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의 평전이다. 일반적인 평전과 달리 에세이처럼 유연하지만 힘 있는 어투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중요 행적•작품목록•일기 등으로 그가 남긴 모습을 차곡차곡 대변한다. 오로지 인간적인 것에 집중하고 ‘함께’라는 공감 상태에 이르러 서야만 작업에 들어갔던 그에 관해 질문을 던지며, 수록된 90여 점의 작품과 서술로 작가의 초상을 그려간다.
책소개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떠오르는 독보적 예술
여전히 현재형으로 살아 있는 불멸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
이 책의 목차만을 보면 얼핏 연대기적인 평전의 공식을 따를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책장을 들춰보면 아름다운 에세이를 읽듯 읽는 이의 상상력과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일반적인 평전 서술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한 인물의 본질을 묘파해내는 이러한 서술 형식에 대해 어떻게 소개하면 될까. 그러면서도 케테 콜비츠의 중요한 행적과 작품 목록은 빠짐없이 들어 있다. 텍스트 도처에 놓인 시적 상징과 예술에 관한 도전적 질문들, 그리고 독자와 함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독자들께서 직접 읽으며 느껴보시길 권해드릴 수밖에 없다. 이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충실한 서술을 읽으며 예술이란 어떤 것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깊이 있는 사유를 경험할 수 있다.
독자와 함께 그려나가는 위대한 예술가의 초상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작품을 검토하고 또 검토하길 반복했다.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어떤 작품이 반드시 지녀야만 하는 필연성을 고심하느라 그러하였다. 또한 케테 콜비츠는 ‘함께하는’ 마음을 느껴야만, ‘고통 또는 환희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짚었던 공감 상태에 이르러서만 작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1장 「케테 콜비츠 예술의 본질과 영향력」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저자는 케테 콜비츠의 초상을 그려나간다. 이어지는 각각의 장에서 케테 콜비츠의 주요 작품이 소개됨은 물론이다.
「유년기와 초기의 명성」은 이 책에서 가장 연대기적 서술이 강한 부분이다. 케테 콜비츠의 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는 현대 종교생활에서 의미가 큰 인물이었다. 항상 고도의 도덕성과 의무감을 지니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케테 집안 특유의 분위기였다. 케테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자랐다. 학창 시절과 예술가로서의 데뷔 과정, 평생 케테의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남편 카를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행복한 시절」은 케테 스스로 모든 면에서 행복했다고 한 서른 살에서 마흔 살 무렵의 이야기가 담겼다. 〈직조공 봉기〉 연작부터 초기작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농민전쟁〉 연작 등에서, 생동감 있게 묘사된 민중의 삶과 그 속에 녹아든 뛰어난 상상력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인정하고 존경하기 시작했으며, 그러나 아직까지 명성의 압박을 받지는 않던 시기였다.
「1914년 이전」은 행복한 시절을 지나 ‘전쟁 전야에 나타나는 불치의 갑갑증’ 시기로 접어든 1907~1914년까지를 다룬다. 훗날 역사가들에게 귀중한 기록이라 평가받는 일기를 케테가 쓰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시사 잡지 『짐플리시시무스』에 정기적으로 판화를 기고하고 국제노동조합총연맹에서 청한 전쟁에 반대해달라는 포스터 제작에 응하는 등, 케테 콜비츠는 어떠한 목적을 지닌 예술이 순수한 예술일 리 없다는 의견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명확히 밝힌다. 그러면서도 본래 의도와는 달리 당파적으로 자신의 예술이 이용되는 현상에는 갈등을 겪었다.
“특히, 콜비츠 부부와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하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둘째 아들 페터의 대화는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준다. 콜비츠 부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전개 과정에 대해 나름 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 아들 페터는 당시 팽배했던 민족주의 열기에 휩싸인 청년이었다. 불과 18세였다. 하지만 끝내 부부는 아들의 판단을 존중했고, 자신들의 이념을 강압적으로 설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을 전장으로 떠나보낸 후, 그 모든 결과를 감수하였다. 케테 콜비츠에게 주어졌던 역사적 공간은 이러하였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전쟁일기」는 둘째 아들 페터가 전장에 자원입대하고 나서 죽음을 맞이한 과정 속에서 케테가 쓴 일기의 대목이 발췌돼 실려 있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숨죽여 그의 깊은 내면을 읽게 되는 장이다.
「1920년대」. 케테는 전쟁을 통해 고통스러운 변신의 과정을 겪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에 종군한 아들 페터의 죽음은 케테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으로 작용하여, 저 유명한 목판화 시리즈 〈전쟁〉 연작을 탄생시킨다. 격정적인 몸짓, 상징적으로 과장된 파토스가 깜박거리는 음각으로 처리된 이 시리즈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합리한 현실에 수긍할 수 없는 단호한 의지가 표현되어 있다. 더불어 공포에 마비되었던 힘과 충동이 새로이 솟아나고 있다. 또한 오늘날 가장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조각으로 평가받고 있는 〈부모〉상에 대한 창작 과정도 볼 수 있다. 무려 17년을 쏟아부은, 마치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지키듯 엄숙하게 무릎 꿇은 이 두 인물상 〈부모〉.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두고 이 작품을 판단하기보다는 다만 이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1933년 이후」. 이후 〈프롤레타리아트〉 연작부터 노년에 이르러 완성한 〈죽음〉 연작까지, 케테는 자기 시대에 가장 깊숙이 뿌리박고 작품을 통해 이를 발언했으나, 나중에는 그녀를 통해 역사가 말을 했다. 케테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드높아갔으나 손자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었다. 베를린 폭격으로 피난 생활을 감수해야 했으며, 50년 살던 집이 파괴되고, 케테의 숱한 작품도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케테는 되풀이되는 전쟁에 참혹하게 절망했고 온힘을 다해 예술 창작으로서 맞섰다. 케테는 노동자와 빈민을 사랑했고, 그에 대해 형상화한 작품이 많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특히 1백 점도 넘는 자화상을 통해 콜비츠는 자신의 얼굴 모습을 빗대어 내면 풍경을 형상화했는데, 이 자화상들은 그 시대에 대한 답변이자 증언으로써, 케테가 살았던 시대를 드러내는 기둥으로 우뚝 서 있다.
케테는 초기에는 주로 노동자들에게서 느낀 매력을 형상화했고, 후기에는 자신의 운명과 실존에서 그 시대 일반적인 사람들의 운명과 실존을 전형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빈곤에 대한 묘사든 죽음과의 대화든, 케테는 이 무엇(내용)으로부터 어떻게(형식)을 도출해냈다. 결말의 장 「인간과 작품」에서 저자 카테리네 크라머는 또다시 독자와 함께 중요한 질문을 묻고 있다. 오늘날 삶과 예술이 분리된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케테 콜비츠의 예술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약력을 되찾은 번역가에 대한 짧은 첨언
이 책은 1991년 실천문학사에서 초간됐고, 그 뒤 한 차례 개정판이 출간되었으며, 다시 낡아진 표기와 언어를 손질하고 중요한 도판을 추가해 아름다운 장정으로 다시 상재한다. 앞서 두 판에서 번역자의 약력이 생략될 수밖에 없던 까닭을 잠시 추기하고 지날 수밖에 없겠다. 많은 독자분들께서 궁금해하기도 하고 책의 역사를 기록해야 될 필요도 있어서이다.
지금은 홍익대 독문과 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번역가 이순예(이순례)는 1990년경 이 책의 번역을 거의 마치고 마무리만 남은 단계에서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마무리만 남은 번역 원고 끝 부분을 대학원에서 같이 수학하던 친구 최영진에게 부탁하고 출국한다.
독일에서 공부하자니 이름 표기 중 한국어 ‘례’ 가 불가능해 이름의 끝자리 표기를 ‘이순예’로 바꾸었다. 이메일이나 휴대폰이 없던 시절, 당시 출판사에서도 역자와 연락이 갑자기 두절된 탓에 역자 약력이 실리지 못한 채로 출간되었다.
1990년대 초반 출간된 이후 이 책은 한국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케테 콜비츠를 소개하는 책이었다. 그 뒤로 1~2년마다 콜비츠의 크고 작은 전시회가 열리면 이순예 교수의 번역어가 작품명이나 작품 소개에 쓰이곤 했다. 이 책을 ‘내 인생의 책’ 중 하나로 꼽는 유명 작가나 학자도 많았고 숱한 기관에서 중요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가의 약력은 알려지지 않은 채였다.
이온서가 출판사에서는 이 책을 다시 출간하고자 긴 세월 역자를 찾아 헤맸다. 한 대학원 도서관에서 서지명을 기입할 때 저자 이름을 한자(漢字)로도 기입해준 덕에,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 젊었던 번역가는 이제는 은퇴를 앞둔,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한 노학자가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최영진(전 서울대 교수)은 2021년 지병으로 운명을 달리 하셨기에, 이순예 교수가 다시 모든 텍스트를 재점검하고 번역을 손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저자인 카테리네 크라머만큼이나 글솜씨가 뛰어난 번역가 이순예를 찾는 것이 출판사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다른 번역가분께 일부 번역을 받아보기도 했으나 무언가 호방한 글의 힘이 사라져 마치 다른 책 같았던 것이다. 똑같은 독일어 텍스트를 번역해도 결과물이 그토록 달라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언어와는 달리 독일어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겨진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어로 직역만 해서는 그 숨겨진 의미를 놓치게 되니까 전체 맥락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거든요.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잘 찾아내는 것이 독일어 번역의 관건이에요.”
그렇게, 앞서 두 판에 실리지 못한 번역가의 약력이 제대로 자리를 찾은 채 말 그대로 ‘완성본’이 되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가 ‘거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탁월한 성취의 토대에 삶을 대하는 자세,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닮고 싶고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면이 있다. 이 책 속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케테 콜비츠의 예술에서 느껴지는 위대함은, 그녀의 인간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은이 | 카테리네 크라머 (Catherine Krahmer)
1937년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나 1948년부터는 프랑스에서 거주하고 있다. 옥스퍼드, 뮌헨, 파리 등에서 사회학, 문학, 예술사를 공부했다. 미국에서 짧게 교수 생활을 한 뒤 파리로 돌아와 2023년 현재까지 살며 연구자이자 작가로서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케테 콜비츠, 에른스트 바를라흐를 비롯한 현대 미술이 주요 관심 영역이다.
저서로 『이브 클라인의 사건Der Fall Yves Klein』(1974), 『미술은 미술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Kunst ist nicht fur Kunstgeschichte da』(2001)와 『일기Tagebuch 1903-1917』(2009) 등 다수가 있다.
옮긴이 | 이순예
미학자. 홍익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독일 철학적 미학 발전 과정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독일에서 출간된 Aporie des Schonen(독일: Aisthesis)을 비롯해 한국에서 출간한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풀빛), 『예술, 서구를 만들다』(인물과사상), 『예술과 비판 근원의 빛』(한길사), 『아도르노: 현실이 이론보다 더 엄정하다』(한길사), 『민주사회로 가는 독일적 특수 경로와 예술』(길), 『테오도르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커뮤니케이션북스) 등 다수가 있다. 아도르노 강의록 한국어 번역 출간을 기획하고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강의』(세창출판사)를 번역했다. 그 밖의 역서로 『아도르노-벤야민 편지 1928~1940』(길) 등이 있다.
목차
케테 콜비츠 예술의 본질과 영향력 27
유년기와 초기 명성 49
행복한 시절 81
1914년 이전 117
전쟁일기 143
1920년대 157
1933년 이후 217
인간과 작품 257
주 268 | 연보 282 | 옮긴이의 말 285 | 찾아보기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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