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희
소설가가 단편소설을 쓰고, 중편소설을 쓰고, 장편소설을 쓰듯이 화가 역시 작품의 규격과 전시의 사이클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작품의 밀도와 변화, 그것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두고 고심하다가 모종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리자면 “만들려는 요리에 비해 냄비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요리의 가짓수를 줄일 것이냐, 그것을 담는 그릇을 늘릴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종종걸음 치는 화가를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재현에 관한 화가들의 고민은 세인의 인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치열하다. 점 하나만으로, 텅 비어 있는 여백만으로 우리를 명상으로 침잠시키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보는 이의 사고체계를 혼돈으로 이끄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이도 있다. 예술이라는 건 너무도 잔혹해서 점 하나를 찍기 위한 고통이 혼돈으로 가득 찬 화면을 채우는 것보다 더 클 때도 많다. 화가 윤정선이 재현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도 그러하다. 일상과 주변의 풍경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낸 듯한 그의 그림은 일견 온순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시를 읽는 독자가 의미를 해독하기보다 그에게 외적으로 주어지는 물질성, 즉 텍스트를 이루는 말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인다는 어느 철학자의 지적을 떠올리게 한다. 윤정선의 그림을 이루는 물질성은 파스텔 색채와 모노톤으로 담백하게 서술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것을 해독하다 보면 느림과 텅 비어 있음을 묵상하게 된다. 채움과 비움이 적절한 간격을 유지한 ‘윤정선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특정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게 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그 알 수 없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어떤’ 풍경을 거닐다 보면 존재의 뿌리에 얽혀 있는, 그러나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던 감각의 근원에 다다르게 된다. 온순해 보이는 그의 그림은 이렇듯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서 윤정선은 서울의 한 구석에 실재하는 풍경을 캔버스에 새겨 나갔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을 감싸준, 혹은 옭아맨 베이징이 아닌 서울의 풍경을, 마치 거울 앞에 돌아선 누이가 되어 마음에 품었다. 자신의 유년 시절의 체취를 간직한 집과 주변, 그리고 존재의 심연에 가 닿는 작업실로 이어지는 윤정선의 여정은 서양의 풍경과 동양의 풍경을 지나 어느덧 자신만의 풍경을 찾은 화가의 성숙을 느끼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작가가 스스로 선택한 10여 년간의 젊은 날의 유목 생활의 종착점이 거의 다다랐음을 예고하는 건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흐르는 강물처럼 고요히 움직였던 화가 윤정선은 ‘기억 속의 풍경’이라는 자신만의 풍경을 간취한 채 그 여행을 서서히 마무리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관점은 그녀의 그림이 ‘젊은 작가’라는 도큐먼트 혹은 카테고리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담백하게 서술한 화면 처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그간의 그림이 일인칭 시점으로 자신이 속한 풍경을 응시하는 데 주력했다면, 특정 대상이나 배경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이번 그림은 화가의 마음과 관객의 마음이 동시에 겹쳐지는 삼인칭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이전보다 한결 미니멀해지고 모던해진 풍경은 윤정선의 풍경이 일인칭 시점으로 화가에게 귀의하지 않고, 보는 이와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복합적인 풍경으로 화(化)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공간의 경계를 감춘, 그리하여 비어 있는 풍경은 화가의 내면은 물론 자신이 기억하는 풍경을 돌아보고자 하는 관객의 노스탤지어를 담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윤정선이 기억 속의 풍경을 그리는 자로서가 아닌, 풍경과 존재를 사유하는 화가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증거로 작용한다.
풍경에 관한 사유. 메를로-퐁티의 회화론을 들추지 않더라도 인간이 무언가를 사유한다는 것은 ‘있음’으로 총칭되는 존재를 향한 고민이다. 사유에 앞서 존재를, 그 존재가 머무는 현장으로, 감각의 세계로, 일상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노력이기도 하다. 지난 10여 년간 풍경을 둘러싼 윤정선의 고민도 결국 화가의 몸과 세계가 만나는 접점을 찾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런던과 서울, 베이징으로 압축되는, 저마다 독특한 장소성을 지닌 공간에서 윤정선은 화가의 몸이 깨어날 때 그를 감싼 풍경이 꿈틀거리고, 그곳을 함께 공유하는 타자들과 호흡할 수 있음을 터득했을 것이다. 몸으로 체득한 이 경험을 통해 윤정선의 그림은 단순히 풍경을 기억하고 사유한 가공된 풍경에서 살아 있는 풍경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작가는 항상, 자신을 둘러싼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윤정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십 대를 온전히 마감하는 시점과 궤를 같이 하는 이번 전시는 한 시기를 마무리하는 결산서로 자리 잡을 듯하다. 지금까지의 작업이 ‘그림’이라는 것과 ‘풍경의 낯선 재현’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고민한 것이었다면, 그리하여 그 고요한 풍경 속에서 산책자로 지내며 자신을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을 조심스레 묶어둔 것이었다면 이제는 ‘다른’ 생각을 담을 때임을 선포하는 시간일 것이다. 윤정선은 지금보다 더욱 그림에 마음을 다할 것이며, 그 속도와 깊이도 이제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좀 더 빠르게 달릴 것이며, 좀 더 깊숙이 천착할 것이다.
예술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실해버린 지 오래다. 그곳이 어디든지 이 허무한 상황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은 특정한 무언가가 시대를 이끌고 가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난 테이트 트리엔날레에서 니콜라 부리요는 모더니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닌 ‘얼터 모던(alter modern)'이라는 대안적인 중립 지대를 제안했던 것이며, 프랑수아 줄리앙은 모든 가능한 것들의 출발점이자 그것들을 소통케 하는 ‘담(淡)’이라는 화두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이들의 말처럼 지금 세상은, 그리고 미술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서로 다른 맛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닌, 가장 음미하기 어려운, 그러나 무한히 음미되는 무미(無味)의 시대로 접어든 건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윤정선이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 아토폰(atopon)이라 명명한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한 건 참으로 적절해 보인다. 운동과 정지 사이의 기묘한 그 무엇, 혹은 장소를 갖지 않는 그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토폰은 두드러진 특성이 없으며, 은미(隱微)하고 절제된 것이다. 범인의 눈으로는 감별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전체로서의 풍경에 매몰되지 않고 순간의 이면에 내재하는 기억 속 풍경을 그리기로 한 예술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순간을 기록하되 그 순간이 점멸하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기억하는 것. 순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 윤정선은 순간이 있기에 세상이 출발점을 갖게 되고, 운동성을 갖게 되고,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예술가이다. 이제 그는 무색 무취한 존재가 되어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금, 윤정선은 조금 더 멀리 나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