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학 지적박물관 학예연구사 roh38938@hanmail.net
“고향산천 잘 있거라/ 부모형제 잘 계시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오도록만 기다리소/울릉도를 가서 보면/ 좋은 나무, 탐진 미역/ 구석구석 가득 찼네(후략)”
전남 무형문화재 제1호로 거문도 어부에게 구전된, 출항 전 풍어를 기원하는 ‘술비소리’에서 우리는 울릉도 독도 해역이 우리 삶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2년 고종의 명에 따라 울릉도 개척 사전 탐색 후 보고한 이규원은 『검찰 일기』에 거주민 140명을 조사한 결과, 115명이 거문도, 초도, 제주도인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울릉도에서 머물며 미역 및 전복을 채취했다고 기록했다. 일본은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고 강변하며 시마네현에 강제로 편입하으나 어민과 해녀들이 울릉도 및 독도를 넘나들며 생업을 이어간 역사적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광복 이후 독도의용수비대와 상부상조하며 생업에 종사한 해녀는 독도 영유권 강화의 숨은 주역이다.
제주도 해녀 1972.8.14 ⓒ 정부기록사진집 ehistory.go.kr
김화순(1921-2020) 해녀는 제주시 한림읍 출신으로 결혼 후 남편과 함께 53세에 울릉도로 이주하여 40여 년간 물질을 한 산증인이다. 1982년 독도에서 미역 채취 중 인근에서 풍랑으로 조난당한 독도경비대 대장과 경비대원의 시신을 인양한 공로로 감사장 및 표창을 받았다. 최고령 해녀로 현장을 지키다 2016년 장남이 거주하는 제천으로 전입하여 여생을 보내고 작고 후 개나리 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제천학연구원에서 발굴한 사례로 김화순의 공적을 의병도시와 연계하여 제천의 해녀 의병으로 기리고 있다. 비록 큰 관심을 받지 못해도 제주 출향해녀의 고된 삶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그리고 바다가 없는 충북 제천까지 이어진 역사를 우리가 계승하며 그 자료를 꼼꼼히 남겨 후세에 전하는 일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영구히 알리는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