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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선 : The T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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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선-피부에 기억하는 상처




박영택 |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회화와 도조가 하나로 맞물려있다. 캔버스 화면에 그려진 그림과 그 그림을 배경으로 입체, 부조로 자리한 인체상이 자리하고 있는 작품이다. 도조와 회화의 결합이거나 특정 장르에서 벗어난 탈장르적이라고 인상적으로 말해볼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 작업은 작가 자신의 표현 욕망과 능력을 수용하는 차원에 놓여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를 반영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경우가 유별나게 출신학교와 전공을 따지고 그 배경 안에서 상당히 배타적인 권력들이 작동되고 있다. 장르와 매체에 대한 무슨 결별증적이거나 완고한 독점의식 같은 것이 어느 정도 숨어있다. 이미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혼합매체나 탈장르에 대한 논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출신전공, 그에 따른 매체, 재료체험의 ‘순수성’의 강조는 여전한 편이다. 작가란 존재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상상해낸 것을, 남이 아니 자신만이 본 것을 형상화시키는 이들이다. 그것을 물질화해서 가시적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여기에 무슨 전공의 한계나 재료의 한계란 있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이 잘 다루고 다룰 만하고 표현하고자 하는데 적합한 매체를 쓸 뿐이다. 물론 작가들은 자신이 오랜 시간 다루고 길들여지고 이해하는, 그래서 다른 어떤 재료보다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재료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 재료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재료와 기법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나 자신의 감각에 맞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윤정선은 도예를 전공했기에 그에게 흙이란 다른 어떤 것보다 친숙하고 의미 있는 재료이자 동시에 풍부한 표현 가능성을 지닌 물질이었으리라. 작가는 그 흙을 이용해 인체를 재현했다. 실용적 차원에서 기능하는 물건의 생산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서의 도조의 성격이 강하다, 한결같이 여자상이고 소녀상에 가깝다. 반듯한 얼굴과 옷을 벗은 상반신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졌고 그것들은 파편이 되어 견고하게 화면에 부착되었다. 그려진 그림들 위로 여체의 부분적인 조각들이 떠돌듯이 서식한다. 배경의 그림은 돌출된 조각상의 심리나 정신, 감정이나 기억 등을 서술해주는 분위기가 되어 안개처럼 자욱하다. 모호하고 몽환적이고 아련하다고나 할까. 온통 흐릿한 그림들은 암시적인 장면을 영상처럼 제공해준다. 너무 환한 햇빛에 눈이 멀듯, 화면을 온전히 파악해서 보기는 어렵다. 흰색이 다소 과도하게 들어간 화면은 모든 대상, 공간을 희뿌염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명시적인 대상이 아니라 이른바 ‘페이드아웃fadeout’된 상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막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 같다. 존재하지만 부재이기도 하고 그러나 부재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유동한다. 아마도 작가는 그런 상황을 설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화면, 그림이 요구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림은 배경이 되어 영상을 보여주고 그 흐린 화면위에 단호하고 선명하며 부정할 수 없는 물질, 흙으로 구워낸 여자상이 자리한다. 순간 부착된 오브제, 조각상과 배경 그림은 한 쌍이 되어 무슨 ‘계시’처럼 다가온다. 화면위에 부착된 여자의 얼굴과 몸에 간직한 상흔이 저 멀리 아련하게 흐려지는 이미지와 함께 뒤섞여 모종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려진 그림, 배경화면은 흙으로 빚어낸 여자의 일상이나 추억 등을 암시하는  장치 같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삶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그렇게 본다면 이 작업은 작가 본인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 같은 작업인 셈이다. 화면 위에 부착된 여자/소녀는 작가의 분신이나 대리물이고 배경은 작가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이나 장면일 것이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저 멀리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삭막한 시멘트건물과 공사장 풍경, 메마른 풀들과 헐벗은 나뭇가지들, 따스한 햇살이 넘실거리는 실내풍경이 얼핏 드러난다. 아마도 작가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한 풍경이자 일상을 살면서 불현듯 마주한 상황, 그리고는 어딘지 상실감과 아련함을 동반하는 것들 인 듯하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다가와 미묘한 감정을 막연하게 일으켰던 순간은 아닐까. 그림은 사실 이처럼 느닷없이, 막막하게 다가와 이상한 감정을 일으키고 사라져버린 것들을 안스럽게 환생하고자 하는 절박한 시도에 가깝다. 


 바탕 화면에 올려놓은 조각, 도조 역시 그 배경의 장면에 따라 위치해있다는 인상이다. 파편화된 인체의 어느 부위가 느닷없이 출몰하거나 동세를 지닌 체 매달려있는 것은 상당히 극적이거나 격정적인, 혹은 고양된 감정의 감각적인 서술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매우 정교하게 제작된 도조 인물상 때문이다. 실제 모델을 바탕으로 흙으로 섬세하게 형태를 만든 후 내부를 비워내고 가마에서 소성해서 만든 이 인물상은 그 사실성에 의해, 그리고 색다른 효과연출로 인물상 표면에 얹혀진 흔적들로 인해 주목을 끈다. 이는 작가에 의해 고안된 독특한 방법론인데 그로인해 일반적인 도조인물상이나 부조상에서 벗어나 작가만의 표현효과를 지닌 독자한 인물상이 형성된다. 쉽게 말해 유약을 쓰지 않고 내화갑 소성으로 이루어진 형상이 주는 효과가 독특하다는 것이다. 그 효과는 흙으로 구워낸 인물의 피부위에 그을음이나 묘한 질감을 부여해 그 인물상이 지닌 내면의 상흔이나 심리적인 상처, 혹은 그가 겪고 있는 여러 감정의 상황을 피부위로 호출하는 효과를 지닌다. 


 나로서는 작가의 재현능력과 내화갑 소성으로 이루어낸 흥미로운 작업과정으로 인해 이루어진 인물상이 완성도가 무척 높고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고 본다. 다만 인체의 피부위에 올려놓은 흔적들이 다소 과도하다는 느낌과 배경으로 설정된 그림들이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하지않나 하는 생각이다. 오히려 도조작업과 내화갑 소성을 거쳐 만들어진 인체상, 그자체로도 이미 풍부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흙으로 빚고 구워낸 여자들의 피부에는 자신이 쏘였던 불의 흔적을 선명하게 상처처럼 간직하고 있다. 그 불에 데인 상처야말로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겪는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으로 인한 것들이다. 견고한 인물상이 되기 위해 흙은 높은 온도까지 올라간 불을 반드시 맞아야만 한다. 그래야 독립된 하나의 형체, 인체가 된다. 그러나 인체의 연약한 피부는 그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인간이 성장을 하거나 어른이 된다는 것도 동일하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상처를 문신처럼 두르고 있다. 그 불에 그을린 자취는 잊혀지지 않는,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보여주는 한편 그로인해 서로가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주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깔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인체의 파편들이 몽환적인 배경을 뒤로 하고 부유하는 작가의 화면은 이상하게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잡아끄는 슬픔 같은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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