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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Dada다 : 만 레이 자서전

  • 청구기호660.99/레68ㄴ
  • 저자명만 레이 지음 ; 김우룡 옮김
  • 출판사미메시스
  • 원서명Self portrait
  • 출판년도2005년
  • ISBN899064108X
  • 가격25000원

상세정보

프루스트의 죽음을 찍은 것도, 헤밍웨이의 첫 소설집에 나올 사진과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실릴 사진을 찍은 것도 만 레이였다. 은둔의 철인 조각가 브란쿠시는 유일하게 만 레이에게 자신의 작품과 인물 사진 촬영을 허락했으며 프랑시스 피카비아와 앙드레 드랭은 그들이 사랑하던 차에 앉은 자신들의 모습을 만 레이에게 찍어 줄 것을 부탁했다. 피카소는 만 레이의 단골 모델이었으며 입체파의 창시자 브라크는 만 레이의 초상 사진과 자신의 그림을 즐겨 맞바꾸고는 했다.
전설적인 사진가이자, 화가, 오브제 제작자, 영화감독으로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다재다능한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인 만 레이의 자서전 ?나는 다다다?가 의사이자 칼럼니스트, 사진가인 김우룡의 번역으로 미메시스에서 출간되었다. 예술가 자서전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한 저명한 예술가의 삶과 그가 활동했던 20세기 전반에 걸친 시대상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솔직함과 재치가 넘치는 문장과 함께 풍부한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에 배치된 컬러 도판 35개를 비롯한 250여 장의 뛰어난 사진은 만 레이의 작품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20세기 현대 예술의 가장 가까운 증인

피카소, 피카비아, 브란쿠시, 에른스트, 달리, 마티스, 브라크, 레제, 파울 클레 등 현대 미술계의 거물들을 비롯해 제임스 조이스, T. S. 엘리엇, 폴 엘뤼아르, 장 콕토, 헉슬리, 거트루드 스타인, 헤밍웨이, 에즈라 파운드, 헨리 밀러 같은 작가들, 그리고 만 레이가 젊은 시절부터 죽 함께했던 아방가르드 운동의 동지 마르셀 뒤샹, 트리스탕 차라, 앙드레 브르통 등, 수많은 20세기 예술계의 빛나는 별들이 이 책에는 등장하고 있다. 만 레이는 이들 예술가들의 고집과 기행, 엄숙과 방종, 진지함과 경박함을 가감 없이 소개하고 있어 독자들은 그 당시 아방가르드 운동이나 예술계의 분위기 등을 몸소 체험하는 듯한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만 레이는 자서전을 통해 그의 예술적 다재다능함에 글쓰기를 추가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옮긴이의 말대로 <만 레이의 글은 심각하지 않다. 편하고 익살스럽게 자신과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드러낸다. 거기에는 조금의 현학도 끼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20세기 전반 50년 동안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의 모습이 쇠 그물처럼 단단하게 엮여 있다>. 곳곳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그의 글쓰기는 어떠한 권위나 우상, 전통 등도 거부하는 다다이즘의 영향과 그의 솔직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의 모차르트처럼 만 레이는 그의 의지박약과 말 뒤집기, 계산적인 생각을 하는 모습 등을 숨김없이 그리는 한편, 작업에 임하는 진지한 모습과 예술에 관한 글 속에서는 미를 향한 그의 구도자적 정진에 엄숙함을 느끼게도 한다.
만 레이가 활동했던 회화, 사진, 영화, 오브제, 예술 평론의 각 분야에서 그보다 뛰어난 많은 동료나 선배들이 있었지만 만 레이처럼 다방면에 걸쳐 높은 수준의 작품 활동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20세기의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산물에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았으며 카메라와 스프레이 등 모든 새로운 것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정복해 나갔다. 사진을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그가 도입한 혁신적인 사진 기법들은 그가 얼마나 자신을 표현하는 매체medium에 대해 완벽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는가를 잘 알려 준다.
그는 20세기 예술 운동의 전위에 몸을 두고 있었지만 현대라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으며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화가로 자신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수많은 매체를 동원해 미술 작업을 한 것은 그의 내재적인 예술 충동이 자연스럽게 그것들과 결합된 것일 뿐 어떤 센세이션을 몰고 오려는 얄팍한 계산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무언가 비정통적인 기법을 구사할 때는... 제재가 새로운 접근을 요구할 때였다.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떤 기법을 적용하거나 고안해 냈다. 나의 기법을 비난하던 비평가들은 표피적일 수밖에 없었다.> 만 레이는 그런 비평을 들으면 <오히려 나의 행동이 타당하고 내가 바른 길에 서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의 묘비에는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무관심하지는 않았던>이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그가 평생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구현하려 했던 다다이즘의 목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제도권보다 세상을 덜 나쁜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후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힘을 얻고 많은 예술가들이 정치 운동에 열렬히 뛰어드는 것에 대해 만 레이는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걸린 영역이 어떻게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와 양립할 수 있겠는가라며 많은 예술가들이 상처받을 것을 염려했다.
만 레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지만 초현실주의자로서 그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죽기 얼마 전 마지막 생일날, 주위 사람들이 훈장증으로 메달과 리본을 교환해 달아 주었다. 그는 가슴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달고 머리에는 오래된 가발을 쓰고 시가를 피우며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만 레이는 예술가는 세상에 해악을 가장 적게 미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의 인생도 그러한 예술가로서 충실한 삶이었다고 자평했다.


다다에 충실했던 예술과 사랑과 인생

그리니치빌리지에서 파리로 그리고 할리우드로 그리고 다시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만 레이 는 언제나 아방가르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사조를 불문하고 당대의 예술계를 풍요롭게 하는 데 그의 작품들은 기여했다. 그의 예술적 성과는 단지 아방가르드와 다다이스트들에게만 축복이 아니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만 레이를 가리켜 <초현실주의 전파Presurrealiste>라고 불렀다.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은 전쟁과 혁명의 참화를 목격한 예술계가 현실에 대한 예술의 무기력을 떨쳐 내고 기존의 가치와 사회 체계를 부조리와 우상 파괴의 정신으로 대응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1914년 월 가의 증시는 전쟁 특수에 대한 기대로 급등했다. 만 레이의 눈에 비친 그날의 주위 풍경은 <전쟁에 의한 이익만 있고 그 비참함은 조금도 없는 커다란 축제일 같았다>. 그는 이러한 끔찍한 풍경을 보고<인간들이 스스로 초래한 비참을 피할 방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상파적인 화풍의 풍경화를 주로 그리던 그는 점점 더 <인공적인 대상으로 관심의 방향을 옮겨 갔다. 내가 자연의 일부이고, 내가 자연 그 자체이다. 따라서 내가 어떤 제재를 택하든 간에, 내가 어떤 환상이나 모순을 제기하든 간에, 그것들은 무한하고 예측하기 힘든 자연의 표상들 속에서 자연처럼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이러한 변화의 필연적인 결과로 그리니치빌리지를 떠나 대서양을 건너 다다의 진원지 파리로 건너간다. 미국에서 이해받지 못한 아웃사이더였던 만 레이를 파리의 다다이스트들은 <다다의 미국 친구>로 열렬히 환영했다.

만 레이는 파리를 사랑했다.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2차 대전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만 레이는 파리를 떠난 상실감에 은둔을 꿈꾸었다. <익숙했던 나의 출몰지,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이 가능했던 그곳, 정말 필요한 만큼만 만족을 추구하며 일을 해도 되었던, 거기 개성이 아직 존중받고, 영원한 가치를 지닌 작업들에 의해 작가가 권위를 인정받던 그 파리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2차 대전 후 많은 미국인들이 프랑스가 예전의 프랑스가 아니라고 말하며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했지만 만 레이가 미국에서 돌아와 목격한 프랑스인들의 사고방식은 전쟁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삶의 모든 필수품을 사치품처럼 대했고, 사치를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으로 여기고 있었다>.
특히 그는 궁핍한 예술가들과 보헤미안들의 집합소였던 몽파르나스를 사랑했다. 그곳은 유럽에 와 있던 수많은 미국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했고 모든 국제적인 것들과 프랑스적인 것이 융합된 기적의 장소였다. 만 레이에게서 사진을 찍으려고 유럽의 모든 예술가들이 몽파르나스로 몰려들었고 유럽을 방문한 미국의 저명인사들은 만 레이의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유럽 여행을 완성하는 꼭 필요한 마침표라고 생각했다.

만 레이가 프랑스에 처음 입국했을 때 세관을 통과하게 되었다. <세관원은 볼 베어링을 기름에 채워 둔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뉴욕 1920>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나는 예술가들은 때때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는데, 이런 병은 집에 무언가 먹을 것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앙드레 드랭이 자신의 누드모델의 사진을 찍어 달라며 모델을 만 레이에게 보냈다. 만 레이는 그 모델에 대해 <그 모델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면 여자라는 것과 아주 수다스럽다는 것이었다>고 넌더리를 냈다.
그가 처음으로 영화를 찍었을 때 그는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사진 찍듯이 자신이 생각한 장면들을 찍었다. <...찍힌 모습이 완벽했다. 하지만 영화 필름에서처럼 프레임이 잘려져 있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필름을 잇는 방법을 몰랐다. 상영 시간을 늘리기 위해 먼저 만들어 놓은 필름 조각들에다 그냥 풀로 이어 붙였다.> 그 영화가 세계 영화사에 당당히 올라가 있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걸작 「에마크 바키아」이다.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이 도난된 적이 있었다. 그의 유명한 다다 작품으로 다리미에 일렬로 압정을 붙인 <선물>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는 전시회의 기획자에게 <아무 걱정 말라고 하고 똑같은 것을 하나 더 만들어 전시했다>.
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스튜디오를 꾸미게 되었을 때는 <배관공과 전기공, 목수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 일은 한 달 안에 모두 끝났다. 어슬렁거리면서 카페로 가 포도주 한 병을 놓고 노닥거리는 등, 그들이 얼마나 꾸물거렸는가를 생각한다면 이건 대단한 실적이었다.>

만 레이의 교유 범위와 특유의 유머 감각, 그리고 핵심에 바로 다가서는 그의 솔직한 글쓰기는 20세기 초반 유럽의 문화계에 관해서 그 이상의 적당한 증언자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만 레이의 자서전 같은 글은 <재주로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연구해서 쓸 수 있는 글도 아니다. 그의 삶이 그래서 그렇게 쓰였을 뿐이다>(옮긴이).

만 레이는 여러 번 반복해서 예술에는 진보란 없다는 믿음을 풀어서 말했다. 어느 누구도 예전의 거장들을 능가할 수는 없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들과 조금 달리 만드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술의 지도에는 다양한 샛길들만 있을 뿐 앞으로 뻗어 있는 진보의 대로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 번도 정상적인 심사전에 작품을 출품한 적이 없었다. 그는 심사 위원회라는 것의 권위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물으며 <오늘날 가장 유명한 화가들의 상당수도 오랜 세월 동안 심사 위원회라는 것에 의해 배척되어 왔다>는 걸 상기시키며 주위의 출품 권유를 거절했다.
그는 현대 미술의 전위에 서서 평생을 활동했지만 현대에 대해 특별한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내가 살고 있는 내 시대의 화가>로 생각했다. 그는 어느 파티에서 만난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에리히 본 스트로하임이 현대 회화를 싫어한다고 하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우리가 아는 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응수했다.
카메라 없이 인화하는 사진 작업 레이오그래프를 발명해 사진의 표현 영역을 한 단계 넓히는 성과를 거둔 만 레이는 솔라리제이션이라는 독특한 인물 사진 작업을 통해 인물의 영혼을 끄집어내는 사진가라는 평판을 얻는다. 사진 작업의 결과물들을 영상에 적용하고 싶은 호기심에 만 레이는 필연적으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필름을 잇는 방법조차 몰라 필름 조각들을 풀로 이어 붙일 정도로 어설픈 작업이었지만 그가 만들었던 「에마크 바키아」, 「불가사리」, 「이성으로의 회귀」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걸작으로 당당히 세계 영화사에 올라 있다. 만 레이는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들로부터도 영화를 같이 하자는 제의를 여러 차례 받지만 그는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한 작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며 거절한다.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촉망받던 화가인 만 레이는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자발적인 망명을 했다.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안정적인 직업과 전망에 머물러 새로운 모험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자서전이 들려주는 소중한 기록을 듣지 못했을 것이며 20세기 현대 미술은 한 정력적이고 다재다능했던 예술가를 누락시켜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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