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미술가의 해방 후 약 15년간의 활동과 생활을 추적했다. 일부의 거장이나 걸작이 아닌, 다수의 조선인 미술가를 추적하고 연결하여 ‘집단적’ 미술 활동을 복원한다는 데 의미가 있으며, 특히 연구가 부족한 1950년대의 작품 활동에 주목했다. 출발점으로 1962년에 발행된 『재일조선미술가화집』을 삼고, 수록된 미술가들의 작업과 생애를 중심으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선보일지 고민했던 모습을 상세하게 다룬다. 일본 미술가와의 접점도 조사했으며, 생존한 미술가와 유족의 인터뷰가 자료의 공백을 채워준다. 재일조선인 3세로 재일코리안 미술작품 보존협회를 설립하여 상실의 위기에서 작품을 건지고 전시로 알리는 등 긴 시간 행동하는 연구자로 걸어온 저자의 노고가, 어느 한 국가가 아닌 ‘조선적’이란 범주를 정체성으로 지니고 살아온 재일조선인의 미술사를 정면에서 읽을 수 있는 기회와 고리를 만들어 준다.
책소개
우리가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우리 미술사!
이 책은 한반도에 뿌리를 두었지만 옛 식민지 종주국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해방 후 약 15년간 펼친 표현 활동과 생활의 기록이다. ‘자이니치조센진’이라고 불렸고, 스스로를 ‘재일조선인’이라 불렀던 그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호소하고자 작품을 만들었을까? 저자는 한두 명 ‘스타 작가’의 ‘걸작’을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형’ 조선인 미술가‘들’이 점점이 뿌려놓은 흔적을 추적하여 선으로 이었다. 1962년이라는 특이한 시기 설정은 그해 발행된 『재일조선미술가화집』으로 연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저 스르륵 넘겨보고 말았을 빛바랜 화집 한 권을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마주한 저자는 액자와 캔버스에 담긴 유화뿐만 아니라 판화, 삽화, 표지화, 만화, 무대미술, 그리고 소수자의 언어를 지키며 끈질기게 펴냈던 신문 기사와 팸플릿을 넘나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해방, 제주 4.3사건, 한국전쟁, 4.24 한신교육투쟁, 귀국운동, 4.19 혁명 등 한반도와 일본의 격동 한가운데서 분단과 억압을 극복하고자 했던 미술가들의 조형적 연대 활동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문헌 조사는 연구의 시작에 불과했다. 저자 백름은 주변 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생존한 재일조선인미술가와 유족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여 그들을 역사의 증인으로 불러 세운다. 나아가 재일코리안미술작품보존협회(ZAHPA)를 설립하여 훼손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작품을 수집·보존하고 있다. ‘대한민국’,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적과 일치하지 않는 ‘조선적’이라는 범주를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로 유지하며 살아온 재일조선인의 미술사는, 마이너리티인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이제 우리 미술사 속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재일조선인 3세가 수집하고 기록한 첫 ‘재일조선인미술사’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아야 했던 약 60만 명의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일방적으로 박탈당하고 ‘무국적자’ 상태가 되었다. 그들은 옛 종주국의 차별과 분단된 조국의 현실, 정체성의 혼란과 같은 여러 질곡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지켜내며 살아가고 있다. 재일조선인 3세로 태어나 미술을 전공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지금껏 조명된 적 없는 선대 미술가들의 역사를 찾아가는 동시에 실존을 걸고 자신의 뿌리를 밝히고자 했다. 번역자이자 학문적 동지인 노유니아가 말했듯 스무 살 무렵까지 일본의 공적 교육 기관에 적을 둔 적이 없었던 그녀가 ‘국립’ 대학의 합격증을 손에 쥐기까지, 그리고 일본 최고 수준의 ‘제도권’ 교육기관에서 재일조선인들의 미술사 연구로 인정받기까지의 도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저자가 20년간 걸어온 노력과 인내의 산물이다.
문학계와 역사학계에서, 또한 최근의 디아스포라 문화 담론에서 재일조선인(재일코리안)의 흔적을 뒤쫓는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문화 영역에 비해 미술 관련 연구는 몇몇 작가에 한정된 단편적인 연구에 그쳤다. 더구나 해방 직후의 재일조선인이 펼친 미술 활동은 거의 암흑 속에 놓인 상태다. 이 책에서 다룬 재일조선인의 작품 대부분은 “이런 힘든 시기에 무슨 미술이야?”라는 말을 듣던 시대에 창작되었다. 미술가가 살아온 삶의 증명이 미술이라고 할 때, 자신들의 존재 가치마저 부정되었던 시기였던 셈이다. 이 책의 부제를 ‘미술가들과 표현 활동의 기록’이라고 붙인 까닭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거장과 걸작, 주류의 가치관을 넘어선 ‘생활의 미술사’
대부분의 미술가들에게 미술 활동은 생활의 연장선이기에 미술가들의 표현 활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재일조선인의 삶을 밝힌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분석 대상으로 다룰 미술 작품이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미술 내적인 기준과 문제에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1962년 자신들의 손으로 펴낸 첫 화집에 등장하는 군상 속 투박한 인물들의 분노, 절망, 희망에 가득한 얼굴들과 마주할 때, 우리는 당시 뜨거운 사건의 현장 속으로 순간이동하게 된다. 또한 자료 부족의 문제를 극복하고 삶을 증언하는 미술사를 쓰기 위해 저자가 내세운 방법론 중 하나가 재일조선인미술가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이었다. 이른바 구술사 연구 방법은 침묵 속에 묻혀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맞아 들어가는 극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다소 낯설지만 ‘재일조선인’의 글투와 말투로 이루어진 증언을 읽다보면, 우리는 당시의 뜨거웠던 우정과 연대의 현장으로 기꺼이 끌려 들어가게 된다.
우리 미술사, 그리고 동아시아 미술사의 공백을 메꾸다.
이 책에 등장하는 미술가는 조양규, 전화황, 곽인식처럼 이제는 우리에게 조금은 알려진 재일작가도 있지만, 김창덕, 백령, 전철, 채준, 표세종, 성리식, 김희려, 한동휘, 박일대, 리철주, 리경조 등 대부분 낯선 이름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만나 조직과 전시회를 꾸려가며 무엇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 미술가로서의 올곧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토론하는 모습은 여느 미술가와 다를 바 없다. 이 책은 재일조선미술회가 결성(1953년)되고 그 단체 안에서 ‘재일조선인의 생활’, ‘귀국’, ‘한국의 구국 투쟁’ 등 일정한 테마 아래 협동작을 제작하고 《순회전》(1956년)을 비롯해 이념과 배경을 달리했던 민단계와 총련계 미술가가 만나 두 번의 《연립전》(1961년)을 성사했던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그들이 《일본앙데팡당전》과 《조일우호미술전》 등을 통해 일본인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미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한편, 남과 북의 정세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움직이고 있었던 사실을 밝힌다. 이로써 “재일조선인미술가들의 활동이 결코 자신들만의 고립된 움직임이 아니라 동시대 세계사와의 관계성 안에서 전진해 온 역사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옮긴이의 글에서) 한편 부록으로 재일조선미술회의 기관지로 7호까지 발간된 『조선미술』의 꼼꼼한 해제를 실어 재일조선인의 표현 활동을 복원함으로써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이고 있다.
지은이 | 백름 (白凛)
1979년 시마네현에서 재일조선인 3세로 태어났다. 도쿄의 조선대학교 교육학부 미술과와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지역문화연구 전공)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사카대학과 도시샤대학에서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으로 지냈으며 현재 리쓰메이칸대학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6년 일반사단법인 재일코리안미술작품보존협회(ZAHPA)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로서재일코리안의 미술작품 및 자료를 수집, 관리하고 있다. 편저로는 『在日朝鮮人美術史に見る美術教育者たちの足跡(재일조선인미술사로 보는 미술교육자들의 발자취)』(도시샤코리아연구센터, 2023), 번역서로『平壤美術(평양미술)』(문범강 지음, 세이도샤, 2021)이 있으며 《재일코리안미술작품보존협회 컬렉션》(2019, 조선대학교, 도쿄), 《박민의의 그림과 윤정숙의 시―그림과 시와 재일코리안 2세 여성의 생활사》(2022, 도시샤대학, 교토)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2021년 ‘김복진상’을 후루카와 미카와 공동수상했다.
옮긴이 | 노유니아
명지대학교 일어일문학과 조교수. 근현대 한국과 일본의 시각/물질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도쿄대학 문화자원학연구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학술진흥회 특별연구원,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일본으로 떠나는 서양미술기행』(미래의 창, 2015), East Asian Art History in a Transnational Context(공저; Routledge, 2019)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일본 근대 디자인사』(소명출판, 2020), 『일본 현대 디자인사』(소명출판, 2023)를 펴냈다.
옮긴이 | 정성희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재일코리안 커뮤니티의 전통 공연예술이 지닌 사회적 역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재일코리안과 한국 전통예술, 공립학교 속의 민족교육 등을 비롯한 재일코리안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이밖에 2013년부터 일본에서 한국 전통예술을 알리기 위해 공연기획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 「민단의 문화진흥의 흐름과 성격―2000년대 활동을 중심으로」, 「재일코리안 집중거주 지역의 언어경관―이쿠노 코리아타운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목차
한국판 출간에 부쳐
프롤로그
제0장. 『재일조선미술가화집』에 관하여
1. 외관 ― 사이즈와 표제
2. 목차와 수록 작품 목록
3. 본문 —화집에 수록된 텍스트의 분석
4. 수록 작품의 특징
테마 | 모티프 | 사실성
제1장. 시동의 에너지
1. 고유한 경험의 축적 —1940년대 후반부터 1953년까지
‘재일조선미술가협회’의 결성 | 일본 공모전 참여 |
미술학교에서 만난 두 화가, 표세종과 성리식 |
미술교사로 활약한 박사림 | 만화가 전철의 탄생 비화
2. 고유한 경험의 합류 —‘재일조선미술회’의 결성
‘재일조선미술회’의 결성 | 활동의 구심이자 동력이었던 화가 김창덕
제2장. 무엇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1. ‘민족미술’의 추구
토론의 시작 —김창락의 원체험 | 백령과 초현실주의 |성리식과 모더니즘
2. 《순회전》 개최의 기쁨과 이후의 전개
전시의 성사 과정 | 개최 후의 혼란
제3장. 공통 테마와 ‘사실’ ― 토론에서 제작으로, 그리고 발표로
1. 토론과 제작
토론 | 제작 | 테마1 ‘재일조선인의 생활’ | 테마2 ‘귀국’ |
테마3 ‘남조선의 구국투쟁
2. 전시와 반응
《9·9전》 | 《제12회 일본앙데팡당전》 |
《8·15 조국해방 기념미술전》
제4장. 《연립전》, 이국땅에서 분단을 넘어서다
1. 개최까지의 과정
한반도 분단과 재일조선인 | 《연립전》 전사前史
2. 예술가의 ‘통일’을 목표로 한 활동의 궤적
《제1회 연립전》의 개최 경위와 기간, 참가 단체 |
《제2회 연립전》의 개최 경위와 기간, 참가 단체 |
출품 작가와 작품
3. 따뜻했던 교류와 급속한 냉각
상호교류의 활성화 | 성공에 따른 여파
4. 정리
제5장. 일본인 미술가와의 접점
1. 개인전 개최와 일본 공모전 참여
이과회 | 행동미술협회 | 일본청년미술가연합 |
일본판화운동협회 | 일본노동만화클럽 | 기타
2. 《일본앙데팡당전》 출품
일본미술회의 창립 | 《일본앙데팡당전》 개최 |
조선인미술가의 출품 기록 | 출품 보고와 비평
3. 미술을 통한 문화교류를 실현한 《조일우호미술전》 개최 취지와 제1회전의 양상 | 전람회 보고와 그 후
제6장. 재일조선인미술사를 풀어가는 이야기
1. 연구의 실마리
인터뷰어이자 필자인 ‘나’에 대하여 | 인터뷰 이외의 자료 | 제6장의 구성
2. 도쿄의 미술가들
모여드는 미술가들 | 조선학교 교과서 삽화 제작과 관련된 일화 |
오야마와 시모기타자와에서의 일화
3. 오사카, 교토, 효고의 미술가들
미술가로서의 도정과 조직의 설립 —김희려 | 제주 4·3 사건에서 목격한 생과 사,
그리고 예술에의 모색 —리경조 | 하상철의 회상 —미술교사 아오야마 선생과 전화황 선생
4. 구술사로서의 재일조선인미술사 연구
에필로그
부록
1. 재일조선미술회 기관지 『조선미술』 해제
2. 인명 해설
3. 참고문헌
4. 출처
일본어판 후기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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