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스승이며 시서화 모두 뛰어났던 강세황의 자화상과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 우리 미술사에서 자화상은 초상화에 비해 매우 희소하다. 실력과 함께 화가의 자의식 없이 그리기 어려운 이유다. 강세황은 스타 문인화가였지만, ‘천한 기술’ 때문에 얕보는 자를 경계한 임금의 권고로 20년을 절필한 불운한 화가이기도 했다. 70세에 다시 붓을 잡았을 때, 격식을 벗어난 복장으로 명확한 자기인식을 보이는 자화상을 그렸다. 서두에는 조선에서 문인화가의 의미를 짚으며, 예술가이기 전에 사대부의 일원임을 생각하게 한다. 문헌 자료를 통해서 강세황의 주요 작품의 제작과 수용 과정을 추적하고, 작품의 기능과 의미를 되살렸다. 그렇게 모순적 정체성을 전략적으로 구사한 강세황의 자화상과 자찬문은, 세상을 향한 문인화가의 자기 선언으로 읽힌다.
책소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희다.
머리에는 관리의 모자를 쓰고 몸에는 야인의 옷을 입었네.
마음은 산수에 있지만 이름은 조정에 오른 것을 볼 수 있네.
가슴에는 만 권의 서적을 간직하였고 붓은 천지를 흔드네.
세상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나 혼자서 낙으로 삼는다.
옹의 나이는 70, 호는 노죽이다.
그의 초상은 그가 그린 것이며 찬도 자기가 지은 것이다.“
- 강세황이 자화상에 적은 자찬문 中
조선의 자화상에 관한 본격적인 탐색
뒤러, 렘브란트, 반 고흐, 앤디 워홀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화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미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사진이 없던 시대를 살았더라도 우리는 자화상을 통해서 화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화상의 모습은 완전한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자화상 속의 화가는 자주 다중적이고 때때로 역설적이다. 자화상은 객관적인 모습을 그리는 초상화와 다른 장르의 그림이다. 자화상이 그리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 화가는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화가의 현존을 그린 자화상은 매우 사적이면서 보편적인 그림이다.
동양 미술의 역사에서 화가의 자화상은 드물게 나타난다. 우리 미술사에서 자화상을 남긴 화가는 윤두서와 강세황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자화상의 수는 극도로 적지만 모두 빼놓을 수 없는 한국미술사의 명작이다. 강세황은 야인의 도포에 관료의 사모를 착용한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다. 그의 자화상에 보이는 유래 없는 독창적인 형식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책은 『표암 강세황-붓을 꺾인 문인화가의 자화상』은 강세황의 자화상과 여기에 담긴 화가의 내면의식을 심층적으로 다룬 다년간에 걸친 탐색의 결과물이다.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난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화가
강세황은 대중적으로는 천재화가 김홍도의 스승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찍이 미술사학자인 고 이동주가 ‘예원의 총수’라는 별칭을 붙여주었을 정도로 학계에서는 스타 화가의 위상을 지녔다. 생전에 강세황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조선에서 활약한 많은 문인화가 중 대표적인 인물로서 일컬어진다. 그러나 강세황은 임금의 권고를 받아 20년에 걸친 절필(絶筆)을 단행하였던 불운의 화가이기도 하였다. 70세에 이르러 절필을 마친 강세황은 자화상을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이 그린 그림임을 명시하였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조선에서 문인화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문인화가 발생한 중국에서 문인화가는 줄곧 특별한 문화적 권위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예술로서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예술가로 정의되었다. 생계를 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직업화가와 대척점에서 문인화가는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문인의 정신성을 추구하는 숭고한 존재로서 존중받았다. 12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문인화 이론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강세황은 전형화된 문인화가상에 맞추어 이해되었다. 그러나 강세황의 삶을 구성하는 20년간 지속된 절필, 만년의 출사, 거듭된 과거급제, 조정에서의 활약과 국왕의 총애와 같은 사대부로서의 궤적 속에서 기존의 화가상은 어떤 모순점에 부딪히게 된다. 이것은 비단 강세황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문인화가 전반에서 관찰되는 한계이기도 하다. 문인화가들의 삶을 구성하는 모순들은 그들이 살며 대면하였던 조선 사회를 돌아보지 않고 피상적으로 이해하였던 까닭이다.
“천한 기술 때문에 얕보는 자가 있을까 싶으니 다시는 그림을 잘 그린다 하지 말라.”
저자는 조선의 문인화가를 이해하는 근간으로서 그들이 예술가이기에 앞서 사회의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일원이었음을 강조한다. 강세황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 세가의 후손으로서 그 계층에 부여된 사회적 규범을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즉 유학의 경전과 문장을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적 책무였다.
젊은 시절 강세황은 조정의 관료로서 자신의 포부를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1728년 발생한 무신란으로 인하여 강세황의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소북계였던 강세황의 가문과 남인인 처가는 당시의 정국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그의 앞날은 불투명해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서울을 뒤로하고 강세황은 안산으로 이주하였다. 안산에서는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움트고 있었다. 안산의 혁신적인 문화를 자양분으로 삼아 강세황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고 가문의 재기를 도모하게 된다.
내면의 상실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한 그림은 강세황에게 문인화가로서 사회적 명성을 안겨 주었다. 화가로서 명성이 높아질수록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림 요청이 쇄도하였다. 강세황은 간단히 그릴 수 있는 대나무 그림으로 요구에 응하였다. 만년에는 자신의 묵죽화를 수 천장의 판화로 제작하여 그 요구에 응대하고자 하였다. 그가 이토록 회화 수응에 심력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수응에 따르기 마련인 보상에 주목하였다. 우선적으로 서화에 대한 보답으로 경제적 보상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수응을 직업화가의 특성으로 보기도 한다. 문인화가로서 강세황의 서화수응은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구축하는 수단이었다. 이 책에서는 여기에 더하여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재기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였다고 말한다.
시서화 삼절로서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하던 강세황에게 임금은 ‘천한 기술 때문에 얕보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그림을 자제하라고 권고하였다. 이후 강세황은 긴 절필에 들어갔다. 조선에서 회화는 어디까지나 천기(賤技), 즉 천한 기술이였다. 유교 문화권의 어느 사회보다 강고한 윤리적 원칙을 고수하였던 조선은 사회적 담론과 통념으로 사대부의 그림을 경력하게 규제하였다. 국왕의 언급과 강세황의 절필은 회화는 천기라는 명제가 관념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저자가 문인화가로서 강세황의 삶을 분석하는 두 키워드는 ‘수응’과 ‘절필’이다. 회화 요구를 응대하는 수응이 화가로서 존재하기 위한 전략이라면, 붓을 꺾는다는 의미의 절필은 화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대부 문인의 전략이었다. 강세황이 두 전략을 구사하며 화가이자 사대부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문인화가로서 자신을 사회에 관통시키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화업을 천하게 여기는 세상을 향한 화가의 통쾌한 자기 선언
영조의 탕평 정책은 60세까지 야인으로 살았던 강세황을 조정으로 소환하였다. 정조의 조정에서 그는 어진 제작을 성공적으로 감독하였으며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시서화의 재능으로 국위를 선양하였다.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의 71세 관복본 초상화는 조정에서의 성취를 오롯이 담아낸 초상화이다. 관료 초상화의 규범을 따라 그려진 관복본 초상화이지만 오른손을 화면에 드러내며 형식적 파격을 시도하였다. 관복과 드러난 손은 강세황이 서화의 재능으로 국왕을 도왔던 ‘조정의 문인화가’였음을 의미한다.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관료로서 위상을 확립한 강세황은 20년의 절필을 마치고 야복에 관모를 쓴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관복과 야복의 도상을 결합시킨 이 초상화는 고관의 자리에 오른 자신을 과시하는 그림인가, 여전히 재야의 삶을 지향하는 자신의 정신적 가치를 그린 것인가? 아마도 강세황 자신조차 자화상을 그리며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저자는 강세황이 자화상에서 관모와 야복으로 표출하고자 하였던 자신이란 재능을 인정받아 관직에 소환된 재야의 문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강세황의 자화상은 일생을 관통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시각적으로 정의한 것이다. 그림과 함께 자찬문을 적으며 그 마지막에서 강세황은 “그 그림은 내가 그린 것이며, 그 찬도 내가 지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 구절은 자화상이란 화가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관모에 야복을 입은 강세황의 자화상은 화업을 천하게 여기는 세상을 향한 화가의 통쾌한 자기 선언이었다.
이 책의 서술에서 눈에 띄는 점은 강세황의 중요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나하나가 제작되고 수용되는 상황을 꼼꼼하게 추적하여 작품의 기능과 의미를 되살리는 점이다. 이러한 구체성은 화가의 작품에 남은 기록을 바탕으로, 문집, 사료, 서간, 고문서 등 풍부한 문헌 자료를 적극 활용하는 데서 나오고 있다. 다양한 사연을 담은 그림은 심미적 감상의 대상에 한정되지 않으며, 화가의 인생의 기록이자 은밀한 정치의 수단이며 재화의 일종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기능이 되살아난 그림은 다양한 층위에서 인간사를 매개하는 메신저로서 다가온다. 당시의 실상 속에서 되살아난 작품들은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표암 강세황-붓을 꺾인 문인화가의 자화상』은 강세황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하는 연구서는 아니다. 이 책에 담지 못한 작품들은 저자의 다음 스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은이 | 이경화
서울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미술사학을 전공하였다. 동 대학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강세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업과 동시에 서울대학교박물관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박물관 업무의 전반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쌓았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경기도 문화재위원, 겸재정선미술관 겸재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인화, 실경산수화, 초상화, 박물관학 등 한국 회화사의 주요 분야에 걸쳐 폭넓은 글을 써왔다. 근대기에 한국미술사학이 형성되는 이면에 작용하였던 다양한 역학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목차
저자 서문
프롤로그
문인화가 강세황
선행 연구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연구 방법 및 구성
제1장 가문의 정치적 시련과 회화를 통한 연대
1. 강세황의 가계와 가문 의식
2. 무신란의 상흔과 치유를 위한 회화
3. 안산 이주와 회화를 통한 연대
제2장 문인화가를 향한 사회적 요구와 그 대응
1. 진주 유씨를 위한 서화 수응과 예술 취미의 공유
2. 남인 문사를 위한 서화 수응과 사회적 활동의 확장
3. 소론 관료를 위한 서화 수응과 그 정치적 성격
4. 대중적 수응화로서 묵죽화 제작
5. 사회적 의무로서의 서화 수응
제3장 사대부-관료로서의 문인화가
1. 가문의 복권과 절필의 시련
2. 출사와 절필의 종료
3. 관료-문인화가로서의 활약
4. 조선 조정의 문인화가
제4장 자아의 탐색과 자기 인식의 형상화
1. 강세황의 자화상 제작의 이력과 동인
2. 〈70세 자화상〉과 자기 인식
3. 〈71세 초상화〉와 관료로서의 자기 인식
4. 문인의 자아 표출과 초상화
제5장 강세황의 서화와 18세기 문화의 만남
1. 청완 문화의 향유와 회화적 대응
2. 실경산수화와 문인화의 새로운 모색
3. 서화 비평과 풍속화에 대한 글쓰기
에필로그
부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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