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壁을 뛰어넘어 점프!
- 조환 개인전 [Game – 壁](2022.3.9.-3.21, 동덕아트갤러리)
지민석 | zsww@naver.com
조환, 壁, 51.0x50.0cm_2021
철판에 보이는 멋진 글자들을 한 번 읽어볼까? 전시장에 들어가 철판에 새겨진 수많은 글자를 보고 생각했다. 나름 [논어]고 [도덕경]이고 하는 고전들을 조금이나마 읽어본 나는 작품 앞으로 자신 있게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단 한 자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한자 실력이 없었단 말인가?
조환, 壁, 153.0x47.0cm, 2021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작품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드는 의문들. 어라? 이런 글자가 있다고? 어라? 이런 획이 존재한다고? 유레카! 그렇구나. 사실 철판에 있는 글자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거나 모양이 왜곡된 글자들이었다. 이를 깨닫고, 글을 읽으려는 집착을 버렸다. 그리고 작품을 보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뚫린 철판에서 강렬한 획劃의 기운이 느껴졌다. 미술관의 조명이 철판의 획들에 의한 구멍들 사이로 그림자를 만들어내니, 빛과 그림자는 철판 획 사이에서 춤을 추었다. 그제야 작품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 춤에 나도 한번 끼어 보지 않겠느냐고.
조환의 개인전 [Game – 壁](2022.3.9.-3.21, 동덕아트갤러리)에는 그가 이전까지 해왔던 철 작업과 물질적으로 유사한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점이 있으니, 철판들에서 보이는 글자들이 모두 가짜, 즉 위서僞書이거나 의미 없는 글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서예, 한자 좀 공부했다던 많은 이들이 전시장에 들어와 작품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며 살며시 웃음 짓는 작가의 모습에서 이번 전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구조들로 이루어져 있다. 법, 문화, 사회 등의 구조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구조들은 대부분 언어로 시작되었고,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로 이루어진 수많은 개념들, 이름들은 그 개념들과 이름들을 통해 ‘사고’하는 우리의 의식뿐만 아니라, 개념들과 이름들로 이루어진 구조들에서 사는 우리의 삶의 방식,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개념들과 구조들의 형성을 어떤 놀이game라고 생각해보자. 좋음-나쁨, 아름다움-추함 등의 개념들부터 그 개념들과 연관된 문화, 사상, 사회, 언어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가 만들어낸 아주 ‘진지한’, 그리고 ‘즐거운’ 놀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만든 즐거운 놀이는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놀이가 수단임을 알 때 우리는 놀이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놀이의 목적은 너무나 쉽게 잊힌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한 놀이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아이들이 놀이에 너무 몰입하면 놀이를 현실 세계와 분간하지 못해 놀이에 집착하여 즐기질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구조의 놀이에 너무 집중, 집착하여 더는 놀이가 ‘놀이’임을, ‘즐거운 것’임을 알지 못한다.
조환 개인전 [Game – 壁](2022.3.9.-3.21, 동덕아트갤러리)
이번 전시에서, 조환에게 ‘언어’란 놀이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린 ‘놀이’이다. 우리는 언어와 개념, 조금 더 고상하게 이야기하여서 ‘명名’의 노예가 되어 진정한 세계를 바라보지 못한다. 마치 필자가 처음 전시에 들어와 글씨를 읽으려고 했다가 작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것과 같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집착하는 놀이, 즉 게임game을 둘러싼 벽壁을 벗어나 놀이의 밖을, 그리고 그 놀이를 다시 바라보자고 권유한다. 어찌 보면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벽이 되고, 바쁜 삶을 사는 우리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벽’을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벽을 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절대 작품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밖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가시적인 ‘벽’으로, 우리는 그의 ‘벽’을 타고 또 다른 ‘벽’들을 넘어 놀이의 밖에 있는 즐거움과 놀이의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우리에게 저 너머의 삶, 놀이 밖의 삶, 구조에서 벗어난 삶을 살자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놀이 밖의 삶을 살겠다고 페터 빅셀Peter Bichsel(1935-)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늙은 남자 1) 처럼 언어와 개념을 버리고 살면, 결국 그 누구와도 의사소통을 못하여 침묵과 외로움만이 있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놀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놀이의 존재는 우리 삶에 있어서 필수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놀이의 존재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를 놀이로써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끊임없는 사유의 여정을 통해 그 어떠한 놀이에도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으며 사는 행복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장자의 ‘호접몽 胡蝶夢’에서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도저히 모르겠는 경지가 바로 어떤 놀이에도 집착하지 않고 즐기는 경지이다. 장자는 호접몽을 이야기하며 절대 “나비의 삶이 더 좋으니 나비로만 살아야겠다.” 혹은 “장자의 삶이 더 좋으니 장자로만 살아야겠다.”라고 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여행과 변신을 통해 놀이들을 소요하며 인생을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이 행복의 추구야말로 작가가 ’놀이의 벽‘을 제시하여 그 밖과 안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목적이다.
조환, 壁, 100.0x167, 2022
작품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상반되는 것의 충돌은 놀이들 사이의, 또는 어떤 ’놀이‘의 밖과 안 사이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줄타기의 표현일 수 있다. 단단한 물질인 쇠에 부드러운 물질인 붓으로 쓴 듯한 획,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나오는 작품의 아우라, 글씨 같으면서도 아닌 이미지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두 극極의 사이를 오고 가며 유희한다. 충돌들은 우리가 시각적으로, 의식적으로 헷갈리게 만들지만, 바로 이러한 여행에서 오는 헷갈림의 즐거움, 나비인지 장자인지 헷갈리는 유희야말로 작가가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요즈음 인기 있는 스포츠 중에 ’파쿠르Parkour’ 또는 ‘프리러닝FreeRunning’ 이라는 것이 있다. ‘움직임의 예술’이라고도 불리는 이 스포츠는 벽들을 넘어 건물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자유와 유희를 느끼는 극한 스포츠다. 조환의 작품들은 우리가 ‘정신의 파쿠르’를 할 기회를 준다. 지금 그의 작품들을 보며, 그의 작품들 사이를 뛰고, 넘고 하며 놀이game들 사이를 넘나들어 극한의 행복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1)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 일상의 변화를 위하여 자신만의 방법으로 모든 물건의 이름을 새롭게 만든 늙은 남자이다. 자신만의 개념으로 물건을 칭하던 그는 결국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게 되어 쓸쓸한 여생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