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학 | namhak100@hanmail.net
예술 - 시각, 기억의 파편화와 적분(積分) : fragmentation & Integral
인간의 감각기관 중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눈, 시각이다. 후각이 원초적인 것이라면, 시각은 지역적이며, 동시에 시간적이다. 시선은 직선적이며, 앞만을 바라볼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라는 문구는 시각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결국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단편적 일수 밖에 없다. 그것은 결코 오류의 영역이 아니다. 사물과 공간에 대한 개인적인 수용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문화적으로 변모한다. 편향된 생각이 아니라, 사고의 편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전체상[像]은 존재할 수 없다. 벤야민(1892-1940)의 아우라는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서 분산되고 파편화되었다. 라캉(1901-1981)의 인간 상상계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누구나 대도시의 모습들을 간편하게 손안의 휴대폰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창의 구조가 바뀌었다. 벌거벗은 육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상상하던 시대는 이제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의 총합으로서 세상은 존재한다. 조각난 이미지가 켠켠히 쌓인 모습을 우리 각자는 소비하며, 동시에 생산하고 있다.
대도시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누적된 이미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 이미지를 공유하고 새로운 복합이미지를 끊임없이 대량생산한다. 산업화 시대의 대량 생 시스템처럼 이미지들이 공장이 아니라 개인에 의해서 쉬지 않고 생산되고 쌓여가고 있다. 관찰자, 촬영자, 편집자, 관람자 -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1896-1954)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 시도하였던 혁신적이면서 통합적인 프로젝트가 이제는 일상화되었다.
예술작품의 소통방식은 관람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다. 창작자의 누적된 감각과 기억들이 단단하게 응고된 오브제가 작품이다. 통합적인 감각들이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역할을 하지만, 주축이 되는 감각은 시각이다. 시각의 직접성과 무차별성은 관람객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그것은 친절하지도 않으며, 상대방을 배려하지도 않는다. 예술가만이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