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전시 참여작가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의 작품 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1
미미박: 서툰 행위로 쓴 시
최은총
바닥을 타고 흐르는 핑크빛 은하수. 주변을 전염시키듯, 핑크빛의 빛깔이 벽과 천장에 묻는다. 바닥에 왈칵 쏟아진 납작하고 연약한 빛깔들. 잡기 어려운 부스러기. 반짝이. 끈. 유리구슬. 그사이 조심스럽게 놓은 것처럼 보인 작은 돌멩이와 나무 조각. 공간 안에는 가냘프고 어설퍼 보이는 것들이, 색이라기보단 빛깔을 지니고 존재한다. 그 사이로 손자국 역력히 어쩐지 서툴러 보이는 표현으로 만들어진 형상이 서 있기도 하다. 존재하는 것에 부피를 날려버리고 반짝임으로만 빚어내면 이런 모습일까?[도판 1] 미미 박(Mimi Park, 1996-)의 〈발광하는 우리 Shining Us>(2024)는 우리를 조심스레 가꿔낸 소우주에 초대한다.1)
작가는 마치 시인이 낱말을 고르듯. 공간 곳곳에 물질을 펼쳐둔다. 단어에 어순이 생기고 이윽고 한 편의 시가 되듯이, 흩어진 것들은 뒤섞이고 손잡으며 의미를 발산한다. 관객은 행간을 읽듯. 그 의미를 들여다보고 소화한다. 단어를 입에 굴리고. 천천히 문장을 뱉어낼 때 비로소 다가오는 뜻이 있다. 박미미의 작업도 그와 유사하다. 강을 이루는 반짝이들. 누군가 한껏 만지다 놔두고 간 연약하고 작은 것들. 이를 좇아가 볼 때 발견하는 것들. 작가는 마치 미지의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서 관객에게 무언갈 ‘찾게’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공간을 구성하는 수상한 것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미박은 미시적 세계·연성 회로·놀이 치료 등의 주제를 탐구하며 이를 움직이는 조각과 공간에 개입하는 설치 작업으로 선보이고 있다. 마이크로 한 크기의 재료와 수작업을 기반으로 작업하며, 형태적으로 완결된 모습으로 보이기보단 전시 기간 중에 손쉽게 뒤바뀌는 재료와 표현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이번 제15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장 5전시실 ‘처음 소리(Primordial Sound)’ 공간에 펼쳐낸 작은 세계도 그에 연장선에 있다.
미미박의 작품을 언뜻 보면, 흩뿌리기, 잇기, 뒤섞기, 주무르기 등 단순한 방식으로 배열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그 표면은 어쩐지 서툴러 보일 법한 인상을 주곤 한다. 손자국이 역력한 작은 물체들이 어설프게 엮여 작품의 표면을 이룬다. 그러나 작품의 캡션을 보면 이러한 표현과 재료의 배열은 의미심장해진다. 작품의 캡션인가 싶을 정도로 수상한 재료와 표현 방식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표면, 그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풀 클레이, 마이크로 그린 씨앗, 대나무 가지, 발광 다이오드, 전선, 세라믹, 조각용 철사, 셀룰로오스 글리터, 나비 완두콩 꽃잎, 금잔화 꽃잎, 장미 꽃잎, 정류기, 진동 모터, 배터리, 태양 전지, 수집한 먼지, 땜납, 나뭇가지, 돌, 스피커 콘, 앰프, 재활용 종이, 파운드 오브제, 가변 크기
작품은 씨앗이나 꽃잎 나뭇가지와 같은 식물과 전선, 발광 다이오드, 진동 모터와 배터리 같은 전자 제품과 같이 물질적 기반을 둔 재료부터, 수집한 먼지, 소리, 빛과 같이 형체를 고정하거나 작품에 포함하기 어려운 요소까지 포함한다[도판 2]. 긴 캡션에 적힌 구성은 마치 규칙이나 의미를 품은 단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먼저, 작가가 재료를 선택하고 조합하는 방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작업실에 배치된 재료에 라벨링을 한 모습을 공개했는데, “클로버 씨앗”, “모래”, “유약”과 같은 물질 기반의 재료도 있지만, 단어와 생각이 적힌 메모도 하나의 예술적 재료로 분류한 것을 볼 수 있다.2) 이 지점에서 언뜻 연관 없어 보이는 재료의 덩어리들은 사실 긴 시간 동안 이뤄진 수집과 분류, 그리고 조합의 과정으로 만들어낸 필연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우연과 즉흥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수용하나, 그마저도 연결된 작용으로 이뤄진 것처럼 여겨진다.
이 점에서 작가가 작품에 남긴 흔적과 궤적이 더욱 중요해진다. 먼지를 수집해 라벨링을 하는 일. 그리고 천을 꿰매고 실을 엮어내는 일. 거기에 맞는 모터를 달고 전선을 연결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을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작가는 2013년부터 전선, 모터, 작은 천과 실로 얼기설기 만든 작은 로봇들과,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는 모터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 그리고 작은 가습기가 뿜어내는 안개 같은 걸 재료로 삼아오기도 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각 작품이 서로 다른 공간에 배치된 것으로 보이게 연출되어, 개별 작품에 집중하게 했다. 이때 현 작품에 보이는 부드러운 질감과 색감, 형태의 가변함, 일상적인 재료 활용은 작가 본인의 시각적 문법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작품에 수공예적 흔적을 집어넣는 방식을 말이다.
전환점으로 보이는 건 2022년 뉴욕에서 선보인 개인전 《Dawning: dust, seeds, Coplees》(Lubov Gallery, 2022)이다. 작가가 펼쳐낸 공간 속 배치는 자연스럽게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데, 그러면서도 매우 큰 스케일의 풍경을 축소한 듯 보이게 연출해 낸다. 어떤 풍경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작품의 각 부분이 가진 흔적은 펼쳐진 환경 안에서 궤적으로 제시된다. 전체 작품을 하나의 구성체로 본다면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는 것에 방점을 두기보단, 방대한 재료의 수집과 선택, 분류와 그를 조합하고 이어내 어떤 ‘회로’를 만들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부분이 된다. 작가는 그 회로에 은근슬쩍 씨앗이 싹을 띄우는 주기, 전자 제품이 내는 소리, 심지어 반짝이의 빛깔이나 안개 같은 것도 말이다.
매 시각 식물은 생장하고, 전자 제품의 배터리는 닳거나 고장 난다. 작가가 수집한 먼지와 가루는 공기 중에 흩날린다. 전시 기간에 수많은 우연이 이 환경 속에 침투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환경을 통제하고 제어하지 않는다. 단지 가꾸고 보살핀다. 이미 작품의 일부가 고장 나거나 수리가 필요한 것까지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그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전시나 작품이 꼭 ‘완벽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의미한다. 또한, 작가는 전시 기간 내에 직접 설치물을 보수하고 관리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환경을 단지 자연의 힘이라던가, 생명 주기라며 소비하거나 사용한다기보다, 그 속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3) 이로써 작품은 수많은 연결 고리를 만들어낸다. 작가가 먼지를 수집하고 다시 작품에 포함하고 이 먼지가 전시장 안에서 굴러다니며 관객에게 닿는 과정, 배터리에서 전기가 나와 모터로 흘러 들어가 만들어내는 전자기장의 흐름, 이 회로가 고장 났을 때 닿는 작가의 손길 같은 것 말이다.
이 생생한 현장에 관객을 초대한다. 2024년 Sebastian Gladstone(Los Angeles)에서 개최된 개인전 《Treasure Hunt》(2024)의 제목에서 짐작하듯, 미미박은 보물을 ‘찾아보라’ 제안한다. 그리고 무엇이 보물일지 알려주지 않은 채, 연약하고 반짝이고 납작한 것들을 엮어낸다. 그리고 이들이 내는 소리. 뿜어내는 빛. 그려내는 궤적 같은 걸 감상하게 했다. 관객은 전시장 안에서 ‘보물찾기’를 행하며, 버튼을 누르거나 좁은 대한 권유를 받게 되는데, 사실 참여하건 참여하지 않건 무언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작가가 펼쳐낸 그 환경 안에 들어선 관객은 작가가 의도한 바를 승인하건, 승인하지 않건, 그 환경과 회로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전시 이후에도 관객이 작품에 참여할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한다고 밝혔다.4) 실험의 일환으로, 작가는 지나아와 페튜니아 꽃을 재배해 전시에 방문한 관객에게 묘묙을 나눠주기도 했다. 작가가 작품으로 간주한 꽃이 생장하는 동안에는, 관객은 계속해서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관객에게 시각적 환상을 부여하기보단, 경험을 생성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작품을 언뜻 보면, 어린아이들이 놀고 난 후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한 듯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전선이 노출된 채 같은 행위를 반복하던 로봇이 있고, 그 옆에는 같은 로봇이 고장 난 채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모습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관심을 기울이고 돌본다. 작가가 찾아보라고 했던 ‘보물’은,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꼭 완결되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서투르고 엉성할지라도 소중하다고 말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일상적인 재료나 감각을 조합하고 연결해 새로운 관계로 다가오게 하는 것. 그리고 이를 ‘보물’과 같이 애정을 담아 바라보라고 말이다. 마치 시인이 단어를 하나하나 고르고 골라 어순을 만들 듯이, 작가는 우리가 작품을 마주치고, 인지하고, 따라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안내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마치 시를 읽듯이 느리게 탐색하며, 천천히 의미를 해석하고 내면화한다. 작가는 그 작은 세계에 우리를 초대한다. 새싹이 돋아나는 작은 언덕으로, 반짝이 강이 흐르는 소우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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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총(1996-) dms960527@gmail.com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사학과 수료. 포항융합예술실험실과 광주 국제큐레이터코스 현장 코디네이터 근무. 제 11회 아마도애뉴얼날레_목하진행중에 기획자 선정, 2024 트라이보울 초이스 전시 《매끄러운 세계와 골칫거리들》(2024), EMAPxFRIEZE FILM 연계전시《중간에서 만나》(2024), 홍천미술관 지원 전시 《플랜티 하우스》 (2023), 서교예술실험센터 지원 전시 《레테》(2023)를 공동 기획.
1) 미미 박 Mimi Park(1996년 서울 출생)는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PANSORI: A Soundscape of the 21st Century》(2024) 참여 작가이자, 로스엔젤레스의 Sebastian Gladstone에서 개최된 개인전 《Treasure Hunt》(2024), 뉴욕의 Lubov Gallery에서 열린 개인전 《Dawning: dust, seeds, Coplees》(2022)을 포함하여, 베를린의 Projektraum145에서 열린 그룹전 《A Drawing: A Secret》(2021), 시카고의 뉴 웍스 갤러리에서 열린 《High Jump》(2013) 그룹전에 참여하며 국제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Art in America, The Art Newspaper, Artforum과 같은 출판물에 작가에 대한 글이 게재되어 있다. 웹사이트 https://mimipark.net/index.html
2) Louis Bury와 작가와의 인터뷰. https://bombmagazine.org/articles/2024/02/07/studio-visit-mimi-park
(2024년 11월 3일 최초 검색)
4) 위의 글.
미미박, 발광하는 우리, 2024,이풀 클레이, 마이크로 그린 씨앗, 대나무 가지, 발광 다이오드, 전선, 세라믹, 조각용 철사, 셀룰로오스 글리터, 나비 완두콩 꽃잎, 금잔화 꽃잎, 장미 꽃잎, 정류기, 진동 모터, 배터리, 태양 전지, 수집한 먼지, 땜납, 나뭇가지, 돌, 스피커 콘, 앰프, 재활용 종이, 파운드 오브제 가변 크기,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션, 사운드 디자인: 앤서니 셔틀 딘
사진 제공: 광주비엔날레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