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2-11-02 ~ 2012-11-16
02.323.7395
변내리 개인전 4th. 庭園
전시작가 : 변내리작가
전시기간 : 2012년 11월 2일 ~ 11월 16일
Opening Hour 11:00 ~ 18:00 (Tue~Sun) 매주 월요일 휴관
Opening Reception : 2012년 11월 2일 오후 5시
장 소 :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132-30 아트 컴퍼니 긱.
전시문의 : T. 02-323-7395 / www.artcompanygig.co.kr 참조
평론_
풍경에서 얻은 정원
최기영(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오늘도 똑같은 일상의 시작을 알리는 자명종과 함께 무거운 몸을 움직이며 준비한다. 거리 가득 넘쳐나는 인파들은 아침이라는 시간을 대변하듯, 혹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의 일원이라는 충실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게 움직인다. 도로 한 가득 자동차가 서로의 목적지를 향하고 분주하게 이동한다. 오후의 한산한 거리의 시간을 지나 저녁이 되면 같은 모습에 화려한 네온의 불빛이 더 해질 뿐이다. 순차의 시간만이 존재할 뿐 각각의 공동체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은 아닐까. 아침의 바쁜 모습도 오후의 한산함도, 밤의 화려함도 ‘가족’이란 정원으로의 종착역을 찾는 것은 아닐까 한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돌아가려 하루의 일과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가족’ 그 따뜻함과 포근함은 모태의 어머니와 같은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안정과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잊혀진 단어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바쁜 일상, 사회, 사건... 정신없는 이야기들이 만들어낸 동화 속으로 자신을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의 삶에서 여유를 찾지 못하여 여행을 떠나고, 여가를 여가로 향유하지 못하고 취미나 레저로 규정하며, 또 다른 짐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살아간다.
작가 변내리는 이러한 우리들의 일상에 작은 파장을 주는 작품을 선사한다. 어쩌면 우리가 인식하였지만 잊고 있었던 ‘가족’과 행복을 화면을 통해 제시한다. 한 여인으로써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소리 없는 파장으로 우리의 마음에 공명을 전달하다. 흥미로운 점은 여인으로써 성장해가며 느끼는 감정의 변화와 생각들을 화면에 담아내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은유’라는 표현으로 보자면 표현 속에 보편적인 의미가 집중된 것이지만, 변내리는 ‘비유’와 ‘은유’의 중간에 메시지를 담고 있다. ‘비유’가 작가의 심상과 의미를 통일시키는 장치라고 한다면 작가의 표현대상들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리워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심상을 대변하는 장치로 만든다. 작가는 이러한 관점을 이용하여 대상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 분위기를 위한 대상의 함축, 함축된 대상에 세밀한 표현을 더 한다. 작가는 전체 풍경과 풍경 안의 대상간의 간격을 조절하며 중간자 역할을 충실하게 한다. 적극적이지도 않으며, 직설적이지도 않은 작가의 심상표현은 스스로가 이입된 감정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작가는 풍경을 그려나간다. 마치 정지된 사진처럼 하나의 풍경을 화면에 담지만, 그 풍경은 정지된 것이 아닌 작가 특유의 심상변화로 생명력을 담아내고 있다. 하이데거는 “작품이 된다는 것은 운동하고 있는 것을 정지시키는 것”이라는 공속성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우리가 풍경을 보는 것은 풍경 이면에 움직이는 기운, 감정, 드러남을 담는 행위일 것이다. 변내리는 이러한 지점에 여성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풍경에 비유하고 은유한다.
또한 작가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체득된 풍경은 심상에 의해 조합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풍경으로 잉태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지점을 여성이 꿈을 꾸는 소녀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로, 그리고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로의 역할로 대변하는 풍경을 담아낸다. 이러한 인과과정을 토대로 그녀의 작품을 살펴본다면 풍경이 풍경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풍경 같은 동화로 보인다. 동화는 이상향으로 이상향은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은 새로운 기대로 잉태되는 과정을 여성적 담담함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작품의 전개과정으로 살펴본 심상의 변화는 크게 ‘소녀(여인)=이상향’, ‘아내=현실’, ‘어머니=또 다른 세상’으로 구분된다,
1. 초기 작품에서 보여 지는 ‘섬’은 이상향인 동시에 하나의 정점이다. 여자로써 꿈꾸는 미래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아직은 그 대상이 희미하고 확실하지 않지만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섬을 그리워한다. 어쩌면 작가가 간직하고 있는 추억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으며 자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 연작들의 제목처럼 ‘낯선 곳’, ‘봄이 되고’, ‘반짝반짝’ 이라는 제목들은 특정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관람객이 작품에 보여 지는 대상들에 공감을 얻는다면 작가의 전유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람객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러한 점이 ‘은유’와‘ 비유’의 중간에 있는 작가만의 언어로 표현되는 장치이다. 무수한 알고리즘을 갖는 기계장치와는 대비되는 자연이라는 대상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작가의 풍경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다. 관람객이 인식하지 못하면 풍경으로 남는 것이고, 이상향으로 인식된다면 작가(여인)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는 그 이상향에 대한 설레임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면의 망설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2. 작가는 기억과 이상에 대한 설렘이 “밤”이라는 연작을 통해 좀 더 구체화된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설렘과 망설임이 결혼이라는 장치로 현실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밤’은 가려진다. 어두운 밤에 작은 등불은 미약하지만 그 빛의 범위는 무한하다. 어쩌면 작가가 결혼을 통해 ‘사랑’이라는 소통의 방식을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이 말한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인격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의식이 헌신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이는 타인의 헌신이 비로소 자신의 고유한 자기의식으로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풀어보자면 타인에 대한 헌신이 작가 스스로를 좀 더 명확하게 바라보는 장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여자에서 아내로 변화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밤’이며, ‘밤’의 색을 통해 작은 불빛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시간인 것이다.
‘달빛’, ‘파란 밤’, ‘별, 밤하늘에 내리다’는 대상은 진중하며, 주위의 청묵은 진중함을 더 숙연하게 만든다. 청연하게 떠 있는 ‘달’은 미약하지만, 전체화면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로 보자면 가족 공동체를 응시하고 살아가는 아내로써의 역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포근한 달빛은 파란하늘에 걸쳐 흑색으로 표현된 자연물을 침범하지 않고 응시하기만 한다. 가족이라는 전체화면을 놓고 본다면 작가의 역할도 이처럼 은은하고, 미약해 보이지만 광범위한 포용력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아내라는 역할이 남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그에 일상에 항상 존재하는 빛처럼 은유적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세상 어떤 아내가 남편을 침범하며 자신의 색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라는가? 그가 바라고 내가 바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큰 틀로 존재하는 세상이기에 파란 밤하늘은 따스하기만 하다. 작가는 밤 풍경에 ‘다리’, ‘의자’, ‘길’을 넣어 한 사람만의 전유된 풍경이 아닌 서로 호흡할 수 있는 풍경으로 변화를 이끈다.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관람객과 공감을 갖고자 하는 모습이다. 한편으로는 사랑의 대상과의 교감을 위한 가교 역할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여성이 갖는 생물학적, 사회적 역할을 통해 작품 안에 투영되는 대상의 화법이 변화를 이끈다. 일련의 시간 경과와 작품안의 매개체들의 표현은 원숙해지며, 나아가 대상에 대한 이해가 자신의 삶을 통해 투영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단지 영매적인 역할” 처럼 작가가 자신의 삶 속의 이야기를 단순하게 대상에 대한 대입으로만 그친다면 자신의 일기일 뿐 더 이상의 예술적 공유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변내리 라는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한 여성으로써 얻어지는 일상의 심상을 토대로 관람객에게 그 역할에 따라 투영되는 생각을 공유하고 증폭시키는 작품을 만들어간다.
3. 작가는 최종적으로 소녀(=여인), 아내를 거쳐 어머니라는 존재로의 역할 전환을 준비한다. 한 여성으로 ‘어머니’ 라는 존재는 자신 안에 또 다른 생명을 담고 인내하며, 세상에 대한 소통을 준비하는 어머니로 배우자만을 바라본 여성이 한 아이를 통해 스스로를 독립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작가에게는 이러한 삶의 변화가 설렘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두려움, 불확실성, 모호함을 혼재된 여성만이 갖는 이데올로기(Ideologie)를 통해 새로운 영역으로의 출발을 알린다. 작품에서도 이전의 개별성을 갖는 대상보다는 어우러짐과 화합된 대상들로 완성된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다. 완성된 공간은 ‘정원(庭園=garden)’으로 표현되며, 정원이라는 단어의 뜻 안에는 “public recreation area” 공동체(public)와 휴식(recreation)이 공존한다. 달리 표현하다면 정원을 통해 가족 공동체의 안식처를 구성하는 것이다. 작가는 “정원이라는 주제는 결혼을 통해 변화된 삶에 대한 이야기”라 말한다. 또한 “정원의 모습을 관람객이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개인의 정원과 같은 휴식처를 찾았으면 한다.”라고 한다. 이는 작가가 그리는 정원이 개인적인 안정의 공간이라는 것과 그 공간 안에 사람들이 느끼는 안정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들을 포함하였다는 것이다. 초기의 작품들과는 달리 작가의 언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되며, 나아가 자신만의 이야기에 타인의 존재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발생한다.
작품 안에서 제시된 공간은 작가뿐만이 아닌 배우자, 아이가 쉴 수 있는 곳을 그리며, 관람객이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한다. 앙상한 나뭇가지나 스산한 겨울이라는 계절적 시점을 제시하지만, 전혀 춥거나 메마른 풍경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전작과 비슷한 푸른 밤하늘에 고즈넉하게 걸려있는 초승달은 기나긴 겨울 끝에 다가오는 초봄의 풍경으로 보여 지게 한다. 작가 자신도 그렇듯 한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며, 겨울을 지나온 것처럼 말이다. 이제는 봄이 되어 새로운 삶의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을 대변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작가가 그린 풍경에는 화려한 꽃이 만발할지도 모른다.
작가 변내리의 작품은 여성이 갖는 사회성과 개인성을 동시에 내포한다. 작품의 구성이 풍경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 안의 팩트(fact)는 한 사람의 성장기이며, 진행형인 스토리이다. 정적으로 보이는 화면 뒤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맹렬한 움직임이 존재하며, 맹렬한 움직임은 삶이라는 정원의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급속화게 변화하는 우리의 삶과 결과만이 제시되는 사회 안에서 그의 작품은 푸르른 밤하늘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여성이 갖는 역할을 통해 작품은 변화하며, 움직인다. 작은 파동으로 시작 되는 물결처럼 그 시작은 작은 여운이지만, 종국에는 무한한 파장으로 다가온다.
현대회화는 우리의 사회처럼 화면에 결과와 같은 무수한 기호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기호들은 이야기 보다는 함축된 단어로, 일상적인 이야기 보다는 무거운 시대적 담론들로 화려한 네온처럼 반짝인다. 이에 반하여 변내리는 담담하다. 그리고 무겁다. 수많은 얼개를 갖는 예술담론보다 일상적인 이야기로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자연 풍경을 담는 회화조차도 무거운 예술론을 표방해야 하는 현실보다 일상적이지만 인간본연의 심상에 호소하는 그녀의 작품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예술은 자연의 재현이며 표현이다.”라는 예술 담론을 열거하기 보다는 작가가 관람객과 소통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 소통을 무엇을 주제로 하는지가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진중한 담론보다 가벼워 보이는 한 여성의 심상 전개과정이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잊어버린 기본적인 감성의 요소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작가의 작품은 진행형이다. 그래서 그녀의 정원이 커 보인다. 많은 사인물로 가득 찬 도시 한 가운데 작지만 정겨운 정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잊지 말자! 우리도 그 정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오늘 서로에게 ‘사랑해’라는 말과 함께 씨앗을 뿌려보자.
작가노트_
나의 정원 庭園
나는 이제 내 작고 작은 생각들을 담아두는 비밀스러운 정원을 만든다.
나의 마음 속, 작은 기억들이 남아 있는 자리, 그 곳에 마음이 멍한 날 당신이 쉴 수 있는 자리를 숨겨놓는다.
당신과 함께 걷던 길,
당신과 함께 쉬던 자리,
당신과 함께인,
우리의 아름다운 정원에...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정원은 도처에 있다. 집 밖에 작게 만들어놓은 정원도 있고, 그게 여의치 않는 사람들은 작은 화분을 키우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정원은 안식처이다. 자연이 주는 공간은 크던 작던 잠시나마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를 준다.
정원은 실재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상징하고 은유하기도 한다.
어느 계절 피고 지고, 지고 피어나기를 반복하는 나의 자연은 우리네 삶과 닮아있어 어느 날 잠시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리고, 흐드러지게 피는 꽃들이 질 때면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질 때가 있다. 나는 자연의 움직임을 통해 비밀스러운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정원이 나의 마음 상태에 스며들고, 또 나의 마음 상태가 정원에 영향을 미쳐 나는 마음의 정원을 만든다. 나의 마음 속, '삶'인 나의 정원에 기억, 몽상 등이 머무르기 위한 일종의 깊은 시간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시간이 느리게 흐르도록 한다. 그리고 그곳에 머무르던 지나치던 선택의 여지는 당신들에게 남겨 놓는다.
나는 이제 정원사가 되어 당신이 걷고 머무르고 쉬어갈 마음의 정원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질 무렵 서글퍼지는 마음이 머물고, 푸릇한 새싹들이 돋아나 설레는 마음이 머물고, 잠시 부는 바람에 마음이 흔들리고, 예쁜 달이 뜨는 밤 달빛을 따라 잠시 쉬었다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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