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2012-11-17 ~ 2012-12-28
유료
02.3407.3500
<플레이타임(PLAYTIME)>
문화역서울284의 기획전 <플레이타임>은 동시대 예술의 특징인 장르 간의 융합과 예술의 시간성에 주목하는 퍼포먼스 프로젝트다. 11월17일부터 12월 28일까지 6주 동안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문학, 디자인, 건축 등 전 장르 예술가들 55인(팀)의 독특한 퍼포먼스가 매일매일 문화역서울284 전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90년대 이후 현대예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양한 예술장르들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시와 공연이 협업하고 실시간 행위들을 통한 독특한 예술체험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현대예술의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고, 기존의 ‘퍼포먼스’ 형식을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퍼포먼스 형식의 다양화와 발전은 2000년대 들어 더욱 더 부각되었고, 그 의미생산에 대한 관심 또한 날로 증가하고 있다. 제롬 벨의 무용은 공연인가 개념미술의 연장인가, 티노 세갈의 작품은 퍼포먼스인가 조각인가…단적인 사례지만 현재 우리 예술계가 주목하는 이 두 작가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제 이러한 장르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양한 사회활동이 예술형태로 전환되며, 조각이 행위를 유발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행위가 서사를 유도하며 오늘날 예술형태는 공간과 오브제보다는 ‘예술의 시간’은 무엇인가, 이 시간을 어떻게 연기/연출(플레이)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생산하는 예술형태는 어떤 것일까를 실험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지금 퍼포먼스의 본질, 변화 그리고 그 형태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국내에서도 퍼포먼스를 근간으로 하는 크고 작은 전시, 페스티벌이 소개되면서 오늘날 현대예술에서 퍼포먼스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과 병행하며 <플레이타임>은 보다 전격적으로 또 보다 급진적인 방식으로, 국내 전 장르 예술가들과 함께 이들의 실험적 제안을 6주 동안 실시간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플레이타임>은 퍼포먼스의 전형을 보여주거나 퍼포먼스에 대한 그 어떤 확고한 스테이트먼트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플레이타임>은 ‘지금 여기’서 전형보다는 실험과정으로서 발언보다는 질문으로 존재하고자 한다. <플레이타임>은 행위, 움직임, 이야기와 시간과의 관계를 다루는 예술작품들, 또 그것이 생산하는 실험적 형태와 그 의미의 풍요성을 모두 함께 실시간으로 체험하는 시간이다. 기록과 재현의 시간과는 사뭇 다른 재생불가능 한 시간을 전제로 하는 예술 행위들을 실험하는 <플레이타임>은 총 5개의 섹션인 <리허설: 김성원 기획>, <하기연습: 김희진 기획>, <플레이타임 아트스쿨: 안은미 기획>, <에피스테메의 대기실: 김현진 기획>, <모래극장: 김해주 기획>으로 구성된다. <리허설>은 시작도 끝도 없는 반복적 시간을 탐구한다. <리허설>은 재생은 불가능하지만 반복가능 한 실시간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이야기들과 전위적 행위들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시간이다. <하기연습>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사회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행동양식을 규정하는 일종의 훈련과정을 보여준다.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하기연습>은 단련과 훈육의 경계를 넘나들며 발화되는 개인적 혹은 사회적 행위들의 의미를 진단한다. <플레이타임 아트스쿨>은 국내 젊은 안무가와 무용가들이 <플레이타임> 전시공간과 작품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펼치는 ‘예술의 놀이시간’이다. 동시대 작가들의 과거 속에 잠재된 현재, 현재 속에 잠재한 미래의 시간을 다루는 <에피스테메의 대기실>은 중첩된 시간들과 근현대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실험하는 예술형태의 도래를 기다리는 실험무대가 된다. <모래극장>은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서사의 변주를 경험하는 장소이다. 무대도 고정 좌석도 벽도 없으며, 관객 각자의 시간 조합에 따라 무한한 경우의 수로 확장되는 <모래극장>은 기존의 서사구조를 전복하는 새로운 형식의 ‘시간을 품은 서사’를 제안한다.
아울러 <플레이타임>전시는 ‘플레이타임 리더(Playtime Reader)’를 발행한다. 2000년대 이후 뉴욕의 Performa를 비롯하여 유럽 주요 미술관의 퍼포먼스 프로젝트 그리고 한국에서도 최근 페스티벌 봄, 플랫폼 등을 통해 퍼포먼스와 수행성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으나 그 이론적 정리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플레이타임 리더’는 퍼포먼스와 수행성에 대한 국내외 전문가들의 다양한 입장과 제안을 자유롭게 구성한 텍스트 모음집이 될 것이다. 아울러 <플레이타임> 전시의 비주얼 아이덴티 디자인 또한 그래픽디자이너 칼 나브로의 독특한 퍼포먼스를 통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칼 나브로는 <플레이타임> 전시를 위해 기발한 그래픽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를 사용해서 매 번 다른 드로잉-디자인을 제안했다. 재생불가능한 하지만 반복을 통해 조금씩 달라지는 칼 나브로의 <플레이타임> 디자인은 이미지와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예술의 (실)시간이 일상의 (실)시간과 중첩되는 <플레이타임>에서 다채로운 일상의 이야기들이 진술 혹은 묘사가 아닌 수행적 발화로 전환되는 시간을 함께 체험하며 그것의 풍요로운 의미 생산을 기대해 본다.
김성원(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
<리허설(기획 김성원)>
기획자 : 김성원(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리허설>은 <플레이타임>의 한 섹션을 구성하는 퍼포먼스 프로젝트 제목이다. 일반적으로 리허설은 정식 공연을 위해 사전에 작품의 일부 혹은 전체를 반복하는 행위와 시간을 의미한다. 리허설의 반복되는 행위와 시간은 완성과 전체보다는 실험과 과정의 시간이며, 부분, 미완성, 불안정, 실수라는 이면을 부각시킨다. 리허설의 이러한 요소들은 고정관념, 규범, 관습으로부터 그 어떤 자유를 허용할 수 있고, 창의적이고 풍요로운 예술형태를 도출시킨다. 리허설은 반복되지만 매번 다르게 작동하는 새로운 행위들과 시간들을 초대한다. 리허설은 확실함, 유일함, 일관성에 대한 의심을 유도하며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허설>은 미완성의 시간을 가동시키며, 실수를 즐기고, 불안정함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며 매 번 새로운 관객을 기다린다. 리허설의 의미는 관객에 의해 활성화되고 그 다양한 가능성들이 증폭된다. 미완성의 리허설은 관객의 호응과 함께 비로소 완성된다.
실시간으로 관객의 참여와 반응과 함께 형성되는 <리허설>은 매번 새로운 행위와 독특한 시간을 체험을 허용한다. 총 14명의 작가들로 구성되는 <리허설>은 음악, 무용, 문학, 디자인, 건축, 미술, 영상 등 전 장르의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다양하고 기괴한 오브제들로 자신만의 소리를 창조하는 사운드 아티스트 권병준은 6주 동안 신진 음악가들과 함께 <나의 악기, 나의 소리>라는 사운드 워크숍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공연을 통해 보여준다. 음악가 최수환의 <<11차원의 구>는 시간을 추적하는 ‘소리-풍경’으로서 네 명의 음악가가 전시공간을 선회하며 명상과 대화를 위한 엠비언트 음악을 연주한다. 시인 심보선과 김소연의 <킐티드 포엠>은 관객들이 직접 그리고 함께 시를 만들 수 있는 워크숍이며, 이와 병행하며 <소울 메이팅>이라는 독특한 시 낭송 퍼포먼스를 기획한다. 디자이너 김황이 제안하는 퍼포먼스 리서치 랩은 건축가들로 구성된 살아있는 도서관으로, 관객은 15분 동안 원하는 건축가들을 호출할 수 있고, 질문, 항의, 질책,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워크숍 <퍼포먼스 리서치 랩, 두 번째 : 건축 플랫폼 284>을 보여준다. 김소라의 < Movement No.3: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회전운동>은 퍼포머가 6주 동안 매일 매일 서울역 주변을 선회하는 퍼포먼스로 반복되는 일상의 순간을 부각시킨다. 대중장식과 기하학적 합리성의 이질적 공존을 반영하는 이은우의 ‘시공사례’ 오브제들은 현대무용가 장현준과 최현진의 퍼포먼스를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건축적 요소, 조각, 사운드로 구성되는 길초실의 <Welcome back>은 퍼포먼스를 기다리는 무대세트로 작동하며, 단어들의 콜라쥬로 만들어진 추상적 소리는 구체적 행위를 부르는 초대와도 같다. 써니킴은 작업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자신의 그림 속 한 장면을 활성화시킨다. 그림 속의 소녀들이 서로 반응하며 끌어 내는 이야기와 그들의 가벼운 움직임들은 회화의 시간을 반영하고 있다. 전소정의 퍼포먼스는 사건의 기록과 허구적 이야기들이 중첩되며 새로운 서사를 제안한다. 관객은 실제 사건 이면에 각자의 개인적 서사를 개입시키고 확장시키며 새로운 시공간,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가사로 하는 가곡을 배경음악으로 시공간을 알 수 없는 정원 풍경이 무한히 반복되는 김실비의 <에밀리D: 미분화된 상태의 협업>은 관객의 움직임과 함께 물리적 시공간을 몽상적 시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수행적 설치 작업이다. 2주 동안 매일 정해 진 시간에 관객들과 함께 진행되는 홍윤정의 타로카드 리딩 퍼포먼스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기억과 미래,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실험하며 관객의 고정관념을 허문다. 니콜라스 펠처의 <빠른 자세를 위한 세팅>은 공간 입구 혹은 복도에 설치되는 조립식 구조물이다. 이 유동적 구조들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어떤 시간에서 또 다른 시간으로 이동하는 통로로서 수행성을 띄게 된다. 현대무용가 남정호는 원로 섹소폰 연주가 강태환의 연주에 맞춰 즉흥적 공연을 제안했으며, 아울러 구 서울역사 그릴 공간을 위한 장소 특정적 무용 공연을 구상한다. 안은미의 개막 퍼포먼스<댄싱 틴틴 프로젝트>는 무용교육을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과 믿음직한 어른들이 함께 춤출 수 있는 클럽 공간을 제공하여 청소년들에게 열린 몸을 체험하게 하고 심신의 확장을 실험하게 된다.
<모래극장(Theater of Sands)>
기획자 : 김해주 (독립큐레이터)
“만일 공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공간의 모든 곳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모든 시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루이스 보르헤스, <모래의 책>
퍼포먼스는 미술은 물론 연극, 음악, 무용과 같은 공연예술에서 두루 사용되는 용어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기본적인 특성 외에 각기 다른 여러 장르의 퍼포먼스에서 교집합으로 도출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면 아마도 서사적 성격일 것이다. 희곡을 기본으로 하는 연극은 물론이고, 미술에 있어서의 다수의 퍼포먼스도 사실과 픽션의 구분을 넘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서 작품을 구축하곤 한다. 서사란 기본적으로 시간과 논리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뜻하지만 실은 그것을 전달 받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각자의 상을 그려내기 위한 최초의 단서이거나 장치로 보는 것이 맞다. 서사를 픽션의 세계로 함몰시키거나 감정의 과잉으로 이끄는 요소가 아니라 창작자가 가지고 있는 ‘개념의 조합’으로 이해할 때 서사의 변용 방식은 무한해진다. 사실 우리의 사고 과정이 상당 부분 언어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의 일상은 문장 만들기, 즉 서사적 구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게다가 퍼포먼스의 주요 개념인 수행성(Performativity)만 하더라도 언어의 이해를 통한 행동의 발현에 기반하고 있다.
서사는 시간을 품는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Temps et récit)’에 관한 방대한 저서에서 “시간은 서사적 방식으로 진술되는 한에 있어서 인간의 시간이 되며, 반면에 이야기는 시간 경험의 특징들을 그리는 한에 있어서 의미를 갖는다.”라고 한다. 이야기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며 시간적으로 전개된다. 역으로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모든 것은 이야기될 수 있다. 모든 시간적 과정은 그것이 이야기되는 한에서만 시간적인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 리쾨르의 출발점이며 이것은 역사기술 뿐만 아니라 허구적 이야기 구성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면에서 그는 모든 ‘이야기하기’의 시도에 전제되는 것이 시간성이라고 본다.
<모래극장>에는 무대도 고정 좌석도 벽도 없다. 모래극장의 레퍼토리는 관객 각자의 시간 조합에 따라 무한한 경우의 수로 확장된다. 이곳은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서사의 변주를 경험하는 장소이다. 조형적 언어와 연극적 서사 만들기의 유사성에서 출발한 김나영, 그레고리 마스와 최치언의 협업, 문화역 서울의 역사와 기억에서 출발하여 관람자 머리 속에서 발생될 퍼포먼스를 위한 장치를 제안할 남화연과,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소리와 빛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 할 김아영의 작업, 분절과 재조합이라는 포스트 프로덕션의 재료로서 서사를 다루게 될 장영규, 서사를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치로 생각하여 서사-배우를 직접 연결하는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작업, 그리고 오페라 음악을 매개로 작가 자신에서부터 퍼포머, 그리고 여성 전체에 이르는 ‘자기희생’의 고전 서사를 중첩시키는 노르마 진, 그리고 기존 서사를 독특한 장면구성으로 전복하여 새로운 시각적 효과를 노리는 극단 성북동 비둘기와 동시간의 퍼포먼스를 영화적으로 편집하여 현재-회상 구조를 표현하는 극단 맘 앤 집시의 워크숍, “살아있는 아카이브”인 몸을 통해 기억을 축적시키는 서영란 노은실의 작업까지. 모래 극장에서는 기억과 역사를 품은 서사, 혹은 도구와 은유로 활용된 다양한 서사들이 설치, 영상 또는 퍼포머의 몸을 타고 순간 응고되었다가 사라질 것이다.
<에피스테메의 대기실 The Waiting Room of Episteme >
기획자 : 김현진 (독립 큐레이터)
<에피스테메의 대기실>이라는 제목의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인식론적 접근들의 등장을 기다리는 무대 혹은 그것을 잠재하는 자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큐레이터 김현진에 의해 기획 및 커미션된 8개의 동시대 미술, 무용, 건축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획은 시각 예술과 관련된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에서 인식론적 차원의 작동과 그 지각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우선 건축가 최춘웅은 중앙홀에 서로 다른 키를 가진 의자와 좌대들이 연결되는 구조물을 설치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평평한 플랫폼이라는 무대의 속성을 탈피한 무대 디자인으로, 공연 상황에 따라 변형되거나 재조합될 수 있고 스스로의 구조적 변화를 통해 퍼포먼스의 움직임에 개입하는 등, 매번 작품들과 새로운 관계들을 형성한다. 플라잉시티는 어른들의 기준에서 규정되는 '아이들'이라는 개념적 범주에 대해서 질문한다. 물리적 공간에 대한 어린이들의 인식을 다루는 <두께씨의 방>이라는 관객 참여형 연극을 아이들과의 워크숍을 통해서 만들어냈고, 이 작업을 통해 관객은 아이들이라는 개념이 지니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인식하게 된다.
정서영의 조각적 작품들은 시각예술 작업의 수행성을 확인시키는 작업으로 유효하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각적 풍경과 그 공간에 대한 신체의 체험을 말언어와 소리로 번역하고 다시 그 요소들을 조각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구체성과 막연함 사이에 있는 공감각적 체험의 표류를 드러낸다. 홍영인은 몸을 때린 소리와 4가지의 서로 다른 악기들이 즉흥 협연하는 음악가들의 퍼포먼스를 마치 살아있는 조각처럼 구성한다. 신체, 비정형 음악, 행위 등의 요소가 문화역 284 건물의 ‘복원된 근대성’과 함께 공명한다. 차재민과 파트타임스위트는 도시 공간 내부의 숨겨진 갈등이나 도시 개발과 경제로부터 내몰린 삶을 포착한다. 차재민은 송도의 도시 풍경 속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속도감에 탭댄스라는 요소를 통해서 접근하고, 파트타임스위트는 서울역 주변에서 관찰된 부조리한 이미지들을 라이브로 편집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한편, 문화역 서울 284의 시공간적 의미와도 부합할 수 있는 근현대 전통 문화에 대한 재접근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작가 정은영은 여성이 모든 남성의 역할까지 맡아 연기하면서 5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여성 국극을 기반으로 근현대의 흥미로운 ‘젠더’적 전복을 보여주는 두 편의 새로운 공연을 연출하며, 이 작품들은 대표적인 두 명의 원로 국극 배우들의 탁월한연기를 통해 완성될 것이다. 안무가 이양희 역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착된 한국 춤의 영역을 새로이 인식하면서 그 속에서 재발견되는 순수 언어와 움직임의 형식 등, 한국 춤의 근본적 속성을 이해해나가는 작업을 시도한다. 특히, 자신의 스승을 자신의 무용수로 초대하여 한국 춤의 도제적 틀이 지닌 위계를 전복하는 시도를 작품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 형식에 대한 깊이 있는 충실한 탐구를 마스터와 함께 완성해내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된다.
<에피스테메의 대기실> 파트에 설치, 공연되는 작품들은 플레이타임(PlayTime)전을 계기로 대부분 새로 프로덕션된 작품들이다. 이 기획은 최근 왕성해진 시각문화 영역과 공연, 퍼포먼스 영역의 상호 확장성을 반영하고 있지만, 장르적 변화를 표본화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이보다 수행성을 통해 약속되는 인식론적 전복에 대한 믿음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별다른 패러다임의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 최근의 미술 현장에서 <에피스테메의 대기실>은 현재라는 시공간에 대한 작가들의 심화된 탐색과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무대로 시도된다. 그리하여 이 현재는 마침내 도래할 시간을 기다리는 대기실이다.
<하기연습(Exercise of Doing) >
기획자 :김희진 (아트 스페이스 풀 대표)
어처구니없게도 ‘하기’ 자체가 관건인 세상이다. 세간에 회자되는 “닥치고 ~하라”라는 카피문구들의 유행은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가 라는 질문 이전에 ‘한다’는 명제 자체에 대한 확신과 의욕이 상실했음을 반증하는 시대의 풍속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태어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영위하는 모든 행위가 다 ‘하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 ‘하기’ 자체를 새삼 강조하고 문제시하는가. 그것은 재차 인간의 부조리한 실존상황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는 철학적 호출인가, 아니면 특정한 무엇은 ‘하지 않겠다’는 현실개입적인 비판과 거부의사를 우회적으로 표현함인가, 정반대로 ‘하되 어떻게 하라’는 실천적 방법과 인식론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함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자포자기와 불확실의 시대에 정말 순수하게 행동하는 자세의 인류학적 숭고함을 복원하기 위함인가.
‘하기’에 대한 관심은 이 모든 층위에서 총체적으로 일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하기’론의 각축 속에서 과잉 행동과 무기력감이 극단적으로 공존하고 결국 ‘하기’에의 의지와 동력은 급속히 쇠진해간다. 사회 전반에 깔린 원칙의 부재, 상식을 대체한 몰상식한 가치체계의 독점, 개인간 무한경쟁 심화, 계층간 배분의 불공정성 등의 뿌리깊은 사회구조적 문제들은 그 제도적 개선에 대해 고민하기에 앞서 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지형에서의 근간을 물리적, 정신적으로 피폐화시키고 있다. 폐쇄적 원리주의와 공허한 원칙주의, 낭만적 도피주의, 발빠른 기회주의, 반동적 냉소주의, 염세적 허무주의, 무기력한 패배주의, 신경학적 심리증상들과 청년 자살이 짙게 드리운 사회심리지형에서, 일체의 ’하기‘에 대한 개개인의 피로감과 불신임, 불안은 가중된다. ‘무엇을 어떻게 하자’라는 말보다 ‘할 수 있다’라는 자기 긍정, 작은 실행의 가치, 도덕과 윤리의식을 겸비한 이타적 하기, 개별적 하기 간의 조율감을 회복해야 할 때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기를 처음부터 다시 ‘연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기연습 Exercise of Doing>은 이러한 사회심리적 징후가 농후한 시점에 근현대 대한민국의 공공장소 1번지인 구 서울역사에서 펼쳐지는 전시이다. 각자 “하기”에 대한 해석과 소재, 형식은 상이해도 총 14인(팀/개인) 미술작가들은 ‘하기’의 의지와 가치를 활성화시키고 혹은 재구성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해 주었다.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가의 사안을 선점하려 하지 말고 우선 피폐해진 개개인의 정신적 삶의 동력을 복원하자는 차원에서 본 프로젝트는 통합적으로 마인드콘트롤 액션이고, 개별체들의 자기긍정, 자가통치, 자기결정, 자기조직화의 가치를 발언하는 그룹 액션이다.
전시에 소개되는 일군의 작업들은 개인의 자발적 동기와 의욕을 복원시키려는 자기주도형 수련 노력(옥정호, 조은지)을 주목한다. 인정받지 못하는 비공식적 매스터쉽(권용주)을 참조하고, 사소한 일이어도 불가능에 도전하는 서투른 시도를 감행하며(이완), 이렇다 하게 명명될 수 없는 행위나 불완전한 성취에서 뜻밖의 가치가 생산될 수 있음을 주목하고(고승욱, 미켈란젤로 피스똘레또밴드, 양아치),금기 앞에 주저하는 망설임(박나훈)과 과감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노출시킨다(임흥순).
하지만, 불완전한 성과에 대한 작가들의 이러한 가치부여 행위들에는, 일이건 행동이건일체의 표현을 인지하고 평가하는 사회경제적 구조와 이로 인한 사회심리학적 병리현상들에 대한 고민이 깔려있음이 또 다른 일군의 작업들에서 드러난다. 원칙은 있지만 소수에 의해 자의적으로 수정되는 원칙은 공허하며(남상수), 대의의 방향성이 혼미할 때 개인의 성실한 직업정신과 대의에의 신뢰는 개인을 함몰시키는 강박이 되며(김상돈), 이때 어지러이 교차, 충돌하는 기준과 원칙의 혼돈 속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들은 사회적 낙오자가 된다(조습). 동정 어린 이타심이나 순진한 낭만주의, 아마츄어에 대한 반동적 경외감과는 거리가 먼 공명과 통찰의 지점들이다.
하기의 복원과 재구성을 위한 노력은 행동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지적 재구성 차원으로도 이어지는데(여다함&류지완), 특히 작가 성능경은 세계지도를 문자 그대로 뒤집어 재구성함으로써 피상적인 글로벌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자발적 하기’에의 낭만을 무모하게 선전하지 않고 과잉과 절제 사이의 적절한 ‘하기’의 정량, 강도를 각자 터득하는 게 쉽지 않음을 실감했다. 셀프거버넌스는 머리, 정신, 몸, 마음의 합일과 통치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이 체육 體育의 본질 아니겠는가. 집단 규제형 체육, 입시체육, 사회체육, 보건체육 등의 이름으로 왜곡되어 온 일상의 ‘하기’를 탈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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