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희
“제약이 많을수록 영혼을 옭아매는 족쇄로부터 더 많이 해방된다. 임의성이 허용되는 경우에는 연주의 정밀도가 높아질 뿐이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우리는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 즉 자신이 영원한 존재라고 믿던 때를 모두 잊은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
나르시스와 피그말리온
장 콕토의 <시인의 피>(1930년 작)는 예술가의 창작의 고통(쾌락)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 차 있는 초현실주의적 영화이다. 피그말리온(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만든 갈라테아(여자 조각)에게 숨결을 불어넣어 생명을 부여한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이 벽으로만 둘러싸인 문이 없는 방에 갇혔음을 알게 되고, 출구가 오로지 벽에 걸린 ‘거울’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 난감해 한다. 그리고 조각-여자는 “출구는 그것밖에 없어요. 거울 속에 들어가서 돌아다녀 보세요”라고 말하며 ‘축하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남자가 화가 난듯 난감해하자 조각-여자는 다시 “당신은 거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썼었죠. 그러곤 믿지 않았어요!”라고 남자를 종용하며 빨리 거울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말한다. 남자는 다소 두려운 맘으로 이리저리 거울을 들여다보고 조심스레 만져보다가 거울과 정확하게 대면하자, 그 거울은 깊은 물이 되고 남자는 거기에 풍덩 빠져버린다. 그리곤 하염없이 블랙홀 같은 미궁으로 추락한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토끼를 따라 토끼구멍으로 빠져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듯이 말이다. 블랙홀 같은 공간은 마치 하나의 자궁이며 또 다른 생명체를 잉태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어쨌든 영화 속 남자는 신화 속 나르시스와 피그말리온보다 훨씬 더 용감했다. 그는 자신 혹은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세계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나는 제유성을 만나고 온 후, 언젠가 아주 인상적으로 각인되었던 장 콕토의 이 장면들을 떠올렸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을 두고 다른 출구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그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못할뿐더러) 오로지 예술이라는 거울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한다. 종종 서양미술의 역사에서 최초의 회화를 나르시스가 끌어안으려 했던, 자기 자신이 투영된 거울이미지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거울은 나이고, 그 이미지가 곧 최초의 그림이다?! 간단해 보이는 이 공식 속에는 시각에술에 대한 대단한 상징과 알레고리가 담겨있다. 핵심적인 내용은, 나르시스가 강물에 비친 미소년이 자신인 줄 알았건 몰랐건, 거울 속에 투영된 대상이 아주 아름다웠다는 것이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시간도 잊고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에는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 혹은 자신이 만든 이미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오토에로티시즘(auto eroticism)’이라고 부르는데, 이 원론적인 시각은 현대를 사는 예술가들에게도 여전히 자명한 진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두 스스로가 만든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나르시스이자 피그말리온이라는 의미다. 제유성 역시 예술 속에서만큼은 영락없이 신화 속 인물들과 존재론적으로 닮아있다.
몰입과 생존
<역경 易經>에 보면, ‘한계’라는 말은 대나무의 마디로, 삶과 예술에 형태를 부여하는 계기로 표현된다. 고래로 삶과 예술은 어떤 한계와 장애물 없이는 한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은 제약과 한계가 많을수록 훨씬 더 집중과 몰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진화시켜왔던 것이다. 예술가 또한 신체의 한계, 인종의 한계, 성의 한계, 관습의 한계, 스스로 만들어낸 형태의 한계 등 수많은 한계들을 만난다. 사실 조형예술 역시 몇몇 제한된 규칙, 예컨대 회화가 평면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그 한계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풍성하고 생동감 있는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제유성 역시 예술가로서의 수없는 한계와 지난한 개인사 속에서도 오로지 예술에 대한 의지를 단 한번도 포기한 적이 없는 작가다. 그는 어쩌면 예술과 가정을 동시에 택한 것에 대한 죄의식(미켈란젤로 같은 미술사의 대가들은 자신들이 독신이었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죄의식 없이 오로지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는데, 대신 예술이라는 마누라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탓인지 두 가지 모두 소홀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예술에 대한 집중과 몰입은 마치 ‘더 아픈 손가락’의 비유처럼 더욱 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유성의 작업이 일탈이나 욕망이 아닌, 투쟁과 생존에 가까워 보이는 것도 바로 삶과 예술이 지속적으로 서로를 배척하는 동시에 서로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작가에게 예술작업은 단순히 현실을 잊게 하고, 고통을 순화하는 도피처라기보다는, 미학적 쾌의 장소이자 일상을 축제로 치환하는 카니발(carnival)이자 의식(ritual)에 가깝다.
제유성의 근자의 작품들에서는 장난감의 세계, 중첩되는 공간, 화려한 색채, 유기적 형태 등이 주요 모티프로 드러난다. 이런 모티프들은 원초적이며 솔직한 내면의 다양하고 풍부한 감성을 반영한다. 먼저 형태면에서 레고블럭같은 온갖 다양한 도형들, 성전, 문 그리고 하트와 깔때기, 꽃과 아메바 같은 유기체의 형상들이 섞여있다. 먼저 전체적인 색채와 형상을 보자. 그의 작품은 일견 현란한 색채와 복잡한 오브제들의 퍼즐게임 같아 보인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형상들은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한 것도, 그렇다고 전혀 이질적인 형상도 아닌, 형상과 비형상, 현재와 미래, 현실과 상상이 혼재하며 경계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이미지들은 작가가 미리 어떤 대상을 고려해 만든 이미지들이 아니다. 하나의 모티프는 다른 모티프를 생성시키고, 그 모티프는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또 다른 무수한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사실, 제유성은 현실 속 사물의 외관을 재현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작품이 추상인 동시에 반추상이고, 반추상인 동시에 반구상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근자에 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전의 기하학적 형상에서 유기적 형상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작가가 만들어내는 중첩된 공간성은 단순한 집적(accumulation)이 아닌, 다차원적 공간감각이 녹아든 하나의 가상세계를 연상시킨다. 작가가 공간을 중첩시키는 것은 시간을 무한히 확장하고 축소하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렇게 드러난 수많은 중첩된 레이어들은 세계에 대한 작가자신의 무한히 열린 감수성을 암시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레이어 만큼 깊고 넓은 품을 가진 존재론적 자아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보여줄게 많고,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중첩된 공간은 작가의 넉넉한 품이며, 그 품은 또한 눈물인 동시에 사랑이며, 열정인 동시에 수난의 메타포가 되는 것이다.
제유성의 이런 형상들은 색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들러붙어’ 있다. 색채가 풍부해질수록 형태 또한 견고해지고, 색채가 굳건해질수록 형태는 유연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사용하는 색채와 형태는 서로가 서로를 강렬하게 원하기 때문에 어떤 필연적인 단단하고 견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화면에서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동시에 역동적인 리듬감은 미스테리의 세계로의 여행을 훨씬 더 감칠맛 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되기’, 창조적 퇴행
제유성의 색채감각과 공간감각은 온전히 아이와 같은 마음 상태가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로 천연덕스럽다. 특히 한국, 여자, 중년이 사용하는 조형감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젊고 신선하기까지 했다. 극단적인 경험을 오가는 삶 속에서도 어쩌면 저렇게도 유치할 정도로 장난스러운 형태와 화사한 원색의 색채들이 춤추는 화면을 구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제유성이 천진난만할 정도로 자기 세계에 몰입되어 어린아이처럼 그 세계를 주무르며 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행위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되기(devenir)\' 개념을 환기한다. 예컨대 음악의 경우, 카스트라토와 카운트테너는 각각 다른 ’되기‘의 실례들이다. 카스트라토는 ’여성-되기‘, 카운트 테너는 ’아이-되기‘다. 슈만의 음악에서 ’어린이 정경‘은 ’아이-되기‘이고, 부인이자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의 영향은 ’여성-되기‘인 것이다. 실상, 예술가는 끊임없는 ’되기‘의 실천가들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아이되기, 예수되기, 여자되기, 게이되기, 동물되기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외되거나 배제된 존재 즉 타자화된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이입에 통달한 능동적 존재들인 것이다.
제유성의 회화 역시 이러한 ‘아이되기’의 실천적 산물이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라는 니체의 말은 그대로 작가의 작업에 해당된다. 작가는 예술작업 속에서 비로소 자기 욕망의 온전한 주체로서의 어린아이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도덕이나 법률, 제도로 심판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어린아이, 양심의 가책조차도 필요 없는 비도덕적 존재로서의 어린아이 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런 ‘아이되기’는 무의식으로의 퇴행인 동시에 창조적 역행이라는 긍정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역행이란 환타지-상상력이 풍부했던 유년기로 회귀하여, 창조한다는 의식 없이 자발적으로 창조하는 세계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생각해보라! 어린 시절 놀이에 흠뻑 빠져 있을 때 우리는 현실과는 다른 공간, 현실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있었지만, 모든 창조가 저절로, 너무 쉽게, 단박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곳은 바로 유토피아, 코라(chora), 이데아와도 같은 곳! 마치 제우스가 놀면서 창조하듯이 놀이와 창조가 일치된 시공간이었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천국(낙원)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역설적으로 그 상상력의 세계는 “어린아이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성숙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초록빛 낙원”(폴 비릴리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제유성의 작업 역시 신성한 창조적 놀이에의 철저한 몰입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런 그의 작업은 삶을 배우지 않아도 그것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처럼, 배운 대로 작품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발적인 몸짓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는 신들린듯 혼신의 힘으로 영감을 길러내고 자동기술적으로 번식하고 생성하는 이미지를 구사해내고 있는 것이다.
신념 그리고 미스테리
제유성의 모든 그리는 행위는 연습이자 실험이고, 경탄이자 찬사이며, 놀이이자 의식(ritual)이고, 고백이자 기도이며, 치유이자 성찰이다. 이렇듯 작가에게 예술작업은 종교적 신념과도 같으며, 동시에 유희적 노동이기도 하다. 그 반대로도 가능하다. 종교적 유희인 동시에 신념적 노동! 어떻게 표현해도 작가에겐 모두 옳다. 그의 품은 그런 모든 씨앗과 가능태를 수용할만큼 넓고 유연하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제유성에게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은 존재론적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믿음은 신념에 가깝고, 그래서 그 신념에 근간한 작품은 여전히 미스테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세계가 미스테리하다는 것은 그의 존재론적 자아가 아직도 생성 중에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작가의 작품이 무의식 속에서조차 완강히 웅크리고 있는, 그러니까 무의식 속의 또 다른 무의식의 억압이라는 부자연스러운 무엇인가가 느껴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 또한 별문제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고, 진화할 수 있는 ‘과정 중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가는 관자로 하여금 더 섬세하고 강한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배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업이 일탈이 아닌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수사((rhetoric)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수사법에는 삶이라는 지난한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깃털 같이 가벼운, 그러나 전혀 천박하지 않은 위트와 유머가 담겨있기를 바래본다.
예술가는 무엇인가에 중독된 자들이다. 여기가 아닌 저기, 현실이 아닌 이상, 지금 세계가 아닌 이전 세계에 중독된 자들인 것이다. 제유성 역시 지독히 그렇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수년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을 보고 싶어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아레초로 달려갔었던 기억과 오버랩되는 시와 그림이 그것이다. 자신의 예술의 진화를 위해 모진 수고와 고난을 마다하지 않을 작가 제유성은 내가 왜 이 글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키냐르와 내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보러 달려가게 만들었던 그 예술충동이 앞으로의 제유성의 작업에서도 꽃피워지길 기대해본다.
갈망된 시선은 눈꺼풀을 반쯤 내린다.
나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들을, 그 놀란듯한 정중함을 좋아했다.
오직 이곳만을 보고 있지 않은 눈. 예전 세계에 중독된 얼굴들.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동시대가 아닌 눈. 반쯤 감은 눈. 포식한 사자의 눈. M과 함께 우리는 1997년 여름 동안 반쯤 감은 이 놀라운 눈꺼풀들을 조사하러 갔다. 그것들은 마치 보이는 것을 가리기 주저하는 동시에 드러내지도 않으려고 주저하는 베일, 인간의 두꺼운 피부에 씌워진 매끄럽고 희미한 베일들 같았다.
-파스칼 키냐르 의 <은밀한 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