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어느 날 나는 북한바로알기라는 운동을 미술분야에서 펼쳐야겠다고 생각하고 북한 미술의 흔적을 열심히 찾았다. 쉽지 않았다. 이거저거 손에 잡혔는데 웬만큼 준비하고 사방 팔방 떠들고 다녔다. 보람찬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진 곳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 때부터 눈길을 끊어버렸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문득 문영대 선생의 변월룡에 관한 책을 손에 쥐었고 금세 쭉 읽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점에서 그랬다.
나로선 그런 재미보다는 북한 미술사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거니와 그러나 바로 이런 편지글이야말로 그 미술사를 살아있는 생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니 정말 재미있을 수밖에. 이 편지엔 숱한 인명들이 출현하는데 정말 관심의 표적이었던 이름들이다. 그러나 딱딱한 논문들이나 역사책엔 그 사람의 향기가 없어 답답했었다. 비로소 내가 이 책에서 그 사람을 만나다니!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흥미로운 한 토막 이야기가 있다. 나는 몇 해 전 탁월한 미술사학자 김용준 선생의 전집을 만들면서 도대체 그 분은 북한 땅에서 어찌 살았을까 궁금했었다. 이 책에 한편의 바로 궁금증을 풀어주는 편지가 공개되어 있다. 1955년 당시 조선 고전미술 계승과 발전에 대한 고군분투를 생동하게 느낄 수 있는 게다. 물론 딱 한편뿐이다. 그러나 말이다. 그 한편이 어딘가? 신기한 일이다. 인연이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바로 이 책이 어쩌면 식어버린 북한 미술에 관한 관심을 되살려 줄지도 모르니 말이다.
최열│미술평론가, 가나아트센터 기획실장
화가 변월룡(1916-1990)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다. 한국 땅이 아닌 러시아 땅에서 태어난 기구한 운명 때문에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화가이다. 당시 러시아와 한국은 냉전체제와 정치적인 이념문제 등으로 오늘날과 달리 모든 정보와 인적 왕래가 차단되어 있었다. 때문에 우리나라 화단에서는 그의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가 않았고 또한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점에서 한국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미술학 박사학위 취득이다. 1951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니 아마도 한국인 화가로는 최초의 미술학 박사학위 취득이 아닐까 싶다.
둘째, 외국에서 정교수 역임이다. 1950년부터 1985년까지 35년간 미술교수를 역임했으니, 외국 대학에서 정교수 역임도 한국인 화가로서 최초이지않나 싶다. 그것도 소련 최고, 최대의 예술대학인 '레핀미술대학'에서였다.
셋째, 북한미술과 평양미술대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점이다. 남북 휴전협정이 체결될 무렵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미술대학 설립은 물론 그 대학의 교수들과 화가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이름은 북한미술계에서 지금은 전설로 남아있다.
넷째, 북한미술계에서 위대한 스승으로 모셔졌다는 점이다. 북한미술계의 거장들은 한결같이 그에게 존경의 염을 보냈다. 예술가는 자존심으로 먹고 산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만은 자존심을 버릴 수 있었는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다섯째, 소련에서 평생을 보내면서도 결코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마다에 나타나는 한국의 향수와 정서가 짙게 배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 새겨진 한국어와 한자 서명, 한국어 편지왕래 등이 그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여섯째, 역사적인 인물을 오늘날 되살려 놓았다는 점이다. 한국 화가들은 대체로 이 부분에 대해서 인색했다. 어느 누구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를 않았다. 할 말은 많으나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변월룡에 의해 되살아 난 한국의 역사적 인물로는 무용가 최승희, 문학가 리기영, 한설야, 미술평론가 김용준, 한상진, 화가 문학수, 정관철 등이 있다.
일곱째, 한국 서양미술사의 취약점 보충이다. 한국 서양화는 역사에 있어서나 작품에 있어서나 엄밀하게 말해서 뿌리가 없이 꽃을 피운 격에 다름 아니다. 변월룡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허약한 뿌리를 튼튼한 뿌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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