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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속에 농축된 영원
이선영 | 미술평론가
색다른 경험을 부여하는 거대한 무대장치를 연출하곤 하는 권대훈은 이번 전시에서 작은 공간에 대자연을 끌어들인다. 여기에서 관객은 비 내리는 숲을 지나, 물고기가 헤엄치는 호수를 만나게 된다. 단지 재현된 것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다. 이미 완성된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작품과 함께 감흥을 생성한다. 난데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짧지만 짧지 않게 느껴질 통과의 끝에서 어떤 문턱(threshold)을 넘으면 물속을 헤엄치는지 하늘을 나는지 모호한 <Flying Fish>를 만나게 된다. 물고기는 물살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는 바탕에서 들락 달락 하는 환영을 보여준다. 쏟아져 내리는 비나 하늘이 비치는 호수같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축약된 방식으로 담아내는 절묘한 장치들은 재현(representation) 아닌 제시(presentation)의 기술이다. 그가 고안한 물리적 장치는 하늘과 물을 절묘하게 만나게 하는 접면이다. 이 인터페이스는 친숙한 일상으로부터 또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대가 되어주며,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통로이다. 그것은 순간을 영원으로 고양시키고, 영원을 순간 속에 압축한다.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의 실험 대상이었던 빛과 그림자는 그의 여러 작품에서 돌연한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을 이끌어왔다. 그의 작품은 단지 어두운 숲에서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선적인 여정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순환적 세계는 동양 사상에서 친숙하며, 이분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복 자 니체의 ‘이미 무한히 그 자신을 반복하고 유희하는 순환적 운동으로서의 세계’관에서도 발견된다. 순환은 미로 속에서의 방황을 의미하기도 하고 무한한 반복 속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순간과 영원이 만나는 곳(때)에서 어떤 깨달음을 주는 현현의 사건이 일어난다. 한낮에 일어나는 신비스러운 직관이 드러나 있는 권대훈의 작품은 귄터 볼파르트는 <놀이하는 아이, 예술의 신 니체>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부분인 ‘정오’에 나타난 미학적 순간과 유사하다. 그 순간은 세계가 그 속에서 완전함을 성취하는 ‘갑작스러운 영원성’의 신성한 순간, 시간이 스스로를 완성하는 영원한 행복과 즐거움의 이 순간은 종교적 깨달음의, 계몽의 순간이다. 신성한 깨달음은 이 세계에 있는 빛과 자유의 순간적인 반짝임이다.
‘가장 강력한 사상’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가장 밝은 빛으로 바뀐’,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인 정오의 시간에 다시 발생한다. 한 낮에 경험되는 신비, 이 충만한 시간이 영원으로서의 순간에 미적 투명성과 종교적 초월성, 세계로의 복귀와 저 너머 세계로의 초월이 일어난다. 이때 세계 자체는 예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가 ‘가장 짧은 그림자’라는 용어로 정식화한 ‘한낮’은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천정’이다.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란 사물자체를 말한다. ‘시간이 없는 순간’을 보여주는 권대훈의 둥근 호수가 바로 ‘시간 안의 구멍’이며 ‘영원의 우물’이다. 하나는 과거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미래로 이어지는 두 길이 영원회귀의 순간에서 충돌하듯이 만난다. 니체에게 예술가의 면모를 띄는 창조적 인물 초인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고 불리는 계기에서 일치하는 이 ‘영원의 우물’에 빛을 비추는 눈을 가진 자이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권대훈의 작품에는 일광(daylight)의 신비주의가 있다. 깨달음을 주는 이 신비는 창조와 발견이라는 사뭇 반대되어 보이는 두 방식을 모순 없이 결합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