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출범한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계 관계자뿐 아니라 많은 관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미술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온전히 즐기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본 연재는 《2024 15회 광주비엔날레》(2024.9.7-12.1)와 관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것이 기획의 의도이다. 따라서 본 지면에서는 ‘광주비엔날레’가 아닌 참여작가들의 ‘개별 작업’을 다루게 될 것이다. 이 글이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보다 가까워지는 경험을 선사하기를 기대한다.
《2024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작품론
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 2024 9.7 – 12
청신하오의 ‘새로운 지도’ 만들기
심하린
“계속 열중해서 걸어라.”1)
1. 들어가며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란 “지속적인 움직임에 의해 단단한 표면에 남은 표시”를 뜻한다는 점에서, ‘걷는 행위’가 정말 가시적인 흔적을 남길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걸음은 너무도 일상적이고 사소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이 단순한 행위조차 사회적·문화적 힘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실천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 1925-1986)는 『일상생활의 실천(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에서 도시 보행자들의 ‘걷기’를 의미화의 실천에 대한 행위로 다루었다.2) 요컨대, 걷는 사람들을 도시의 일상적 실천가들로 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걷기를 언어 행위와 등가적으로 살핀다는 점이다. 세르토에게 있어 걷기는 일종의 발화 행위인데, 그것은 보행자로 인해 공간의 질서가 실체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행자는 기존 질서를 따를 수도, 그것을 변형시킬 수도 있다. 진입 금지 표시가 된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입이 금지된 길이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그 길을 걷는다면 그것은 다른 길이 된다. 이렇듯 보행자가 ‘어디를’, ‘어떤’ 이유로, 그리고 ‘어떻게’ 걷는가는 도시를 뒤틀고 파편화하며, 부동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만든다.3) 그 과정에서 보행의 수행성(performativity)이 형성되며, 도시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생성되는 것’으로 부상한다.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는 일, 그리고 전복하는 행위로서의 걷는 일. 이러한 맥락에서 전술적 걷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도’를 형성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제15회 광주비엔날레 《판소리, 모두의 울림》(2024.09.07. ~ 2024.12.01.)에 참여한 청신하오(Cheng Xinhao, 1985-)의 작업과도 공명한다. 중국 쿤밍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청신하오은 물리적 공간을 직접 걸으며 경험하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 신체와 공간이 관계 맺는 방식을 탐색한다. 이때 그는 단순히 도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걷는 행위를 통해 ‘도로’라는 구조물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며, 시간이 축적되는지를 탐구한다.
2. ‘어디를’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 볼 수 있었던 <지층과 표석>(2023-2024)은 도시 개발이 급속히 진행 중인 작가의 고향 윈난성(云南省)에서 수행한 장거리 도보 프로젝트이다. 청은 버마 공로(滇缅公路, Burma Road), 현재는 중국 서남부의 320번 국도를 따라 900킬로미터 이상 걷는다[도판 1]. 이때 버마 공로는 단순한 교통 경로가 아니라 지정학적,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이 복합적으로 얽힌 역사적 도로이다.
버마 공로는 1938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해상 봉쇄를 우회하고, 연합군의 물자를 중국에 조달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과 영국 정부가 공동으로 건설한 전략적 도로로, 중국 윈난성 쿤밍(昆明)에서 미얀마 양곤(당시에는 버마의 랑군)까지 연결되었다. 오늘날 미얀마에 해당하는 버마는 당시 석탄·탄광·보석 등 중요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이면서 동시에 중국과 근접해있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물자를 보급하는 이 길을 ‘버마 로드’ 또는 장제스를 원조(지원)한다는 의미에서 ‘원장(援蔣) 로드’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이 도로는 그저 전쟁의 산물에 그치지 않는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기에도 이미 역마차와 대상들이 왕래하던 교역로였으며, 19세기 이후에는 아편전쟁과 영국 식민 지배의 영향 아래 국제적 무역로로 활용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 도로는 고속도로 및 철도로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지역 경제와 교류의 중요한 연결점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의 작업은 버마 공로가 단순한 교통 경로가 아니라, 중첩된 시간과 역사가 얽힌 장소임을 재조명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을 경험적, 실천적 장소로 변형하며, 단순히 지도상에 존재하는 길이 아니라 그 길이 품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층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3. ‘어째서’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오늘날 우리가 ‘도로’와 ‘교통’이라고 부르는 사물들은 동질적이지 않으며,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배경에서 특정한 속성, 담론 및 경제적 관계에 통합되어,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지리적 관계, 여행 경험 및 지역적 상상력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는 장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방식을 좋아한다. 마치 탐침(probe)처럼 말이다.'4)라는 그의 말처럼 작가에게 있어 단순히 카메라뿐 아니라 그의 몸 자체도 매체가 된다. 이때 걷기라는 행위는 특정한 감각, 사건과 풍경 간의 연결, 이미지와 역사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작동한다. 그 결과 그의 걸음은 마치 중국과 미얀마 국경을 넘나들며 도로를 생성하고 이동해온 다양한 공동체의 흔적을 따라가듯, 단순한 물리적 움직임을 넘어서 역사적 장소에서의 수행적 개입으로 확장된다.
한편, 이 지역이 보유하고 있는 물리적 특징들은 보행자의 수행성이 실천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작가는 윈난성을 둘러싼 높은 산과 깊은 협곡, 그리고 변화무쌍한 날씨로 인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신체는 마치 윈난의 세계로 '던져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익숙함으로 인해 부드러웠던 세상은 점점 사라지고 딱딱하고 거친 상황에 던져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연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앞으로의 만남은 예측할 수 없으며, 보행자는 더 이상 자신의 계획과 관성으로 주변 환경을 처리할 수 없게 된다. 결국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에 민감하게 조정하거나 앞으로의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용감하게 들어가 끊임없는 변화와 갈등에 표류하고 한계까지 밀려나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이 프로젝트를 실천하던 중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며 걷는 행위를 멈추어야 했다고 한다. 이렇듯 신체적 고통과 한계를 겪으면서도, 그는 재활 이후 다시 버마 로드로 돌아와 비틀거리면서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갔다. 계속해서 앞으로 향하고, 도로의 끝을 향해 움직였다. 이 지속적인 과정에서 청의 신체는 단순한 신체 이상의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 그의 신체는 더 이상 영상 속에서 단순히 등장하는 주체가 아니라, 환경을 반영하고 주변 세계를 감각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도와 흙길, 그리고 국경을 그려내는 하나의 붓질과 다름 없는 것이었다.
4. ‘어떻게’
다음으로 청이 이 길을 어떤 방식으로 걸었는지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에게 있어 고속도로와 기찻길을 따라 걷는 행위는 철도의 본래 기능을 거부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인했다. 고속도로와 철도는 원래 장소 간의 이동을 빠르게 하는 교통수단이지만, 작가는 이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개별적인 요소들을 경험하고, 그 주변 환경을 탐색함으로써 현대적 교통 논리를 해체하길 시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의 몸은 마치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도구처럼 작동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버마 로드는 시간이 중첩된 역사적 장소다. 그러나 차나 기차를 통해 빠르게 이동하는 경험 속에서는 이러한 시간성을 쉽게 인식할 수 없기에 그는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며 그곳의 시간성을 직접 체현한 것이다.
한편 그가 돌멩이를 발로 차며 보행했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여기서 돌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이동성의 물리적 증거가 된다. 돌은 걷는 동안 점점 마모되며 변화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청은 “내가 걷는 길은 이미 존재하는 길이지만, 내가 걷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흔적이 남겨진다”라고 설명하며, 자신의 이동이 단순한 지리적 탐색이 아닌 시간적 개입임을 시사한다. 그 결과 돌을 발로 차며 이동시키는 작가의 행위는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거듭난다. 요컨대 돌과 그의 신체가 일종의 협력 관계를 맺으며, 돌의 변화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재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수행한 것이다.
4. 나가며
2024년 7월 31일, 1년 반에 걸친 부상과 재활, 그리고 건기와 우기가 교차하는 시간을 거친 후, 청은 마침내 버마 국경에 도착했다. 그는 총 41일 동안 걸었으며, 약 1,000km를 완주했다. 그가 발로 차며 이동했던 첫 번째 돌은 여행 이틀째에 우연히 깨졌고, 이후 새롭게 대체한 두 번째 돌은 충격을 거듭하며 점점 작은 자갈로 변했다. 여정이 끝날 무렵, 작가는 그 돌을 국경을 흐르는 강에 던지며 그의 긴 여정을 마무리했다.5)
결론적으로 <지층과 표석> 속, 천천히 돌을 걷어차며 고속도로와 철길을 걸어가는 작가의 행위는 단순한 보행을 넘어, 공간을 변형하고 새로운 흔적을 남기는 실천으로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도시 계획자와 국가가 설정한 ‘전략적 공간’ 안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방식은 제한되지만, 수행성을 지닌 보행자는 자신의 동선을 통해 기존 공간의 규율을 무력화하거나 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걸음은 과거의 흔적을 따라가면서도, 현재의 몸을 통해 공간을 다시 재해석함으로써 마치 지도를 제작하는 행위로 거듭난다.
기존의 지도 제작 방식은 국경, 도로, 철도와 같은 고정된 요소를 중심으로 공간을 정의한다. 그러나 청의 작업에서 지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위에 의해 변화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단순히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발생하는 감각적 경험과 물리적 변화를 통해 공간을 실천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집중한다. 따라서 그가 버마 로드를 따라 걸으며 차고 간 돌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도를 형성하며, 이는 그의 몸과 행위를 통해 만들어낸 ‘지층’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공간을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 아닌, 신체적 경험과 시간적 축적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심하린 (1995- )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학과를 수료하였으며, 현재 대전에 위치한 헤레디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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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인용구는 일본 최초의 즉흥 연주 그룹 온가쿠를 공동 창립하고, 1960년대 초에는 플럭서스 그룹과 함께 활동했던 사운드 아티스트 다케히사 고수기(Takehisa Kosugi, 1938-2018)의 악보에서 따온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책 참조. Waxman, Lori. Keep Walking Intently : the Ambulatory Art of the Surrealists, the Situationist International, and Fluxus. Berlin: Sternberg Press, 2017.
2) 백영주, 「‘걷기’의 의미 양상과 예술적 실천 - 미셸 드 세르토의 ‘공간 실천’과 도시 개념을 중심으로」, 『인문콘텐츠』 46 (2017): 81-108.
4) 본 글에 나오는 <지층과 표석> 작업 관련 모든 작가의 인용구는 다음 글 참조. https://mp.weixin.qq.com/s/-JhpefrfJy33Y1vj32u0bw (2025년 2월 14일 검색).

청신하오, 〈지층과 표석〉, 2023-2024,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71분 58초, 스틸 이미지.
'미술사와 비평'은 미술사와 비평을 매개하는 여성 연구자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