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현장에서 예술가•큐레이터를 만나고, 수다 떨고, 취재했다. 20여 년을 피쳐 에디터로 활동해 온 저자는, 미술에 몰입하여 동시대 미술을 펄떡이는 생명처럼 느끼고 형용한다. 보고 싶은 작품을 위해 트렁크를 던지고, 마감 중에도 런던행 표를 결제하며, 작품을 ‘쇼핑’ 않겠다고 자제하다 홀린 듯 수집해 버렸다는 그의 미술일기는 열렬하고 뜨겁다.
책소개
이우환의 작품이 소장된 토스카나의 와이너리부터
세계적인 아트 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까지
현대미술 현장의 생생하고 내밀한 이야기
지난 20여 년간 유명 패션 매거진의 피처 에디터로, 십여 년 전부터는 미술 전문 에디터로 활동해온 저자가 미술 현장의 내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미술 애호가라면 누구나 궁금해할 장막 뒤의 이야기다.
흔히 “현대미술은 어렵다”고 말하는데, 이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하는 곤란함이 묻어 있다. 왜 장미꽃을 그리게 되었는지, 왜 유화물감이 아니라 구아슈를 사용하는지, 왜 돌멩이에 집착하는지, 왜 하필이면 비누를 찍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왜, 왜, 왜가 많아질수록 현대미술은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작품을 창작한 아티스트에게,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에게, 수천만 원의 퇴직금을 작품 하나에 몰빵한 컬렉터에게 우리를 대신해 온갖 질문을 퍼붓고 그 대답을 읽기 쉽게 글로 쓰는 사람, 그가 바로 피처 에디터다.
이 책은 미술에 진심으로 몰입한 피처 에디터가 다종다양한 미술계의 내외부를 ‘미친 팽이’처럼 떠돌며 ‘아트 모먼트’를 수집한 매우 사적인 기록이다. 저자는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에서 아티스트나 큐레이터를 직접 만나고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미술에 관해 이런저런 주제로 수다를 떨고,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을 컬렉팅하고, 이우환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토스카나의 와이너리부터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비롯한 전 세계 미술 이벤트를 직접 취재하러 간다. 진지한 작품 해설이나 심오한 비평은 거의 없다. 그 대신 동시대 미술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인 생생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나도 미술에 관해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들만의 리그처럼 담장이 높아 보이던 현대미술의 세계가 한결 친숙하게 다가오는 기분! 이 책의 마법 같은 장점이다.
“이 책에 담긴 글은 내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받아들인 동시대 미술과 관련한 얘기들이며, (…) 미술을 매개로 시시각각 펼쳐진 삶의 조각을 꿰어놓은 기록이다. 또한 미술계 내・외부를 미친 팽이처럼 떠돌며 경험한 ‘아트 모먼트’를 수집한 기록이자, 매사 우왕좌왕하며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십 대 여성이 미술에 나를 투영하며 써 내려간 내면 일기이다.”(8쪽)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인터뷰하며
직접 나눈 이야기들
르네상스 시대나 인상파의 회화를 보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탄하다가도 남성의 소변기에 ‘R. Mutt 1917’이라는 낙서 같은 서명만 달랑 있는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보면 일자로 입을 다문다.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난감해 작품을 보는 순간 방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려면 우선 그녀의 트라우마를 알아야 하고, 신 라이프치히 화파를 대표하는 네오 라우흐와 로자 로이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들이 살고 있는 라이프치히라는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스타 작가 양혜규의 작품을 진심으로 들여다보려면 한국의 무속을 비롯해 아시아 전반의 샤머니즘, 유럽의 신비주의를 이해해야 한다. 요즘의 아이돌 스타들이 ‘서사’와 ‘세계관’을 중요시하듯이 현대미술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아티스트의 ‘서사’와 ‘세계관’은 작품에 빠져들게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듣거나 궁금한 것을 질문하면서 작품을 창작하게 된 그들의 내적 동기, 즉 서사와 세계관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저자가 선택한 작품이나 작가는 그녀의 개인적인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좋아하는 옷은 제2의 피부’라고 생각할 만큼 옷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루이즈 부르주아, 프리다 칼로, 조지아 오키프의 옷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사주명리학에 대한 관심은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고, 무속과 신비주의에 대한 애호로 발전되어 미술을 이해하는 특별한 연결고리가 된다. 양혜규의 종이 무구를 사용한 <오행비행>, <황홀망恍惚網> 같은 작품에서는 내적 친밀감을 느끼고, 한국 춤의 ‘폼’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이양희 작가의 퍼포먼스나 ‘고요함을 찾아가는 리듬’을 중시하는 박한샘 작가의 산수화, 심지어 박서보 작가의 단색화를 감상할 때는 동양예술의 세계를 감지하는 지렛대가 된다.
2010년부터 『바자』에서 일했기 때문에 저자는 거의 매년 파리에 가서 타데우스 로팍, 페로탕 갤러리 같은 메가 갤러리를 방문했다. 또 한국에 온 세계적인 작가와 큐레이터를 기자 간담회에서 만나거나 직접 혹은 서면으로 인터뷰한 경험은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 알렉스 카츠, 네오 라우흐와 로자 로이,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엘리엇 헌들리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과 인터뷰한 내용은 그들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해준다. 특히 핵심을 찌르는 저자의 날카로운 질문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달라진 한국 현대미술의 현장
영민한 영 컬렉터의 등장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 때, 한국은 홍콩을 대신해 새로운 미술시장으로 급부상했다. 국내 최대 아트 페어인 키아프와 세계적인 아트 페어인 영국의 프리즈가 함께 열리고, 타데우스 로팍, 글래드스톤, 에스더쉬퍼 등 유명한 메가 갤러리들이 잇달아 한국에 진출했다. MZ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아트부산’은 2022년에 최대 규모의 매출을 올렸다.
이처럼 미술 시장이 급변하면서, 미술품 컬렉팅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달라졌다. 거금을 쥐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유명 작가의 작품을 구매하던 이전 세대의 컬렉터와 달리 이들은 자기 월급에서 일정 부분을 떼어내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구매하거나, 매년 6월에 열리는 스위스의 아트 바젤에 가기 위해 악착같이 휴가를 모으거나, 수천만 원의 퇴직금을 한 작품에 몰빵하는 영리하고 기민한 소비자다.
직업상 유명 작가와 작품을 만날 기회가 누구보다 많지만, 저자는 ‘쇼핑’으로 작품을 소장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컬렉팅을 자제해왔다. 그러다가 이수경 작가의 개인전 《오! 장미여》를 보러 갔다가 홀린 듯이 카드를 긁었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 천경우의 작품이 명성에 비해 겸손한 가격에 출품됐다는 ‘톡’을 받고는 바로 현금을 인출했다. 거친 파도 위에 연필을 부여잡은 손을 형상화한 임소담 작가의 세라믹 작품을 보고는 ‘계시와 같은 매혹’을 느껴 또다시 카드를 긁었다. 컬렉팅한 작품들은 책꽂이에 딱 알맞게 세워두거나 캣타워를 치운 벽에 걸어두거나 책상에 올려두고 보기에 좋은 사이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유명 작가의 값비싼 작품은 아니어도 ‘내 곁에서’ 위안과 정화의 순간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컬렉팅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미술 애호가라면 너무나 공감할 수 있는 요즘 컬렉팅 이야기가 신선하다.
좋아하는 작품을 보기 위해서라면
카드 빚도 불사하는 아트 투어
토스카나의 한 와이너리에는 루이즈 부르주아, 아니시 카푸어,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 그리고 이우환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인왕산의 선바위부터 경주 남산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 심지어 무령왕릉과 투탕카멘의 부장품까지도 감상의 대상으로 경외할 만큼 저자는 ‘장소 특정적인’ 작품을 좋아한다. 그러니 이 와이너리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미술의 보물단지였다. 지하 저장고의 녹슨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곳에서 마주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대리석 여성상, 자갈길에 둘러싸인 바닥과 벽에 대칭적으로 설치된 이우환의 회화는 한동안 말을 잊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나는 작가가 특정 장소에 영감을 받고, 그곳을 위해 만든 작품을 말하는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이 좋다. 현대미술에서 이 용어는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함의가 있지만 나는 단순하게 작품을 온몸으로 만나는 생생한 체험이 좋다. 마치 ‘장거리 연애’를 하는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오로지 그 작품을 생각하며 떠나고 여운을 곱씹으며 돌아오는 미술 여행에는 집중된 기쁨이 있다.”(222쪽)
유럽에서 그랜드 투어의 전통이 사라진 지는 오래됐지만, 요즘 미술계에서는 이 용어가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카셀 도쿠멘타, 베네치아 비엔날레,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아트 베젤 등 유럽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가 겹치는 해에 떠나는 여행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랜드 투어’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017년과 2022년에 그랜드 투어를 다녀오며 경험한 전 세계 미술 축제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소개해준다. 특히 202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보러 갔다가 영혼의 친밀감을 느끼는 페기 구겐하임과 영적 도킹을 시도하는 장면은 웃음이 절로 나기도 한다.
“미술 애호가는 항상 길 위에 있다. 수년간 미술을 취재하면서 느낀 바로는, 미술을 좋아하는 일은 미술을 보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고, 돌아와서는 본 것을 되새김질하듯 공부하고, 다음 여정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또다시 새로운 여행 계획을 짜는 일의 무한반복이다. 그리고 그랜드 투어는 말하
자면 성지 순례와도 같은 것이다. (…) 이처럼 유럽 대륙에서 미술계 주요 행사들이 다발적으로 펼쳐지는 특별한 해의 여름에는 미술 애호가라면 카드 빚을 내서라도 비행기 표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240~241쪽)
미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 즐거움으로 가득한 책
올해 5월, 저자는 책을 마감하는 와중에도 힐마 아프 클린트와 몬드리안의 2인전 《Forms of Life》를 보기 위해 과감하게 런던으로 떠났다. “그림은 나를 통해서, 밑그림도 없이, 엄청난 힘으로 그려진다”라며 보이지 않는 존재가 전한 메시지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던 힐마 아프 클린트의 전시는, 저자가 온 생애를 바쳐 기다려온 작가다. 그러니 아무리 책 출간이 급하다고 한들 런던행 항공권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집착, 애틋함과 사랑스러움, 삶의 비기와 마주한 듯한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현대미술에 관해 쓴 책 중에서 가장 열렬하고 뜨거운 책이라 할 만하다.
지은이 | 안동선
인천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서는 사회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패션지 『코스모폴리탄』, 『바자』 등에서 15년간 피처 에디터로 일했다. 퇴사 후에는 프리랜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바자』에서 펴내는 미술 전문지 『바자 아트』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 미술에 관한 글을 기고한다. 1인 콘텐츠 제작사인 ‘식신술’을 운영하며 유니클로, 이솝, 현대백화점 등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따라 인쇄물 기반의 콘텐츠를 만든다. 영국 런던 소재의 포엣츠 앤 펑크스에서 출간한 『안주와 반주』(2021년),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2023년)의 책임 편집을 맡았다. 전시 《MCMXDahahm Choi—AIR》(2017년), 《MCMXHyunjun Lee—Solitary》(2017~2018년), 《The Art of Yellow》(2019년), 《노들기록—건축의 기억》(2021년)을 큐레이팅했다.
미술가들의 다채로운 미학적 실천을 좇으며 몸과 정신의 확장을 꾀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Instagram @andongza
목차
프롤로그
PART 1 삶의 틈을 메우는 미술
사랑, 상실 그리고 내가 입은 옷들
사주명리학으로 미술 읽기
손끝의 감각
미술에서 시작해 인생으로 끝나는
진정한 장소
카츠와 바젤리츠
PART 2 지극히 사적인 역사, 컬렉션
위안과 정화의 불꽃
어떤 존재의 무게
내 컬렉션의 테마
반가사유상 레플리카
빈자리
PART 3 공간에 스며든 작품들
서촌에 살았던 정직한 화공
시간을 달리는 미술
인왕산 그리고 돌이라는 사유의 파트너
처서에 보는 그림
죽은 자의 세상
PART 4 아트 투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핑계
테루아를 담은 미술
뉴욕만 한 곳이 있으려고
2017년의 그랜드 투어
2022년의 그랜드 투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좇는 여정
아트 데스티네이션 #좌표공유
에필로그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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