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
음악처럼 회화에서는, 즉 예술에서는 형태를 발명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힘을 포착하는 것이 문제이다. 바로 그 때문에 어떤 예술도 구상적이지 않다. 클레의 유명한 방식인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가 특별히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회화의 의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 음악도 들리지 않는 힘을 들리도록 하는 시도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은 명확하다.
Gilles Deleuze,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Paris: Seuil, 2002, p. 57.
미디어 아트(media art)는 근대적 과학 문명의 결과물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물질적이다. 그것은 어떤 예술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image)를 제공하므로 구상(具象)이자 현실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는 만질 수 없는 이미지-빛-으로 존재하기에 비물질적이다. 그것은 허상이자 추상(抽象)이며 환상이다. 미디어 아트는 과학 기술을 토대로 작가의 내적 상상과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자유와 가능성을 선사했고 작가의 예술적 표현력은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원(電源)이 켜져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자유이다. 전원이 꺼지면 영원할 것 같던 마법의 세계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처럼 미디어 아트는 스스로 아이러니(irony)를 품고 있는 수수께끼이다. 그리고 여기, 아이러니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미궁으로 뛰어든 작가 진시영이 있다. 그는 미디어 아트라는 실타래, 그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해 두 개의 대척점(對蹠點)을 초월하는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창조한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정답으로 다음의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인간 세계의 –현실과 가상을 포함하는-모든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원성의 현현(顯現)이며 다른 하나는 기계와 인간, 구상과 추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상(figure)의 현현이다.
진시영은 미디어 아트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영원성에 주목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웨이브 Wave>(2008), <플로우 Flow>(2011) 시리즈, <운주사 Temple Unju>(2012)는 모두 영원함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그의 미디어 아트는 우리에게 두 가지 층위의 영원성, 즉 물리적 시간의 영원성과 주관적 시간의 영원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영원함은 인간 삶에서 중요한 문제였고 갈망의 대상이었으며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무상함을 경험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인류의 유산들은 유한한 시간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허무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인간은 과학적, 의학적 진보를 통해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을 늘려나갔고 종교적, 철학적, 예술적 행위를 통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을 늘려나가면서 영원성에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한편 영원이라는 것은 언제나 시간성을 내포하며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기에 영원성과는 상극인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필연적으로 변화를 유발하는 시간, 그 자신은 영원하다. 이러한 이유로 진시영에게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탄생되어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 스스로 영원한 것이며 영원성의 상징이 된다.
지속이라는 성질은 사실 지속되는 변화 위에 겹쳐져 있다. (중략) 예를 들어 “변화 없는 변화”라는 울프(Wolfe)의 표현이나 지속에 대한 베르그송(Bergson)의 발견은 “변화 속의 지속”이라는 괴테(Goethe)의 시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영원이라는 주제는 <웨이브>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난다. 진시영은 내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영원한 존재인 시간의 알레고리(allegory)로서 광대한 자연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작가는 시간이 그렇듯 자연도 변화 속에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자연은 계속 변화한다. 그러나 자연은 우리가 태어날 때에도 존재했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변화의 상징이자 흘러가는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통로인 동시에 영원함의 상징이다. <웨이브>에 등장하는 조수의 흐름, 파도와 물결, 폭포, 일출과 일몰, 그리고 그것이 은유하는 태양과 빛은 흘러감-변화-과 지속(duration)을 동시에 상징한다. 하루는 시작을 알리는 일출과 종결을 알리는 일몰로 이루어진다. 해가 아침에 떠올랐다가 저녁에 지는 것처럼 만물의 시간도 그렇게 시작되고 끝난다. 작가에게 일몰과 일출은 매우 중요하다. 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일몰과 일출의 광경 앞에서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압도의 순간을 경험한다. 이는 자연의 장관이 주는 숭고의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순간 자신을 되돌아보는 내적 몰입의 시간을 갖기 때문이다. 이에 작가는 관객들이 <웨이브>를 감상하는 동안 몰입의 시간을 갖고 순간 속의 영원을 경험하길 원한다.
영원성에 대한 탐구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다시 흘러나오는 에너지(energy)를 포착하는 <플로우> 시리즈로 이어진다. <플로우> 시리즈에서 작가는 암전된 공간에서 몸에 LED(light emitting diode)를 부착한 채 춤을 추는 무용수의 움직임을 촬영, 편집하여 보여준다. 구체적인 몸의 모습은 사라지고 빛의 움직임만 남은 이미지는 만물을 관통하는 에너지와 끝없이 순환하는 생명력을 담아낸다. 순환 역시 이동과 변화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돌고 돌기에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성을 획득하며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함축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운주사> 역시 영원성에 대한 탐구이다. 진시영은 운주사(雲住寺)의 천불천탑(千佛千塔)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애니메이션(animation)으로 제작하고 LED 이미지로 석불과 석탑의 창조 과정, 하늘을 향해 오르는 석공들을 표현했다. 작가는 특히 운주사 이야기가 구전되어온 설화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설화는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설화는 그것의 사실성이나 정확성과는 상관없이 이미 하나의 상징물로서 영구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작품 속 존재들이 그렇듯 영원성을 갖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물리적 시간은 그 스스로 객관적인 지속과 변화를 함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은 상대적인 양상을 갖는다. 영원과 순간에 대한 인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느끼는 진정한 시간은 시계(時計)적 시간이 아니라 체험적 시간이며 그 체험적 시간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특수한 상황에 따라 유발되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주관성에 의해 결정된다. 미디어 아트 역시 그러하다. 미디어 아트는 물리적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그것을 감상하는 동안 객관적인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나 작품 속에 담겨진 시간은 작가적 선택에 의해 조작되고 편집된 지극히 주관적인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일 분일수도, 천 년일수도 있으며 비(非)순차적일수도, 역행적일 수도 있다. 진시영의 작품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느끼는 시간 역시 주관적이다. 누군가는 찰나를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인류의 역사, 세계의 역사를 모두 담아내는 초월적 영원성을 느낄 것이다. 진시영은 모든 관객들이 작품 안에서 자신들만의 영원성을 체험할 수 있길 바란다. 작가는 예술이 마음을 정화시키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영원성을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영원의 시간이 일순(一瞬)일지, 아니면 영겁(永劫)일지는 작가도, 관객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각자 자신만의 영원을 경험할 뿐이다.
영원성에의 탐구는 주제뿐만 아니라 매체에서도 찾아진다. 주제적인 면에서의 영원성이 순간과 지속을 넘나드는 철학적인 시간이었다면 매체에서의 영원성은 보다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의 것으로서 전자(電子)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원한 예술품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의 발현이다. 진시영은 대부분의 작업에서 LED를 사용한다. 그것은 촬영되어 비디오(video) 영상으로 보여지기도 하고 입체적인 조형물에 부착되어 가상적 3차원을 뛰어넘는 실제적인 3차원 입체 영상이 되기도 한다. 이 경우 영상 없이도 작품으로 존립 가능한 미디어 조각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기계를 사용하지만 기계 없이도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갖는 미디어 아트, 허상이 아닌 실제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만질 수 있는 작품이 되는 것이다.
한편 진시영은 LED를 사용하게 되면서 점점 빛을 통한 형식 실험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빛은 존재하지만 실체를 잡을 수 없고 경계와 형태를 지워버린다. 모든 사물은 고유하고 규정 가능한 시간과 공간을 지닌 반면 빛은 규정할 수 있는 시공간성을 지니지 않는다. 빛에는 변화하는 반복적인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빛은 물리적으로 한정된 경계-시간과 공간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을 표현하는 데에 유효하다. 그런데 빛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성스러운 존재, 태양, 신과 같은 영원불멸하는 절대적인 존재의 상징물이었으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영원성뿐만 아니라 현세적 영원성 모두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진시영 역시 영원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면서 더욱 빛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편 빛은 우리가 세상을 볼 수 있는 기본 전제 조건이며 미디어 영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결국 모든 것은 빛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빛과 영원성이 완벽히 결합된 작품이 바로 <플로우-나전칠기 Flow-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2011) 시리즈이다. <플로우-나전칠기> 시리즈는 다양한 형태의 나전칠기가 장식된 프레임(frame)에 <플로우>의 영상이 투영된 작품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서구적이고 과학적이며 인공적인 LED의 빛과 동양적이고 아날로그(analog)적이며 자연적인 자개의 빛을 완벽히 결합시킨다. 일련의 작품들에서는 움직임의 흔적들이 난초를 그려내도록 이미지가 조율되었는데, 이는 사군자로 대표되는 문인화가 필획(筆劃)의 운동감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원한 정신의 표현이라는 데에서 착안한 것이다. 정신성을 대표하는 사군자가 무용수의 춤사위로 그려졌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뿐만 아니라 세상의 근원적 기운과의 일치됨을 뜻한다.
<플로우> 시리즈의 경우 <플로우-나전칠기>뿐만 아니라 <플로우-디지털 사진 Flow-Digital Photography>이나 <플로우-회화 Flow-Painting> 작업으로 확장, 변주되었다. -회화의 경우에는 촬영된 실제 영상보다 더 반짝거리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선의 움직임을 강조하는 과정을 거친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같은 강한 운동감을 보여주는 <플로우> 시리즈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무용수의 동작을 담아내는 선들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구체적인 어떤 윤곽이나 형태도 재현하지 않는, 외부와 내부, 형태와 배경, 시작과 끝의 구별 없이 변이하며 연속되는 추상적인 선이다. 그러나 진시영의 <플로우>가 추상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행위를 기록했기에 구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시영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추상성은 마음 속 관념만의 표현도 아니고 조형적이고 시각적인 실험에의 집중도 아니다. 대상의 실체를 지시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에만 집중하지도, 감각에만 몰입하지도 않으며 세상으로부터 독립된 것도 종속된 것도 아닌 중간적이고 모호한 위치에 놓여있다. 어떤 것의 부정이나 선택도 아닌, 연결 또는 접속의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이다. <플로우> 시리즈에서 작가는 외적인 것을 재현-촬영-하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데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으로 화면을 창조한다. 그의 작업은 외부 세계에의 경험인 동시에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형상과 색의 구성인 것이다.
이처럼 진시영의 <플로우> 시리즈는 구상도 추상도 아닌, 그 스스로 존재론적 가치를 획득한 형상으로서 존재하며 우리가 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실재에 접근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설명대로 형상은 이미지의 하나이지만 일반적인 이미지가 이미지 밖의 지시 대상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자족적이고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형상적 공간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실재하는 것과 상상적인 것 등의 구별이 모호하고 그것들 사이에 어떤 기준이나 척도가 존재하지 않아 현현하는 형상들을 향한 순수한 관조의 상태를 불러온다. 그리고 이 관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영원성을 체득한다. 진시영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의 작품이 차갑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물질-기계문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적인 감성을 적신다. 진시영의 미디어는 감성적이다. 그리고 열렬하다. 그것은 작가가 미디어 아트라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본질과 에너지의 흐름, 그에 대한 내적 사유까지 담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기계와 인간, 물질과 정신, 순간과 영원, 추상과 구상의 사이를 넘나든다. 그가 영원성을 찾기 위해 자연을 선택하고 무용수의 몸에 LED를 부착하여 에너지를 포착해냈을 때 이미 그는 미디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디지털(digital) 기술을 사용하지만 그 안에 자연, 인체, 설화,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근원에 대한 사유와 같은 아날로그가 존재하기에 진시영의 작품은 내면의 울림을 이끌어낸다.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Schelling)이 인간의 사유를 포함하여 모든 사물의 본질은 생명이라고 말했듯이 진시영은 미디어 아트에서도 생명력을 찾고자 한다. 진시영에게 미디어 아트의 본질은 차가운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에너지와 생명력의 보고이며 정신성의 함축이다. 작가는 ‘예술은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킬 수 있으며 내적인 무언가를 전달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디어 아트에도 적용된다.’고 강조한다. 진시영은 사물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지니고 있기에 딱딱한 벽을 뚫고 존재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 곳에서 약동하고 있는 숨결을 작품의 기원으로 삼는다.
우리 모두가 눈치 챘듯이 진시영은 미디어 아트라는 미궁의 출구를 한 번에 찾길 원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수수께끼의 답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작가에게는 미궁을 탐험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그 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는 스스로 미궁을 창조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