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모더니즘 서사는 회화를 회화답게 해주는 조건을 평면성과 회화 또는 화면의 내재율에서 찾는다. 그 조건이 회화적 화면의 외부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내부에 잠재돼 있다는 것이다. 즉 재현과 서사, 그리고 내용이나 메시지보다는 조형적인 요소나 그 성질에 있다고 본 것이다. 흔히 모더니즘 서사를 형식주의와 동일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형식주의 태도에 의해 지지되는 회화적 표현이 추상미술이다.
이나경의 회화는 재현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란 점에서, 그리고 평면성과 화면의 내재적 원리가 동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모더니즘 서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양 보인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모더니즘적이지는 않은데, 추상적이고 형식적이고 내재적인 원리를 견지하면서도 이를 여타의 외재적인 원리와 중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경험이나 무의식에 각인된 존재론적 원형, 그리고 전통적인 이미지 등 재현과 서사적 요소가 그 이면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와 모더니즘 서사의 관계는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이며, 모더니즘의 원리를 더 유연하게 재해석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차이(모더니즘 서사와의 차이)가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원리를 숙주 삼아 이를 자기화하며, 그러면서도 그 원리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형식을 찾는다. 말하자면 모더니즘과의 관계로 볼 때 일종의 연접의 원리, 상동성과 상이성의 원리, 유사성과 차이의 원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나경의 화면은 평면적이다. 엄밀하게는 색면화로서, 그 색면이 격자구조 등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는가 하면, 이질적인 색면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일종의 색면구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뉴욕의 색면화파와 상호영향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데, 작가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 견고한 구조를 흔듦으로써 화면을 더 유기적으로 만든다. 아마도 철저한 모더니스트가 되기에는 그 논리적 엄밀성이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여하튼 이로 인해 형식적이면서도 서정적인 특유의 화면이 연출된다.
이처럼 덜 논리적이면서도 더 유기적인 화면을 위해 도입된 소재가 목탄 드로잉이다. 주지하다시피 드로잉은 즉흥성과 우연성을 표출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로 인해 작가의 그림은 논리적인 화면에 틈을 내고 사이를 만듦으로써 화면을 더 유기적이게 해준다. 말하자면 화면에 일종의 숨통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목탄 드로잉은 화면에 거뭇거뭇한 비정형의 자국을 만들어 일정한 음영을 만들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성적인(정태적인) 평면에 어떤 표정을 부가하기도 한다.
처음에 작가는 목탄 드로잉으로 건축적이고 구조적인 형태를 부가해서 배경화면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어우러지게 했다. 이것이 이후에는 모과나 근작의 가부좌 자세의 부처의 발 등 상대적으로 더 유기적이고 비정형의 형태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목탄 드로잉은 말할 것도 없이 소재 특정적인데, 그 자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의해 견인된 평면과 비교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작가의 사사로운 경험에 기인하는 재현적이고 서사적인 요소를 도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작가의 집이 갖는 구조적 특질이나 정원에서의 계절의 변화, 그리고 여행에서의 인상이 소재로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흔히 인상이나 기억이 그렇듯이 흡사 베일을 통해 보듯 최소한의 암시적인 형태로 드러나며, 그마저도 회화적 화면 속에 종속되고 해체된 형태로 드러난다.
이로써 화면에는 회화적인 평면과 재현적인 요소가, 형식주의 원리와 서사적인 성질이 날실과 씨실처럼 긴밀하게 짜이게 된다. 아마도 이처럼 상호 이질적인 성질이나 요소들이 어우러져 고유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지점이야말로 이나경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아닐까 싶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의 작업은 모더니즘적이면서 모더니즘적이지 않다. 모더니즘의 형식원리를 견지하면서도 이로부터 일정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차이와 간극, 그리고 이로부터 유발되는 긴장감이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축이 되고 있다. 이는 평면적이면서 평면적이지 않은(입체적인),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화면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를 위해 일종의 판법을 도입해서, 이를 회화적 평면과 중첩시키고 있다. 먼저 특정의 색채를 바탕화면에 칠한 연후에, 일상으로부터 채집한 각종 오브제를 이용하는데, 이때 대체로 바탕색과 보색관계에 있는 색으로 그 단면을 찍어 중첩시킨다. 여기서 그 눌린 부위가 선으로 나타나고, 선과 선 사이에 바탕색이 드러나게 한다. 이러한 단면 찍기를 반복․중첩시킴으로써 흡사 여러 겹의 망이나 그물구조를 연상케 하는 중층화된 화면이 조성된다. 그리고 그 위에다 재차 바탕화면과 같은 색채로 색면을 그려 넣거나 기하학적 패턴의 문양을 중첩시킨다.
판화와 회화, 즉 찍힌 이미지와 그려진 이미지를 아우르고 있는 화면에는 물감이 반복적으로 찍힘으로써 그 표면에 미세 요철이 만져질 듯한(시각적이면서 동시에 촉각적인) 마티에르와 물성이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판법에 의한 이미지는 그 선명한 가장자리 선으로 인해 마치 기하학적 도형이 화면에 부유하는 것 같은(붓으로 그려진 이미지가 화면에 스며들고 동화되는 것과 비교되는) 느낌을 준다. 마치 이미지를 일종의 의사오브제로 전이시켜놓은 것 같은 인상이다.
더불어 이런 기하학적 도형이 반복․중첩되면서 일종의 연이어진 고리들의 연쇄가 만들어지고, 그 연쇄가 중첩돼 겹겹의 레이어가 조성된다. 그 망구조는 일종의 내진감, 즉 화면 배후로 공간이 열리는 깊이감이 생겨나게끔 한다. 이는 재현적인 회화에서의 원근법을 추상화에 바탕을 둔 작가 나름의 방법론을 통해 재해석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런 내진감이나 공간감은 물론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을 탈피해 이를 더 유기적으로 해석하려는 작가의 기획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망구조는 옵아트까지는 아니더라도, 화면이 미세하게 움직이거나 일렁이는 것 같은 동적 울림을 부여해서 정태적인 화면에 역동성을 더한다. 더불어 반복․중첩된 패턴들은 일정한 리듬․내재율․운율을 떠올리게 한다. 이로써 이나경의 그림은 시각과 촉각(표면 요철이 만져지는), 그리고 청각(리듬이 암시되는)이 어우러진 일종의 공감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의 작업에서 작가는 판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는데, 종이를 이용한 지판과 공판법을 채택하고 있다. 「종이꽃이 있는 풍경」이란 제목하에 제작된 일련의 작품들에서 작가는 종이를 여러 겹으로 접어 오린 후, 이를 다시 펴는 방법으로써 동일한 문양이 반복적으로 병렬되고 패턴화된 문양을 획득한다. 흡사 페이퍼콜라주를 연상시키는(사실은 종이를 화면에 대고 그려낸) 이들 문양은 대체로 꽃문양이 추상화되고 양식화된 형태를 띤다.
이를테면 산수유를 소재로 한 경우에서, 그 꽃잎들이 꽃잎 그 자체보다는 꽃잎의 결정체적 이미지를 패턴화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게다가 바탕화면과 대비되는 노란 색면으로써 산수유 꽃의 특징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에게서 특정의 소재는 그 자체 재현적인 대상이기보다는 일종의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대상성(이를테면 봄의 기운과 함께 이를 대면하는 작가의 환희를 추상화한)을 갖는 것이다. 더불어 그 자체가 화면의 유기적인 질서에 종속되고 어우러지는 회화적이고 조형적인 요소로써 기능한다.
한편, 종이접기는 이나경의 작업에서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종이는 평면이지만, 그 종이를 접으면 입체가 되고, 다시 펴면 평면이 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 역시 평면(바탕화면)과 입체(중첩된 망구조로 드러난), 그리고 다시 평면(종이의 패턴문양)이 하나의 결로써 중층화되어 있다. 평면과 평면 사이에 망구조가 조성돼 있는가 하면, 평면과 입체가 그 경계를 허물면서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모더니즘 서사의 핵심개념인 평면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탈피하고 있다. 이렇듯 작가는 평면의 개념을 다중적이고 복합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나경의 작업에서는 전통적인 이미지에 대한 공감이 감지된다. 종이꽃도 그렇거니와, 깊이감이 느껴지는 간색과 부분적으로 차용된 원색과의 대비, 그리고 망구조(예컨대 발이나 창호지문 같은)를 통해 그 이면의 사물을 보는 듯한 중첩된 화면 등이 그러하다. 여기에는 부채나 꽃 등 익히 알려진 사물들이 없지 않지만, 그 자체가 두드러져 보이기보다는 화면의 추상적인 질서 속에 해체되고 스며들어 일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그 이미지들은 작가의 내면에 자리한 무의식을, 그리고 이보다 더 아득한 원형의식을 떠올려준다.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