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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갑:숨-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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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두번째 이야기>, 증발하는 시뮬라크르 풍경
-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 II

주성열 | 예술철학/미술비평, 세종대 겸임교수


들숨 - 가라앉는 이미지

세상의 끝을 가정하는 사람이 매 순간을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어떤 곤궁한 생활도 그 끝은 순결하고 숭고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적막한 심정이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기에 그러므로 남아있는 삶에 의지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세상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게 남으려는 의지를 표현해 낼 것이라 믿어진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숨’이라 명명하게 된 이운갑의 작업이 또 다른 ‘호흡’을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 ‘숨’ 전시에서의 바닷가재나 땅강아지의 은유적 변신이 작가 내면의 정체성이자 생명이 지닌 숭고함에 대한 고찰이었다면, 두 번째 숨고르기인 이번 전시는 현재의 삶을 반영함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구성된다. 전자에서 일탈을 성취한 인물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처절한 고독과 상처를 이해하고자 했다면, 이번에는 그간 아픔을 밀어내는 심정으로 멀리하던 풍경을 명상적으로 보여주면서 삶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닷가재의 욕망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했던 이운갑은 이제 특별한 감성을 통해 의식과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최근의 작품들은 주체와 대상이 불명확하므로 지시와 환원이 어려운 환상성을 확보한다. 다소 심심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거나 너무 익숙해서 상념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일 테지만 낯선 조합에서 오는 생경함마저 평이한 느낌으로 편입해버려 의도가 불분명해질 우려가 없지 않다. 사실 세상을 이끄는 진리나 지혜로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거나 매우 익숙한 것에서 출발하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이 당연한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곤혹이 따르는 것처럼 일련의 인식 과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처럼 이운갑의 작업은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풍경을 주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까운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풍경을 맨 먼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가 선택한 사소한 소재들은 선입견적 판단으로는 평범해 보이다가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확대되면서, 그것이 곧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태도임을 이해시키려고 감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말처럼.

리듬감 있는 깊은 호흡은 우리의 정신 상태를 어김없이 반영한다. 이운갑은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호흡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감성을 재분배하고 이중으로 분할하여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낸다. 이중의 풍경을 통해 자아 위에 또 다른 자아를 반영하는 이것은 진실을 말하기 위한 가장 소극적인 방법일 것이지만, 그림으로 깊은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의 여정은 이어질 것이므로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정화된 풍경은 실재의 삶과 마음속의 삶이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된 풍경이므로 상하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다. 생명을 유지하는 리듬 그 자체인 ‘숨’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매 순간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이운갑의 풍경 또한 바라보고 있다는 의식의 끈을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감각적인 대상과 관념적인 대상과의 연결에서 오는 낯선 풍경인 탈(脫)이미지, 초(超)이미지가 데페이즈망의 어긋난 형식과 닮아 있는 그의 그림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날숨과 들숨 - 몽상적인 시뮬라크르 이미지

붓끝에서 태어난 풍경이 자신이 헤치고 나온 가시밭길처럼 슬픔과 위로가 깃든 경건한 분위기이기를 바라고 있다. 적막함은 모든 인간이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초라함일 테지만, 자연의 황폐함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어두운 과거와 하얀 미래가 함께 내장 된 곳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분노를 포함하고 있음이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화면은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규칙적이고도 촘촘한 들숨과 날숨으로 직조되어 있다. 들숨의 현실적인 재현과 날숨의 내재적인 풍경은 호흡을 통해 현재의 순간을 몽상적인 풍경으로 만드는 근원이다. 그에게 풍경은 이처럼 과거도 미래도 아닌  환영적 호흡을 통해 현실과 교감하면서 시작되는데, 세포 내에서도 호흡이 이뤄지는 것처럼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감각을 통한 간접적 인식이자 영적인 리듬과 울림의 반영이다. 발음은 구강에서 만드는 외재적인 표현수단이고, 소리는 단전을 돌아 나오는 내재적인 것이다. ‘마음의 자리, 견성의 자리는 단전에 있다’는 달마대사의 말처럼 소리는 호흡을 따라 깊은 곳에 도달하여 나오는 것이다. 갓 태어나는 아기가 배로 호흡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호흡을 통해 몸이 열려 악기가 되고 그 열린 공간에 울림이 만들어지는 이치이다. 이운갑의 그림은 이러한 호흡의 원리와 유사성을 지닌다. 때문에 외적 호흡이 반영된 그림은 새롭고 깊은 들숨으로 인해 몽롱해질 운명에 처하기도 한다.  
  
작가는 습성적으로 황량하고 허망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둔다. 반영된 이미지는 바로 서기도 거꾸로 서기도 하는 위반으로 의도적인 불편함을 만들고, 그리고는 서서히 증발한다.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희미한 효과와 상호충돌로 빚어지는 ‘낯설게 하기’는 비밀을 반 정도만 드러내는 다중성을 추구한다. 메마른 풍경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은 미지의 시공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느낌으로 읽혀지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냉동고에서 말라가는 것처럼 차갑게 와 닿는 것은 자연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눈을 감고 만나게 되는 자아의 일부는 타자화를 거부한다. 탈색으로 실재가 결여되고, 메아리에 묻어 되돌아오는 그리움처럼 안타까움과 서러움이 보편적 고뇌로 다가온다. 경험의 재구성이자 기호로서의 풍경은 이처럼 실재와는 유사성이 없는 시뮬라르크로서 성장과 쇠락의 교체가 연이어 이뤄진다. 

반영이 적용된 공간은 신비로운 주술과 생명의 희망을 담은 가상의 환영적 공간으로 전환되어 은밀히 부활을 꿈꾸거나 희망의 서정을 드러내고 시적 상태의 재현을 도모하게 한다. 신경정신의학에서는 의식적으로 트랜스(환각) 상태에 들어가면 엔터옵티크(enteroptic)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작가 또한 특별한 경우를 통해 이러한 시각적 환각을 체험했을 수도 있다. 우연한 만남에서 자신의 정서와 결합하는 요소를 인지하고 대상과의 결합이 지각의 복합체가 되어 물적 이미지 생산을 도왔을 것이다. 관찰자로서 그리고 조작하는 사람으로서의 이중적 의미는 예술가 본연의 자세이다.  

이운갑 풍경에서의 전체적인 느낌은 중얼거림이다. 주체와 대상이 숨겨져 있거나 사라지고 없는 화면에서는 들뢰즈의 ‘익명적 중얼거림’처럼 사소한 중얼거림이 두런두런 들려온다. 나를 이송하던 나룻배도 자동차도 멈춰있는 풍경에는 비밀스러운 상처를 간직한 듯 ‘있었던 세계’와 ‘있는 세계’가 함께 소통한다. 미켈란젤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같은 시간이라도 어떤 때는 기꺼이 환각에 눈이 멀 수 있고,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을 관조하게 될 수도 있다’고 증언한다. 이운갑 또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요인들에 의해 수시로 달라지는 가변적 지각이미지를 자신의 조형언어로 활용한다. 배경은 혼미하기는 하지만 허약하다기보다는, 말할 수 없음에 침묵하면서 아직 발을 사다리에서 떼지 못한 채 망설이는 주체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충실해 보인다. 배를 타거나 사다리를 오른다고 해서 끝이 나는 건 아니다. 배에서 내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이동이 완성된다. 


날숨 - 증발하는 이미지

이운갑의 풍경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신비함이 있다. 두 세상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 하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풍요하게 만들고 삶을 통해 죽음을 긍정하게 만드는 모순 또한 존재한다. 죽음은 삶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포용한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어 오히려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어떤 상황을 관찰한다는 것에는 그 일을 통한 변화의 조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림의 객관성 또한 어떤 상황의 관찰에 의한 결과인데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처럼 감추면서 드러내는 방식에는 여전히 어떤 상황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한 심려가 느껴진다. 녹슨 펌프는 폐기될 수밖에 없음에도 잃어버린 현실의 부재에 끊임없이 반응하는 태도는 앞의 일이 뒤의 일보다 덜 아프다는 전제와 연관이 있다. 묘사에 치중하는 것과 사실을 묘사하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겪는 작가의 체험이 진정임을 알고도 감상자는 작가 자신처럼 불안하다. 

친화력을 가지고 엄숙한 성찰을 기본으로 하는 삶의 태도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더 견디지 못하는 성격에서 잘 드러난다. 작가의 섬세함은 갇혀 있는 기적을 사물 속에서 열어내는 무기이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삶의 쓰라린 정경 앞에서 좌절을 겪을 때마다 예술에 대한 생생한 그리움이 그를 엄습했다는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정신이 메마를 때는 아무 말이나 써놓고 곧장 앞으로 나가라!’고 독려한다. 이제야 비로소 슬픔의 시간이 사라지고 멈추지 않은 열정과 깨어있는 정신으로 진정한 자신의 힘이 내장된 곳을 향하는 그에게 비현실적 이미지는 의미이며, 형식이 곧 내용이 된다. 

미세한 조짐을 반복해서 바라보다 보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예전보다는 좀 더 현실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구체성을 검토 중인 그를 파악할 수 있다. 모파상(G. de Maupassant)은 “표현하고 싶은 것이면 어느 것이건 충분히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여 살핌으로써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도 말한 적도 없는 어떤 모습을 거기서 발견해 내는 것이다”라는 말로 누적된 인식의 진전을 확신하고 있다. 다만 풍선을 가득 채운 것이 바람이 아닐까 하는 우려는 형식화되지 않는 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무의식적 표현에 대한 불안정 때문이다. 의식을 뒤로 두고 상투적인 풍경을 앞세우는데, 언급했던 대로 이러한 형식은 지향했던 바를 이루거나 관객을 그림 앞으로 이끌기에는 다소 힘이 부족해 보인다. 이들을 특별한 회화적 이미지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작가 특유의 깊고 긴 호흡을 한 단계 더 거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미세한 감성의 자아가 빠져나간 풍경은 서정적이지만 상투적이며, 자유롭지만 모호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작가의 모습은 사라진 곳 멀리에서 간혹 비춰진다. 당도 높은 과일이 벌레에 갉아 먹혀 상처가 나고 썩게 되는 법이다. 삶은 안에서 들여다보고 외부세계로 적극 표출되어야 하며, 품고 있으면 안 되는 달콤해진 독들은 토해내야 한다. 일전에 예술 작품의 이미지가 허구의 세계이지 세상을 바꾸는 실천적인 힘이 아니라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는데 그렇다고 세상을 반영하지도 제시할 수도 없는 무기력의 세계라는 말은 아니다. 감각의 상실은 의식이 낮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쇠락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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