렬이라는 구경거리인 축제로 다르게 사용되었다. 일본의 전통적 그림 장르에서는 쇼군을 방문하는 대규모 행렬도 두루마기와 병풍에도 통신사 행렬이 그려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여기에서 핵심적 시각요소는 행렬이고, 사절단은 조선과 일본 모두에게 보여짐을 의식하여 권력자의 영향력, 에이전시가 발현된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인 사절이지만 통신사가 활동한 공간은 일본이었기에 이들의 대한 다양한 기록과 인상, 관련 이미지는 모두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따라서 가노학파로 알려진 에도시대의 화가 가노 단유(狩野探幽)와 가노 마스노부(狩野正信, 1625~94)에 주목하게 된다. 일본 내에서 조선통신사가 어떤 맥락에서 시각화되고 사용되었는지를 다양한 관계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 역시 행위력을 지닌 주체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신사’의 조건
「신사의 시대―근대기 광고로 읽는 남성 이미지」는 근대적 의미의 신사(紳士, gentleman)라는 용어에 주목한다. 신사는 서광범, 김옥균, 유길준 등이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신사유람단에 처음 등장한다. 1881년 갑신정변 이후 양복의 공인과 함께 단발령이 내려지자 최익현 등을 비롯한 유신(儒臣)의 저항을 받기도 했다. 당시의 신사는 개화 지식과 덕성을 갖추고 봉건계급을 타파할 새로운 집단이자 외양의 서구화를 통해 근대를 체화한 인물상으로 요구되었다.
“유신들은 “옷소매가 좁아들 대로 좁아들어 몸 나들기가 어렵고, 머리를 깎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어 가는구나. 조상의 넋이 있어 이를 안다면 구천에서도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겠구나”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이처럼 양복과 단발은 민족적 울분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며 1910년의 한 일강제병합 이후에는 매국의 기표로도 받아들여지기도 했다.”(315쪽)
“신사의 아침은 ‘국산품’인 라이온(ライオン) 치약으로 양치질을 하고 “살도 쓰리지 않고 피부의 광택이 나는” 레이트푸드 화장품으로 면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백화(百花)의 정수를 모은 향수”인 오리지날(オリジナル) 향수로 출근 준비를 마친 신사는 “동요가 적고 가볍게 거울 위를 활주하듯이” 달리는 도쿄가스전기주식회사의 자동차에 올라 회사로 향한다. 회사에서는 위장약 헬프와 구강청결제 카올(カオル)의 도움을 받아 고객을 맞고, 업무는 “제일 외경(畏敬)하는 교우”인 스완(スワン) 만년필의 힘으로 “극히 원활”하고 ”유쾌하게 처리”한다. 퇴근 후에는 아내가 따라준 고급맥주 캐스케이드( )를 마시며…….“(309쪽)
하지만 당시 신사의 자격 운운하던 광고 대다수가 일본제 상품임을 감안하면 조선의 독자에게 신사로 대표되는 근대 남성 이미지는 제국주의 일본을 동경하며 일본의 남성상(원형, prototype)을 따르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당시 신사의 이미지는 문명과 개화의 상징이었으나 매국의 표상이나 사치와 허영의 대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기도 했다. 근대의 신사와 이를 둘러싼 기표 역시 근대화의 이상과 식민지 현실, 계몽과 소비 사이에서 부유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불안전한 근대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근대의 신사 이미지(원형, prototype)는 광고(지표, index)로 유포되고, 이들 광고를 통하여 신사 이미지가 다시 구축되는 상호적 양방향 에이전시가 발휘된다.
의도를 품은 에이전시의 빛
“젤의 이론에서 흥미로운 점은 물질지표도 하나의 주체가 되어 의도를 가지고 에이전시를 발휘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물질이 의도를 가진다는 말은 그 자체로 역설이기에 이를 해결하려고 젤은 진지하게 노력했다. 물질지표의 의도 뒤에는 사람의 의도가 있기 마련이라며, 젤은 그 사람보다 물질지표의 에이전시가 선명하고 강한 경우를 예로 들었다. 물질지표의 에이전시, 예를 들면 예술의 주술력 같은, 이를 믿는 사회 속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며, 이 힘의 실재 속에 물질지표의 의도가 선명하게 존재한다. 젤은 애당초 예술이란 말 자체가 가지는 근대적 권위적 아우라를 문제로 지적하였다. 그의 이론은 원시적이면서 정교한 물건의 예술성을 설명할 때 빛을 발한다. 또한 동아시아의 전근대기와 같이 예술가의 작가적 창작의도가 중시되지 않았던 시대의 (예술품 같은) 물건을 파악하는 데에도 적절해 보인다.”(7쪽)
지은이, 엮은이 | 고연희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에서 겸재 정선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뒤, 같은 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영모화초화의 정치적 성격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국문학과 회화를 함께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민족문화연구원(고려대), 한국문화연구원(이화여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서울대) 연구교수, 시카고대학교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시대 산수화』 『그림, 문학에 취하다』 『화상찬으로 읽는 사대부의 초상화』 등이 있고, 공저로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 등이 있다.
지은이 | 유미나
연세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여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부에 재직하고 있으며,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민화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조선 후기 서화합벽첩(書畵合璧帖)에 관한 연구를 시작으로 조선 중·후기의 고사인물화와 채색화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근대기에 대중적으로 향유되었던 이른바 민화 분야로 연구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최근 연구로는 「채색선인도(彩色仙人圖), 복·록·수를 기원하는 세화」(2019), 「겸재정선미술관의 《산정일장도》 조선 후기에 전래된 구영(仇英) 화풍의 산거도」(2020) 등이 있다.
지은이 | 김계원
캐나다 맥길대학 미술사학과에서 근대기 일본의 사진술 도입과 풍경 인식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3~15년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에서 조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부교수로 재직하며 미술사와 미술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한일 근현대미술과 시각문화, 사진사, 물질문화, 매체론, 전통의 표상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불상과 사진: 도몬 켄의 고사순례와 20세기 중반의 ‘일본미술’(일본비평 20, 2019)」, 「역사를 그리는 기획: 최민화의 「Once Upon a Time」 연작과 고대의 형상화(대동문화연구 114, 2020)」 등이 있다.
지은이 | 서윤정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에서 조선시대 궁중회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동대학교 및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동아시아의 시각문화와 미술사를 가르쳤다. 현재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미술사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조선 후기 궁중회화와 동아시아 관점에서 본 한국회화와 물질문화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최근 논문으로는 「조선에 전래된 구영의 작품과 구영 화풍의 의의」(2020), “MemorialSceneryandtheArt of Commemoration: Chinese Landscapes and Gardens in Korean painting of the Late Joseon Period”(2020)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2021), A Companion to Korean Art(2020) 등이 있다.
지은이 | 유재빈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정조대 궁중회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18세기 도산서원의 회화적 구현과 그 의미」, 「정조대 왕위계승의 상징적 재현」, 「건륭제의 다보격과 궁중회화」 등이 있고, 공저로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 등이 있다.
지은이 | 김수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 충남대, 서울시립대, 덕성여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미국 하버드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연구를 해왔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동아시아의 문화와 예술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에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공저),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공저),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공저) 등이 있다. 현재 ‘해외의 민화컬렉션’을 『월간 민화』에 연재 중이다.
지은이 | 김소연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사를 지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한국회화사와 한국근대미술사를 지도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근대문화재 분과)으로 있다. 저서와 논문으로는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공저), 「한국 근대기 미술 유학을 통한 ‘동양화’의 추구: 채색화단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 여성의 서화교육과 작가활동 연구」, 「해강 김규진 묵죽화와 『해강죽보(海岡竹譜)』 연구」 등이 있으며, 한국 근대미술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이 | 이정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사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미술 및 건축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세인즈베리 일본예술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동아시아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국가와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과 물질문화 현상 전반에 관심이 많으며, 현재 미술과 건축의 관계 속에서 실내공간과 그 장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18세기의 방』(공저)과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나리(御成)와 무가 저택의 실내치장」 「아시카가의 문화적 권위와 『군다이칸소초키』 제작의 경제적 의미」 등이 있다.
지은이 | 김지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술연구소 연구원, 종로구립 고희동 미술자료관 학예사로 근무했으며, 현재 건국대학교에서 문화예술사와 한국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근대 시각 이미지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한국 근대 미인 담론과 이미지」, 「미스 조선, 근대기 미인 대회와 미인 이미지」, 「근대 광고 이미지에 나타난 주부의 표상」, 『모던 경성의 시각문화와 일상』(공저),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공저) 등이 있다.
목차
머리글
매체
1. 그들의 시축(詩軸)을 위하여 붙여진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_고연희
• ‘시축’이 예술 제작의 주체였다?
• 세종 시절의 시축 문화
• 『몽유도원도시축』 계획에서 완성까지
• ‘시축’이 발휘했던 에이전시
2. 청록(靑綠): 도가의 선약, 선계의 표상
―조선 중기 청록산수화의 제작에 대한 소고_유미나
• 청록, 신선 세계를 나타내는 색채
• 청록 계열의 다채로운 색채와 안료
• 청록의 석약(石藥)이 지니는 불로장생의 효능
• 조선 중기 도교의 부상과 청록에 대한 관심
• 조선 중기 청록산수화의 활발한 제작
3.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은 어떻게 고미술을 재현했을까?_김계원
• 유리건판, 지식의 생산에 매개하다
• 카메라, 유물 앞에 서다
• 사진, 촉탁 연구자의 조사 체계를 만들다
• 사진, 모사도와 협력하다
• 사진가, 유물 촬영의 테크닉을 개발하다
• 사진, 유물을 가치중립적인 이미지로 연출하다
• 유리건판, 현해탄 사이에 맴돌다
왕권
4. 왕의 이름으로
―이성계(1335~1408)의 삶과 자취를 따라 본 관련 유물과 예술_서윤정
• 행위자성: 예술을 둘러싼 다양한 존재의 활동
• 어진: 왕과 같은 존재, 물건-행위자
• 함경도: 이성계의 이름으로 성역화된 풍패지향(豊沛之鄕)
• 함흥본궁 소나무와 이성계 유품: 신령한 물질적 매개체, 물건-행위자
•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예술의 후원자, 행위자성의 발현
• 건원릉, 전설이 된 태조
5. 움직이는 어진
―태조어진(太祖御眞)의 이동과 그 효과_유재빈
• 조선 초기 태조 진전의 성립과 어진의 이동
• 선조 연간 태조어진의 피난과 포상
• 광해군 연간 태조어진의 입성과 영접
• 인조 연간 태조어진의 소실과 위안제
• 이동을 통해 강화된 어진의 행위력
6. 병풍 속의 병풍
―왕실 구성원의 지위·서열·책무를 위한 표상_김수진
• 연향에 놓인 병풍, 연향을 기록한 병풍
• 연향에 참석한 왕실 구성원과 병풍
• 의궤에 기록된 왕실 구성원의 자리와 병풍
• 왕실 여성을 위해 펼쳐진 병풍
• 연향에 놓인 십장생병과 서병의 다양한 용도
•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왕세자와 왕세자빈을 위한 병풍
• 계병 속 장병의 기능과 의미
• 병풍을 소유한 이들, 병풍을 본 이들
• 장병·의궤·계병의 삼부작(三部作)
이미지
7. 와전을 그리다
―와당과 전돌은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가_김소연
• 오래된 건축재료를 예술로 재현하다
• 와전을 옮겨 그리다
• 먼저 와전을 그린 책이 있었다
• 와전을 두드리고 본뜨다
• 우리 와전으로 눈을 돌리다
• 와전을 비단에 수놓다
• 깨진 기와도 다시 보자
8. 연출된 권력, 각인된 이미지
―에도시대(江戶時代) 조선통신사 이미지의 형성과 위력_이정은
• 조선통신사의 행위력(agency): 일본에서 조선통신사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 행렬의 연출: 통신사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주체
• 삽입된 조선통신사 행렬: 에도 초기 시각화된 조선통신사와 도쿠가와막부
• 통신사의 닛코 ‘참배’와 「도쇼다이곤겐엔기」
• 이미지의 소유와 과시: 도쿠가와막부에서 교토 조정으로 보낸 선물
• 이미지의 유포와 명성의 확산: 센뉴지 가이초
• 축제가 된 이국인 행렬
9. 신사의 시대
―근대기 광고로 읽는 남성 이미지_김지혜
• 1920년대 신사의 하루
• 신사라는 용어
• 신사의 탄생
• 신사 만들기, 광고 속 신사 이미지
• 양복이 없으면 신사가 아니다: 신사의 유행복, 의복 광고 이미지
• 남자도 화장하는 시대: 신사의 미용법, 화장품 광고 이미지
• 신사의 취향, 기호품 광고 이미지
• 꼴불견의 신사들, 현실 속의 신사 이미지
• 양복 신사라는 못된 유행, 사치와 허영의 신사 이미지
• 식민지 신사의 한계
• 불완전한 근대의 신사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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