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2013-01-09 ~ 2013-01-15
김지혜
무료
02.730.5454
2013 신진작가 창작지원전시 선정
김지혜 展
‘The City of No Limits- 사진으로 그리다.’
2013 갤러리 라메르 신진작가 창작지원전시 작가로 선정된 김지혜의 개인전이 2013년 1월 9일부터 1월 15일 까지 열린다. 김지혜 작가는 ‘The City of No Limits- 사진으로 그리다.’ 라는 주제로 도시에 대한 인상과 해석을 재현한다. 디지털 이후 사진은 진실 증언의 기능을 넘어 상상력을 구가하고 가상현실을 열어 놓는 매개체로 표현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김지혜 작가의 사진 속 재현된 도시 또한 객관적 현실의 재현이기보다는 주관적 해석을 통한 재현이다. 작가는 도시를 스캔하며 촬영 후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도시에 대한 작가의 인상이며 해석이 이때 만들어진다. 작가는 도시의 한켠을 긴 색 띠로 분해해 놓았고 길게 늘여진 시공간과 함께 알만한 현실이 졸지에 낯설게 보이게 한다. 현실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는 대로도 아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작가의 디지털 포토는 바로 두 도시의 두 얼굴을 표현한 것이며 , 도시의 양가성을 표상한 것이다.
■ 작품 평론
김지혜의 사진
도시생태학, 도시를 스캔하는 이미지 헌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사진은 가히 이미지의 제왕이랄 만하다.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유통하고 유포하는 것으로 치자면 사진만한 매체는 없다. 미술의 꽃이랄 수 있는 회화의 자리를 밀어냈다고나 할까. 더욱이 회화는 미술에 한정되지만, 사진의 가두리는 따로 없다. 이처럼 사진은 일상과 이상의 경계 모두를 아우르는 탓에 일상 속에 더 깊고 넓게 파고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디지털 이후에는 이상의 영역과 범주마저 넘나든다. 현실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즉각 이미지로 구현시켜준다. 사진은 원래 현실의 반영이었고, 현실적인 것의 증거며 증명이었다. 다큐멘터리와 르포르타주 그리고 스트레이트포토가 그랬다. 유태인 학살 현장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수전 손택의 회고에 등장하는 사진이 그렇다.
이처럼 사진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호명되어졌다면, 디지털 이후 사진은 진실보다는 거짓을 증언하기 위해서 더 많이 더 자주 호출된다. 각각 리얼리티를 증명하는 사진과 상상력을 구가하는 사진, 현실을 반영하는 사진과 가상현실을 열어 놓는 사진이 사진의 두 축을 견인하면서 사진의 표현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 덩달아 처음에 현실과 가상현실은 분리되어졌지만, 점차 그 구분이며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가상현실이 현실의 일정 부분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픽처레스크 곧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세속적인 표현에서 이런 현실과 가상현실의 전복현상이 예시된다. 풍경(현실)이 그림(가상현실)의 기준이 되는 대신, 그림(가상현실)이 풍경(현실)의 잣대가 되고 있는 것. 가상현실이 현실의 근거가 되고, 그 자체 또 다른 현실이 된 것이다. 그렇게 가상현실은 현실의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파고든다.
여기에 판화가 가세된다. 각종 사진제판법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판화를 사진과 구별하게 해주는 근거는 그저 장르상의 명분에 지나지가 않는다. 어떤 판화는 사진으로 볼 수가 있고, 어떤 사진은 판화로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사진은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장르의 벽을 넘는다. 김지혜는 판화를 전공했지만, 진즉에 판화와 사진과의 친족성에 주목했고 흥미를 느꼈었다. 그런 탓에 사진과 판화 모두를 아우르는 독특한 형식의 지점에 이를 수가 있었고, 현실과 가상현실이 혼성된 남다른 비전을 열어 보일 수가 있었다.
김지혜는 카메라를 들고 도시를 배회한다. 흡사 느와르 영화장면 같은 스산한 도심을 파고들어 적당한 사냥감을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적당한 사냥감이라고는 했지만, 엄밀하게는 익명의 사냥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익명은 도시의 파사드고 페르소나며 아키타입이다. 익명을 찾아 헤매는, 건 대신 카메라를 들고 도시를 스캔하는 이미지 헌터라고나 할까.
그렇게 도시의 이곳저곳이 카메라에 붙잡힌다. 그리고 컴퓨터 작업을 하는데, 도시에 대한 작가의 인상이며 해석이 이때 만들어진다. 만들어진다? 사진은 찍는 사진과 만드는 사진으로 나뉜다. 편의상 사진의 물길은 찍는 사진에서 만드는 사진 쪽으로 흘러왔다고 볼 수가 있겠다. 작가의 사진에는 찍는 사진과 만드는 사진이 모두 들어있다. 이미지를 채집하기 위해 찍는 사진이 입력단계에 해당한다면, 그렇게 찍은 사진을 컴퓨터를 통해 만들고 조작하는 과정이 출력단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사진을 만들고 조작하는가. 만드는 사진은 사진을 만들 뿐만 아니라, 도시에 대한 인상과 해석도 결정짓는다. 사진을 조작하는 이유가 도시에 대한 인상과 해석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에 의해 재현된 도시는 객관적 현실의 재현이기보다는 주관적 해석을 통한 재현이다. 그럼에도 도시에 대한 인상이며 경험이 대동소이한 연유로 인해 재차 객관적 현실성을 얻는다. 바로 중첩된 도시, 흐르는 도시, 부유하는 도시다. 중첩된 도시는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가 포개져 있음을 표상한다. 그리고 도시는 흐르고 부유한다. 도시가 흐르고 부유하는 것은 뿌리 없는 사람들을 표상한다. 이처럼 뿌리 없는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물길과 물길 사이로 노이즈가 끼어든다. 저마다 다른 속내며 이해관계가 잡음을 일으키면서 도시의 소리를 생성시킨다. 그 소리를 시각언어로 옮겨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서 본다.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본다. 저마다 보고 싶은 것을 보므로 지엽적으로 보고, 저마다 보고 싶은 대로 보므로 왜곡된 형태로 본다.
이처럼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밀어올린 지엽적인 시각과 왜곡된 형태야말로 도시인의 공통경험일 것이라고 작가는 진단한다. 바로 도시에 대한 작가의 인상이며 해석이다. 이렇게 마치 초점이 나간 것처럼 흐릿한 사진, 피사체의 주변이 겹쳐 보이거나 흔들려 보이는 사진, 예각이 긴장감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이 도시의 표상으로서 제안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콜라주나 먹선 드로잉이 부가되지만, 대개 도시의 인상이며 성격은 사진 자체에서 이미 상당할 정도로 결정된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도시의 인상이나 성격은 설치형식을 통해 현실성이 강화된다. 마치 소리 없는 노이즈를 듣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이해관계의 네트워크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주는 것이다.
이처럼 김지혜는 진즉에 도시에 주목했고, 도시의 생리를 작업으로 옮겨놓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도시의 생리를 작업으로 옮기는 일에 사진과 컴퓨터가 중요한 수단이며 방법을 제공하고 있다.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사진과 컴퓨터라는 매체나 매체적인 특수성은 도시의 생리에 부합해 보인다. 일종의 도시생태학이 주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주제와 표현 방식 모두가 무리가 없어 보이고 조화를 얻고 있다는 생각이다.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주제와 방법의 궁합이 맞아 떨어진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이미지와 이미지가 서로 반영하고 중첩되는 것을 통해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의 네트워크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식이다. 가장자리가 겹쳐 보이고 흔들려 보이는 이미지를 통해 저마다의 관점과 관점이 부닥치고 충돌하는 노이즈(차이가 만들어내는 잡음)를 표상하는 식이다.
이렇듯 작가는 진즉에 사진과 컴퓨터라는 매체에 매료됐고 익숙했다. 그렇게 컴퓨터를 만지고 놀다가(?)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다. 우연성이 개입해 최초 입력한 이미지를 왜곡하고, 예기치 못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근작에 이른다. 원래 판화와 사진이 결부된 방식의 작업을 하다가, 마침내 본격적인 사진을, 만드는 사진을, 디지털 사진작업을 선보이기에 이른 것이다. 그 과정을 보면, 컴퓨터상에서 최초 입력된 정보를 왜곡하고 변형하는 것인데, 실제 풍경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공간 일부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마우스로 밀어낸다.
판화와의 연관을 생각한다면, 마우스는 일종의 전자 스퀴지 내지는 디지털 스퀴지에 비유될 수가 있겠다. 그리고 회화와 관련해 보자면, 마우스가 그림을 그리는 붓을 대신한 것이란 점에서 마우스 페인팅과 비교되는 일종의 마우스 포토로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컴퓨터상의 이미지는 픽셀로 이뤄져 있다. 작가는 이 툴(컴퓨터 프로그램과 마우스가 연동된)을 이용해 픽셀을 유동화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적어도 논리적으로 볼 때 컴퓨터상의 이미지를 의도한 대로 왜곡하고 변형하고 견인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우연성이 개입되는 것인데, 전작에서의 콜라주나 먹선 드로잉이 그랬던 것과도 같은 우연적인 요소와의 놀이를 즐기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처럼 우연성의 놀이라고해서 자칫 작가의 작업을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우연성은 말 그대로 예상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탓에 수많은 실패를 거듭해야 하고, 그렇게 축적된 실패가 뒷받침된 어떤 감각적 지점이 가늠된다. 작가는 그렇게 가늠된 감각적 지점을 실마리 삼아 원하는 이미지를 찾아가고 찾아내는 것이다. 실로 우연성의 바다와 감각의 바다를 헤집는 일에 비유될 수가 있겠다.
그렇게 마우스가 지나가면서 만들어낸 이미지며, 최종적으로 출력된 이미지는 어떤가. 마치 사물 고유의 색상을 긴 색 띠로 분해해놓은 것도 같고, 시공간을 길게 늘여놓은 것도 같고, 감각적 현실이 졸지에 추상적인 현실로 변모되고 변질된 것도 같다. 길게 늘여진 시공간이 현실감각을 흔들어놓으면서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면 좀 과장적인가(아마도 사진이 지금보다 더 커진다면 좀 더 실감날 것이다). 상대성의 원리에서처럼 시공간이 좌표를 잃고 임의적으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현실(아님 비현실?)을 예시해주고 있다면 좀 비약적인가. 여하튼 분명한 것은 알만한 현실이 졸지에 낯설어 보인다는 점이다.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를 떠올려주는 대목이다. 현실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는 대로도 아니다. 익숙하면서 낯설다. 도시를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익숙하고, 왜곡되고 변형된 이미지란 점에서 낯설다. 바로 도시의 두 얼굴을 표현한 것이며, 도시의 양가성을 표상한 것이다. 도시는 친숙하면서 낯설다. 안 봐도 비디오인 친숙한 이미지들로 축조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알만한 이미지들은 그 이면에 생경하고 낯 설은 이미지를 숨겨 놓고 있다. 캐니와 캐니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언캐니를 숨겨놓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이미지를 스트라이프로 분해해놓고 있는 작가의 디지털포토는 이렇듯 도시의 양가성을 표상한다. 그 표상형식은 꽤나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적인 감수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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