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병기와 20여 년을 가까이서 함께했던 저자가, 화가의 면모와 업적을 글로 옮겼다. 김병기는 1세대 추상미술 화가이며 미술이론가로, 106세의 생을 살며 남다른 예술적 경지를 이뤘다. 많은 화가와 교류하며 평전을 써낸 저자는 김병기의 독보적인 작품세계와 인품을 알아보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제목은 김병기가 좋아한 프랑스 시인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한 구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태경 김병기의 아호를 밝히고, 그림 내력보다는 사람 내력에 집중해 인생사를 써 내려가는 중에 어김없이 예술세계가 섞였다. 104세의 개인전에서 화가는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라고 말했다. 나이 든 삶의 영위가 화두에 오른 오늘, 끝까지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했던 화가의 생애를 깊이 읽어봄 직하다.
책소개
최장수 현대화가 김병기의 백년 예술인생을 조명하다
한국현대미술을 이끈 1세대 추상미술화가 김병기의 삶과 예술
김형국 교수가 쓴 최장수 현대화가 김병기의 유일한 평전
2022년 3월 15일, ‘106세 최장수 현대화가’ 김병기의 수목장이 경기도 포천의 나남수목원에서 열렸다. 이때 김병기 화백의 가족과 함께 고인의 마지막 길을 조용히 지킨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바람이 일어나다》의 저자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였다.
김형국 교수는 지인의 소개로 김병기 화백을 만난 후 그의 인간적 풍모에 이끌려 20여 년간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며 그의 만년을 함께했다. 김 화백의 화실에 초대받아 열정적인 작업 과정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냉면을 함께 먹으며 기나긴 인생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를 나눈 각별한 사이였다. 그는 생전에 김형국 교수가 쓴 장욱진 평전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써 달라고 청했고, 김 교수는 그의 구술을 여러 차례 받아 적기도 했다.
그러한 오랜 만남의 세월이 쌓이면서 탄생한 이 책은 김병기 화백의 전 생애를 담은 유일한 평전이다. 김병기의 백년 인생과 한국현대미술사에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평론가들의 작품론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간 김병기’를 재발견한 한국 문화사에서 보기 드문 역작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김병기의 진면목과 최장수 화가로서 이루어 낸 업적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현대미술사의 잊힌 거인 김병기를 재발견하다
김병기는 1세대 추상미술화가이자 미술이론가로서 탁월한 열정과 지성을 갖춘 문무겸장의 인물이었다. 106세의 긴 인생을 살며 동시대 화가들이 이루지 못한 남다른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술계의 헤게모니 다툼과 그의 오랜 미국 생활로 김병기는 한국에서 거의 잊힌 존재가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형국 교수는 김병기 화백을 세상에 알리고자 오랜 시간 동안 애정과 열정을 쏟아 왔다. 신문이나 저널에 그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전시회 준비 등을 도우며 그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기도 했다.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장욱진, 김종학 등 수많은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깊이 있는 평전을 써낸 김형국 교수는 김병기의 독보적인 작품세계와 고매한 인품을 알아보았고,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그의 자리를 되찾아 주고자 애썼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김형국 교수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8년간 김병기의 구술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내외 문헌, 가족과 지인의 증언을 총동원함으로써 김병기의 백년의 삶과 한국현대미술사의 전개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되살려 냈다.
한국 미술 현대화를 이끈 1세대 추상미술화가의 기록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병기는 창작은 물론이고 이론과 비평, 교육 등에서 한국 미술 현대화에 기여한 1세대 추상미술화가이다. 일제강점기에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과 함께 일본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와 문화학원에서 공부하며 추상미술 창작과 비평활동을 시작한 그는 문예지 표지화와 연극 무대미술을 담당하며 황순원, 유치진, 주영섭 등 시인, 소설가, 연극인 등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과 소통하며 종합적 관점에서 현대미술의 외연을 넓히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 미술동맹 서기장, 6.25 땐 남한 종군화가단 부단장, 1960년대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격동의 시대에 예술가들을 이끄는 리더 역할을 했다. 또한 서울대 미대 교수를 역임하며 현대미술이론과 교육을 체계화하고, 서울예고 설립을 주도하며 미술 조기교육을 선도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한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을 맡으며 한국현대미술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디자인’이란 용어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도 그였다.
이 책은 1세대 추상미술화가 김병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현대화가들의 성장과 현대미술의 발전, 미술계의 변화 등 한국현대미술사 백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펼쳐 보였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바람처럼 일어난 백년 예술인생
이 책의 제목 ‘바람이 일어나다’는 김병기가 청년 시절부터 좋아한 프랑스 시인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 “바람이 일어나다. 살아야 한다”에서 따왔다. 일제강점기와 분단, 6.25 전쟁 등 생사를 넘나드는 파고 속에서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김병기가 자신을 가다듬는 좌우명으로 읊조리던 이 구절은 그의 실존적 고뇌, 생의 의지와 맞닿아 있다.
김병기는 그 누구보다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고, “그림은 시대정신을 담아야 하며 레알리테(진실성)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고하게 화실에서 그림만 그린 것이 아니라 민중과 사회를 위해 직접 발로 뛰며 노력했고, 다른 예술가들도 이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6.25 전쟁 때는 선우휘, 이용상과 함께 끊어진 대동강철교를 이어 피란민 수만 명의 생명을 구했고, 전쟁의 실상을 왜곡한 피카소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김병기는 평양, 도쿄, 서울, 뉴욕을 오가며 동양과 서양, 추상과 구상을 아우르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보스턴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보스턴 글로브〉에서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 추상표현주의가 소용돌이치고 있다”고 대서특필했다. 104세의 개인전에서는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만년까지 맑은 정신으로 치열한 창작활동에 매진하여 마침내 ‘현대미술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었다.
지은이 | 김형국
1942년 경남 마산에서 났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도시계획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이던 사이(1975~2007년), 동 대학원 원장,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 한국미래학회 회장도 지냈다. 정년 뒤 대통령 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제1기 민간위원장을 역임했다. 《한국공간구조론》, 《고장의 문화판촉》 같은 전공 서적에 더해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 《김종학 그림 읽기》, 《활을 쏘다》, 《우리 미학의 거리를 걷다》,《박경리 이야기》 같은 방외(方外) 서적도 냈다. 인문학 연구가 학예일치(學藝一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바른 글쓰기 요령을 담아 《인문학을 찾아서》도 냈다. 인문적 행보로 원주의 토지문화관 건립위원장(1995년)과 서울스프링페스티벌 조직위원장(2006년)을 맡았고, 2014년 이래는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이다.
목차
글머리에
1장 최장수 현대화가의 마지막 필력
영생처가 정해지다 / 높을 ‘台’(태) 길 ‘徑’(경) / 누가 평전을 적을 것인가 /
대척지향 서울 미대 두 교수 / 나도 한번 적어 볼 만하겠다
2장 김병기의 그림 입문
아버지가 후원한 일본 유학 / 양화연구소 출입, 그리고 후지타 회상 / 문화학원을 다니다 /
문화학원의 고향친구들 / 유학시절 작업들 / 무대미술 쪽도 관심 / 귀향의 시간 /
결혼 전야 / 글의 사람 / 〈삼사문학〉 동인 친구들 / 〈단층〉 동인들
3장 해방 전후 그리고 월남
한때의 마르크시즘 관심 / 김일성 치하에서 / 이태준에 대한 기억 /
북한 미술동맹 서기장이 되어 / 남행에 앞서 일단 몸조심 그리고 월남, 아니 탈북
4장 6.25 전쟁 발발 전후
6.25 전쟁 전야 / 피란을 못 갔다 / 스승 근원(近園)을 ‘보쌈’했던 빨갱이 /
고향 사람이 살려 주었다 / 다시 북한 땅에, 하지만 화급했던 피란길 /
부산 피란살이 / 종군화가단에서 활약 / 피카소의 6.25 전쟁 왜곡 참견
5장 환도 그리고 미술교육 일선
피카소 논란 끝 서울대 출강 / 정릉집 시대 / 미술의 대학교육과 중등교육 /
서울예고 미술부장, 미술도 조기교육 대상인가 / 바람직한 미술교육 방식은 /
장발 학장과 얽히고설켜 / 밀물 같던 오해도 세월 따라 썰물로
6장 미국으로 가는 길
비엔날레 커미셔너가 되어 / 록펠러재단 초대 손님 / 새러토가에 살다 /
형상이 있는 추상을 향해 / 새러토가의 사계 미국인 삶의 밑바닥 체험 / 미국 정착 초기 그림들 / 금강산을 생각하며 / 일용생활인 김병기 / 미국 생활 맛을 익힐 즈음 /
뉴욕 가면 만나던 김환기 / 드디어 아내가 왔다 / 새러토가의 부부생활
7장 다시 만난 고국산천
드디어 서울에서 개인전을 / 그림이 팔리다니 / ‘결코 늦지 않았던’ 파리의 만남 /
아내 타계 다시 파리로 / 다시 서울로 /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8장 김병기의 미학
다다이즘 근친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 현대미술의 물꼬를 튼 다다이즘 /
‘행동적 휴머니스트’의 비판적 현실주의 / 레알리테의 반면교육 / ‘추상’ 낱말 용례와 김병기주의 /
화풍 변화의 분기점 / 김병기의 화면 구성
9장 이제 세월이 흐르지 않네
내쳐 백 살로 살고 있다 / 백수 잔치의 시발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 한일 미술전 참여 /
일본 방문에 이은 중국 전시 / 그림 제작은 흐르는 물처럼
10장 바야흐로 백세청풍
바람이 일어나다 / 장수 덕분에 옛 친구들 미덕도 말하고 / 옥길, 동길 남매의 ‘길(吉)냉면’ 백수 잔치 / 바야흐로 그림에 시가 있는 풍경이 / 귀빈의 전람회 내방
11장 한국궤도 재진입의 통과의례
다시 한국 국적을 회복하니 / 좋은 일이 꼬리를 물다 / 드디어 막이 오른 일본 전시 /
예술원 회원으로 뽑히다 / 백수 그림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12장 백 살에 맞는 성시 나날
백 살 현역의 망중한, 그럼에도 공사다망 / 말문을 열지 않을 수 없는 나날들 / 어쩌다 나들이 /
열려 있던 화실 / 104세의 개인전 / 당신 그림을 위한 변호 /
거처는 멀어져도 마음은 여전히 가까워 / 내가 마지막 본 김병기 화백
부록: 대동강철교를 어떻게 넘을 수 있었던가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김병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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