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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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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섭 개인전에 부쳐
- 삶의 원형적 이념으로서의 풍경 -
주성열 | 예술철학/미술비평, 세종대


*


들어서며

“나무는 끊임없이 비상을 거듭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날개들인 저 나뭇잎을 파득인다.”  André Suarès

소나무의 강건함과는 달리 그의 조형언어는 나직하고 잔잔하다. 할 말을 줄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직한 말을 읊조리고 있다. 정직이 자신을 구원하는 방식이 되지도 못하고 종교적 발설도 어설프지만, 작업은 그에게 충만한 미적 의식의 발현이며 기쁨이며 삶의 목적이다. 신은섭이 선택한 소나무는 그 너머가 없는 ‘한계’가 아니라 그 너머로 가는 ‘경계’를 보여준다. 

작품 속 소나무는 낯설게 하기라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확인하는 심미적 이성의 눈을 통해 무언가를 욕망할 수 있게 하는 틀로서 기능한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좌절을 극복한 트임은 몰라도 좋을 진실마저도 드러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확장된 자아를 발견하는 사물인 소나무는 스스로 부과한 자유와 책임이라는 윤리를 안고 냉엄한 현실에 외롭게 적응하는 강철 같은 이미지를 포착하는 작가의 눈과 미적의식의 발현에 의해 한지와 먹이라는 재료만으로 구현되었다. 스스로는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파괴는 소멸로 이르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제 몸을 상처 냄으로써 재생되어야 할 몸을 지킬 수 있다는 알레고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토록 극한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작가의 아바타 역할을 하는 강건한 소나무의 의미는 자연의 요소를 풍경으로 만들어 내면을 환원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하지만 인간 세계의 상처를 선연하게 부조하고 있어 소중하다. 그러므로 작가는 소나무의 근원적 실체와 자신의 사유의 실체가 동일하게 상승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한통속이 되었다. 

정신과 물질이 상응(correspondances)하는 세계

“나는 내 정신으로 사물을 비추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정신을 향해 반사시키고 싶다.” 보들레르

소나무는 공자의 덕을 표지하기도 하고, 디오니소스의 튀르소스(Thyrsos)의 지팡이 꼭대기에 솔방울이 달려 있어 타이탄에게 먹히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메타포를 담고 있기도 하다. 장대한 노송은 하늘의 신들이 땅에 내려 올 때 이용한다는 말처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영물로도 취급된다. 죽은 자의 영혼 안식을 위해 주변에 심어지고 금줄에도 걸리는 것은 소나무로의 영생을 기원하는 마음에서이다. 역경을 견디는 선비의 올곧은 의지를 추사 김정희는 이상적에게 전했던 ‘세한도(歲寒圖)’를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살이 터지고 갈라진 곳, 상처의 흔적이 있는 곳은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감염이 일어나고 때로는 생명의 영감이 샘솟기도 한다. ‘살이기에 부패의 감염과 신선한 영감이 공존한다.’라고 철학자 김형효는 메를로-퐁티의 ‘살’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상처와 같은 갈라진 틈은 하나의 적극적 부재가 현존적 존재를 지탱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미 재생된 상처의 흔적은 몸과 영혼의 투쟁을, 외부적인 요소와의 소통 그리고 생명의 유지를 위해 자신의 두께를 형성한다. ‘살’의 철학적 개념은 모든 존재자들 간의 존재론적인 일치관계를 의미화 한다. 소나무와 작가의 ‘사이-세계’(inter-monde)는 ‘살’에 의해 작가의 의식과 필연적인 관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다.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대부분 사람의 몸과 유사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상호정합'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지향적 인과관계인 나무는 하나의 자연물이지만 이내 작가에게 시각 경험으로 유발되어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갈구하던 의식을 자연의 작동방식으로 전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나무는 바깥 조직에서 안쪽으로 목질조직을 밀어 넣으면서 ‘살’을 넓혀 간다. 작가의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형질처럼 색의 두터움 또한 나약한 세포를 채우는 목질과 같은 맥락으로 여겨진다. 목질 조직은 흔적을 지닌 부재가 현존을 지탱하는 이중 구조를 가진다.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의 관계처럼 현존과 부재는 상보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론적 조직이다. 작가가 응시한 나무는 거친 외모를 지녔어도 자신을 희생한 세포들과의 은밀한 관계로 가지 끝에 잎을 매단 채 변함없는 삶을 영위한다. 

소나무의 세계는 무기질 같은 성질로 캄캄해서 엄숙한 성찰이나 깊은 친화력이 있어야 열린다. 사물을 관조하면서 얻는 명상의 깊이로는 소나무만한 것도 없다. ‘남산 위의 소나무’처럼 깊은 뿌리와 강건한 형상은 민족 심상의 원형으로 기억되고 있다. 중력의 법칙을 거부하는 나무의 상승 이미지 아래에는 그 반동적인 힘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깊은 뿌리가 있다. 그 둘의 힘이 상호작용하기에 강건한 용트림이 가능한 것이다. 긁어내고 상처를 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두터워지는 자기방어로서의 나무의 재생력에 신비스러운 생명의 원리가 존재한다. 소나무의 웅장함과 역동성 앞에서 생의 이치나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느끼면서 엄숙하고 경건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응시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소나무

“이 작가의 멋은 진함(濃)이 아니라 담담한(淡) 데 있으며, 익은 맛(熟)이 아니라 생생한 맛(生)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를 알리라.” 조선시대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의 능호필 작품의 발문 중

고대 그리스나 중국의 전통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전경의 나무는 입체적이지만 뻗은 가지들은 하늘을 배경으로 평면적으로 투사된다. 그림은 수직성의 공간이 가로지기의 평면과 만나는 기하학적 속성을 지닌다. 소나무가 상승한 수직적 공간이 현실을 의미한다면 나뭇가지들이 펼쳐져 가로지르는 평면 공간은 초현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작업은 분명 선의 작업이다. 색면이 만나는 지점의 선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형상의 자극적인 면모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선의 미적 기능을 추구한다. 묘사이면서도 표현적인 속성을 끌어내는 선의 구조는 명암의 농도를 따르면서 대상을 입체적으로 부각시켜 좀 더 환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세밀한 필치로 입체감을 드러내는 것은 서양화에서의 드로잉이 먹의 농담을 최소화하는 형식인데, 이처럼 동양화이면서 서양화적 기법으로 사물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이 그의 그림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하는 요인이다. 이처럼 신은섭의 그림은 정신을 표명하면서 초근접적 지각 체험인 접사에 근거하므로 ‘시점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소나무를 향하는 접사의 시점과 하늘을 향하는 원근법적 시점인 다중시점은 정신을 중시하는 동양화의 특성과 관계가 깊다. 인간계를 넘어서는 소나무의 초월성과 소나무의 상징성인 기운생동의 위엄을 제시하려는 의도로 동양화와는 거리가 있는 원근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소나무의 초월성은 원근법적 구조와 사실적 묘사의 치밀함으로 암시되고, 가지 끝은 무한으로 연장되어 초월적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자원(芥子園)에도 내면으로부터 사물과 일치해서 사물을 표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형태가 괴기한 것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내재된 힘과 개성의 기운생동의 관조적 재현이 원인일 것이다. 조용하고도 강인한 삶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구조적인 것을 파악하려는 예술의지, 자연을 통한 마음의 힘을 활성화시키려는 작가의 관조적 태도와 내면적 삶이 반추된다.

화면을 안정감이 부족한 상하로 길게 그리는 이유는 소나무의 특성을 쫒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양화의 전통적 양식이 지닌 자연의 기운과 힘을 연결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압도적인 느낌과 자연의 신비로운 힘을 숭고하게 하려는 그림은 평화스러운 조감도가 아니라 턱을 치켜 들어야만 확인이 가능한 부감도가 되었다. 근경, 중경 그리고 원경이 고개를 젖히는 각도에 따라 진행되는데 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aura)처럼 먼 것과 가까운 것이 겹쳐져 현재의 감각이 되는, 거리가 감각의 직접성에 일치하는 순간의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나가면서

“지옥이건 천국이건 무슨 상관인가? 심연 밑바닥에, 미지의 밑바닥에, 우리는 잠기고 싶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고!” 보들레르

‘날아가는 것들은 있어도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없다.’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사실 날아오르는 힘보다 밑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더 강하지 않은가.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빨라 현기증을 일으키지만 수직의 소나무는 적어도 100년이라는 중력의 시간을 거스르고 있다. 작가의 일상과 내면 그리고 자연이라는 삼각형의 프레임은 성찰을 거쳐 자기동일성은 물론 사회적 현실의 온갖 문제와 욕망까지도 소나무라는 사물을 통해 반영하고 있다. 소나무를 만나러 가는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현실도 동행하는 듯하다.  

진흙 밭에서 굴러야 비로소 초월적인 곳까지 솟구쳐 오를 수 있듯이 바위를 가르고 물이 닿는 곳까지 줄기차게 뿌리를 내리며 강건한 나무가 되도록 지탱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닿지 않는 뿌리는 아무런 기능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작가의 삶의 뿌리 또한 생명의 지속이라는 공간까지 닿아 있다. 

작품이 지닌 미학적 가능성을 폭넓고 깊이 있게 제대로 증폭시켰는지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더 넓은 지평을 위한 비평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현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할 것도 있다. 누구든 자아가 분열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 사회적 병리현상을 고스란히 수용하는 주체의 갈등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균열과 불행에 자아를 투사하고 내면화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자아에 대한 배려와 생명의 유지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뭇가지 끝에서 생명력을 흡입하는 잎들이 끊임없이 삶을 희망하듯, 숨을 쉬고, 그도 함께 희망을 나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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